정월 초 강진읍의 가장 큰 잔치 ‘줄다리기’

강진읍 주민들은 매년 음력 정월 초가 되면 각 가정에서 거둬 중앙로에 모여 줄을 만들기 시작했다. 줄다리기가 열리는 중앙로 바닥은 줄을 당기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주변에는 청사초롱이 내걸려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강진읍 중앙로에서 그런 잔치가 다시 열리길 기대한다.
해방직후 까지만 해도 강진읍 사람들은 설을 막 쇠면 바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집집마다 짚을 모아 새끼를 꼬기 시작하고, 이것들을 서로 질세라 모아서 중앙로 공터로 가져나갔다. 중앙로 대로변에는 각자의 집에서 나온 새끼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이 새끼들은 다시 새끼를 꼬아 더 퉁거운 줄을 만들고, 그 줄을 다시 다른 줄과 꼬아서 어른 몸집모다 큰 줄을 완성했다. 그렇게 해서 직경은 2m, 200~300m의 초대형 줄이 완성됐다.

이렇게 큰 줄을 만들기 까지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01년에 발행된 ‘강진군 마을사 강진읍편’에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돼 있다. 음력 정월로 접어들어 강진읍의 동 서쪽 대표자들이 줄다리기를 하기로 협의가 이뤄지면 줄을 만드는데 필요한 볏집의 양을 헤아려 집집마다 볏집이나 새끼를 거둬 들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마을이 동서로 갈라져 대립의식이 뚜렷해 졌다. 볏집을 수집하는 과정이 줄다리기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볏집 수집이 줄다리기의 시작
500년 역사의 충남 당진 기지시줄다리기(중요무형문화제 제75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최종 등재돼 있으며 지금도 지역 축제로 치러지고 있다. (사진=충남 당진시)
정월 12~13일쯤에 마을의 넓은 공터에서 일단 거두어진 볏단을 가지런히 다듬어서 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먼저 어른 팔뚝만한 줄을 꼴 수 있을 정도의 볏짚을 가지런히 다듬어서 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먼저 어른 팔뚝만한 줄을 꼬아갈 수 있을 정도의 볏짚 밑 동아리를 묶은 다음에 한 사람이 이를 쥐고 서 있으면 세 사람이 삼등분하여 각각 한 가닥씩 쥐고 오른쪽으로 삼 합의 줄을 꼬아간다.

이렇게 하다가 줄이 길어지면 대들보나 나무에 메 놓고 꼬아가기도 한다. 이런 줄들이 많이 꼬아지면 줄 세 가닥을 늘여 놓고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서 도셔 놓은 줄을 삼합으로 꼬아간다. 이 27합의 줄을 다시 삼합으로 하여 꼬아 가는데 발동기에 연결하여 꼬아 쓰기도 했다는데 이 27합의 줄을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삼합으로 가면 결국은 81합의 어른 몸통만큼 커다란 줄이 된다.

이 줄을 길게 늘여 놓고 그 중심부를 구부려 ‘고’를 만드는데, 암줄의 ‘고’는 숫줄의 ‘고’보다는 훨씬 크게 만든다. 이 것은 줄다리기 전 암줄의 고 속에 숫줄의 고를 넣어서 곳대(비녀목)를 끼워 연결하기 때문에 미리 숫줄의 고가 들어갈 만큼 크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암줄이 숫줄 보다는 크다. 이런 줄이 완성되기까지 10일 이상이 소요됐다.

고를 만든 다음에는 동체 구분으로 내려오는데 2가닥의 줄에 다른 한 가닥의 큰 줄을 가져다가 삼합으로 꼬아간다. 이 대의 줄의 크기는 81합×3합 규모여서 그 크기는 한아름이 훨씬 넘는 큰 줄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큰 줄이 만들어지면 머리부분부터 새끼줄을 고리 부분까지 메달아 간다. 이것은 줄다리기를 할 때 줄이 너무 커서 잡아당기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편리함을 위해서이다.

