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바리들아 잘 있거라”드디어 해방, 희망속에 귀국했으나

B-29 공습, 전재산 소실

박상우 선생이 중앙지업사를 운영하던 때의 모습이다.
세계 2차대전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일본 전토에 미군 B-29 폭격기의 공습이 심해졌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것을 알아차린 박상우의 선친 박태순(朴泰淳)은 사업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귀국하여 사업를 계속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44년 화물선 한 척을 세내어 간단한 가구를 실려 보냈다. 이 때 모친과 동생들도 조선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박상우와 동생 박상희와 선친은 일본에 남았다. 일본은 전쟁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선친 박태순은 조선에 나가서 개업할 요량이었다. 거래처에서 수금하고, 약재를 구입하여 기차역 창고에 보관하고, 또 기차에도 실어놓고 있었다.

이 때가 1945년 3월 13일 밤이었다. 날만 새면 기차가 출발하게 될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방공호를 곳곳에 파놓았다. 공습경보가 발령되면 전 주민이 방공호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연수당 한약방에는 지하 방공호가 있어서 그 안에 침구와 쌀이 항상 보관되어 있었다. 박상우와 동생 박상희는 방공호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선친께서는 경찰서에 갖다오더니 자식들에게 “정신차리라”고 소리쳤다. 박상우 형제가 정신을 차리고 밖에 나갔다. 주위는 벌써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미군의 B-29 폭격기는 도쿄(東京)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도시를 공격할 때  소이탄을 사용하였다. 소이탄이란 가옥이나 진지 등의 표적물을 소각 파괴할 목적으로 제조된 탄환을 말한다.

이 폭격기는 1945년 8월 6, 9일에 각기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것도 이 비행기였다. B-29에서 소이탄을 투하하는데 하늘에는 불꽃놀이와 같은 불덩어리가 자꾸 내려오고 있었다. 연수당 한약방이 금방 불꽃에 휘말릴 것 같아서 자전거에 이불과 쌀을 싣고 불속으로 달려 학교 운동장으로 피신했다. 그곳에는 이미 이재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방에서 불에 탄 양철이나 나무들이 날아왔다. 다시 불속을 달려 큰 공설운동장으로 피했다. 사람들의 소리치는 소리, 우는 소리 등 생지옥이었다. 사람들의 눈은 빨갰고 얼굴이 전부 시커멓게 되어 있었다. 정전이 되어 암흑세계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이 불바다였다. 선친은 전 재산이 일시에 소각되어 미친 사람처럼 불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웃사람들이 꼭 붙들고 말렸다.

1905년 9월 11일 첫 취항한 관부연락선은 1945년 6월 운항 중지될 때까지 40년 동안 13척의 화객선을 두었다. 수송인력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사진은 신라환(新羅丸·3024t)이라는 관부연락선이다. 이 배는 1945년 5월 25일 태평양전쟁 당시 어뢰에 접촉돼 침몰됐다.<국제신문>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 재산을 몽땅 잃고 알거지가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일본 노인들은 엎드려 부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그 난리 속에서도 흙을 파고 가져온 가재도구를 땅에 묻고 그 위에다 물에 적신 가마니를 덮었다. 실은 시중에 깔려 있는 외상값을 수금하느라고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어서 화물차에 실려있는 약재와 집에 있는 재고품을 모두 정리해서 내일 새벽에 기차로 떠날 계획이었다. 하필 그날 새벽 공습으로 소이탄에 맞아 모두 잿더미가 되버린 것이다. 아! 그 때 수금만 안했드라면, 공습만 비켜갔으면, 애통해 보았지만 이미 겪은 재난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후로 가족들은 선친의 당숙네 집에 생활을 의탁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 후 선친과 아우 박상희는 조선으로 건너갔다. 박상우는 졸업반이라서 일본에 혼자 남았던 것이다. 고국에 먼저 가신 선친께서 시모노세키의 관부연락선 사무과장에게 부탁해서 귀국선을 준비해 놓았다는 연락이 왔다.
 
그곳에 찾아가 보았더니 이틀 전에 연락선이 기뢰에 맞아 침몰하여 취항할 수 없다고 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참 생지옥같은 전쟁상황이었다. 그 때 박상우는 오사카로 돌아갈 수 없어서 고민했다. 결국 시마네 현으로 소개(疏開)돼 가신 종수 할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소개(疏開)해 간 시마네현에서 맞은 해방소식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미군들이 상륙하면 모두 죽창을 들라고 했다. 미군들과 최후의 결판을 내야한다고 국민들을 선동했던 것이다. 도시에 집들이 다닥다닥 밀착되어 있으면 공습의 피해가 크다하여 군대군대 집들을 부숴 공터를 만들었다. 주민들은 농촌으로 소개시켰다.  

박상우는 전화를 피해 시마네겐 미노군 다까스 하마요리란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오사카에서 소개해서 온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고 있었다. 박상우의 선친이 당시 사회적 유명인사였던 까닭에 따뜻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곳 다까스 하마요리란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농부들의 고장이었다. 주민 대부분은 곡식이 풍부하고 인심이 좋았다. 처음 만난 사람들하고도 서로 인사하고 교제