또 줄을 옮겨서 어깨에 메기 위해서는 고 머리 바로 및 부분부터 길이 4.5m 정도의 나무 7-8개를 가져다가 2m 간격으로 묶어 간다. 이를 멜대 또는 지렛대라고 한다.

이 멜대가 다 묶여지면 청사초롱을 달게 될 대목을 대주면 줄은 다 완성된다. 이러한 큰 줄을 만들기까지는 수십명이 몇일을 걸려야 완성되곤 했다. 줄을 만드는데 드는 재료는 짚과 새끼, 그리고 멜대와 청사초롱을 달기 위한 대목과 대나무 등이다.

한아름이 넘었던 줄의 두께
줄다리기는 지금도 주민들이 단합하는 중요한 체육행사다. 군민의날 행사에서 종합운동장에서 작은 줄을 이용해 줄다리기 행사가 열리고 있다.<사진=강진군 제공>
이 밖에 줄을 만들 때 여자들이 넘어가면 그 부분이 끊어진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줄을 만들어 놓고 성기를 상징하는 ‘고’ 부분에는 초롱을 단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뿌려 부정한 것이나 여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줄다리기를 할 때 지역구분은 대개의 경우 마을을 지금의 강진읍 극장통을 중심으로 동·서부로 나눠서 동부는 남성인 숫줄, 서부는 여성인 암줄로 구분된다. 동부에서는 읍의 동쪽인 동성리, 교촌리, 점수리, 백금포, 영독리, 금곡리 등이 참가하고 있으며 서부에는 서성리, 남성리, 평동리, 목리, 남포등이 참가하여 승패를 겨루었다.

동부에서는 항상 숫줄을, 서부에서는 암줄을 만들었다. 대보름이 가까워지면 줄이 완성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숫줄을 암줄에 넣은 후 큰 비녀목을 끼웠다. 그렇게하면 300m나 되는 초대형 줄이 지금의 중앙로 거리에 길게 늘어섰다. 정 중간은 극장통 입구, 모란다방 자리였다. 지금의 베네커피전문점이 있는 자리다.

모란다방 자리가 정 중앙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양편에서 1천여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줄을 잡았다. 구경꾼들은 그 숫자가 줄을 잡는 사람들의 몇 배가 됐다. 대보름 달이 뜨면 주변에 준비해둔 청사초롱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각 마을에서 나온 농악대의 고깔이 장관을 이루었다. 꽹과리, 징, 장고, 북, 소고등이 일정한 박자를 맞춰 끊임없이 소리를 냈다.

1990년대 초 강진줄다리기를 연구했던 강현구 선생은 “일반적으로 줄을 당기는 장소는 크게 보리밭이나 갯가, 강변으로 나뉘어지는데 강진읍에서는 중앙로 한길에서 줄을 당기는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며 “줄다리기가 그만큼 강진읍 주민들의 정서에 친숙한 놀이였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이한 것은 강진읍의 줄다리기에서는 횃불이 보이지 않고 청사초롱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즉 줄을 당기는 시기가 달이 밝은 보름인데도 불구하고 수십개의 줄다리기 행사장 주변에 청사초롱을 달았고 타 지역의 줄다리기에서는 보편적으로 횃불이 등장하지만 강진읍의 줄다리기에서는 횃불은 등장하지 않고 아름다운 청사초롱이 내걸린 것이다.

횃불 대신 청사초롱이 휘엉청
줄다리기 주변에는 늘 술과 음식이 넘쳐났다. 주민들이 설과 대보름을 지내기 위해 마련한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고, 강진의 부자들이 동편과 서편에서 서로 질세라 술과 안주를 제공했다.  300m 이상된 줄 주변에 거의 10m에 하나씩 술동우가 놓아졌다.

줄다리기는 밤새 진행됐다. 그날 밤에 승패가 갈리지 않으면 3~4일씩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때면 양쪽의 갑부들이 도맡아서 술과 음식을 추가로 내 왔다. 강진읍의 어르신들은 “줄을 당길때 그 쾌감은 직접 당겨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정도다”며 “온통 잔치 분위기였고 주민 화합잔치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해방을 전후해 벌어진 줄다리기에서는 동쪽의 대장은 수년 동안 이선웅씨란 분이 맡았다. 강진치안대장을 맡았던 사람으로 유도가 2급이었다. 땅딸한 키에 호기가 대단했다. 서쪽의 대장은 주로 김현문씨였다. 중앙병원 김영배 전 원장의 부친되는 분이었는데 동아일보지국장을 하면서 골수 야당파이기도 했다. 줄다리기가 열리는 시점을 전후해서 양쪽 대장들의 권세는 대단한 것이여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추앙의 대상이었다.

일단, 하루 이틀만에 승패가 나지 않으면 줄다리기는 며칠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그럴때면 강진의 부호들이 식사와 술등을 계속 공급하여 며칠 밤을 세워서 줄을 당겨도 음식이 부족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며칠을 계속해서 줄을당기다가 한편이 끌려가서 패하게 되면  이긴 편은 ̒좋다! 좋다~̓를 연발하며 줄을 메고 온 마을을 돌아 다녔다. 그야말로 정초에 있었던 강진읍의 축제였다.

강진읍 줄다리기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강진군지등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완도군 고금도 관왕묘에 봄과 가을에 올리는 제향이 있었다. 제향의 제관은 항상 병영의 병마절도사가 맡았다. 그 행차가 거창했는데, 병영에서 까치내재를 넘어와 목리까지 와서는 탐진강을 건너야 했다.

강진현감은 항상 목리에 부잔교를 띄워서 병마절도사가 편안하게 강을 건너게 하는게 임무였다. 고깃배를 모아서 줄을 세운 다음 그 위에 나무 판자를 깔아서 다리를 놓은 것이였다. 이 일은 강진읍 주민들의 부역을 통해 이뤄졌다.

그래서 강진현감이 강진읍 주민들을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게 해서 진 쪽에게 부잔교 부역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강진읍 줄다리기는 그렇게 시작됐다는 구전이 있다.

전라병영성의 삭전과 연관
이외에 소와 관련된 강진읍의 거센 터를 누르기 위해 줄을 당겼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강진읍의 줄다리기 유래와 관련해서는 전라병영과 큰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영에도 큰 줄다리기가 있었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그때는 줄다리기를 삭전(索戰)이라고 불렀다. 강재 박기현(1864.4~1913.6) 선생의 일기 ‘강재일사’에 삭전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강재일사등에 따르면 매년 정월 대보름 오전에 전라병영 장대 앞에서 삭전을 했다. 또 정월 11일경 즉 보름 몇일전 밤부터 시작할때도 있었으며 전라병사가 영을 내려 관내 평민들이 성안으로 들어와 관람하도록 했고, 가족들까지 참여하여 관람을 하게 했다. 전라병영의 ‘삭전(索戰)’은 장졸의 동질감과 공동체 단합의 집단놀이로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전라병사가 영을 내려 관내 민인이 보도록 한 것을 보면 민심 위무와 민정 안정을 통한 주민 통치의 편의성을 따르려 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주민들은 가족까지 참여하여 삭전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연초 오락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라병영의 줄다리기 축제가 강진읍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6.25 이후 중앙로에서 하던 강진읍 줄다리기는 그 모습을 감추었다. 대신 각 마을에서 하는 줄다리기가 있었는데, 강진읍에서 가장 유명한 줄다리기는 목리마을의 줄다리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것마저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강진읍 중앙로 줄다리기를 오늘날 재현해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모습이 상상만 해도 마음이 설레인다. 강진읍의 한 주민은 “강진읍 중앙로 상가들이 갈수록 어렵다고 하는데 1년에 한번씩 줄다리기 이벤트를 하면 좋은 홍보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잘 하면 전국적인 볼거리가 될 수 있는 충분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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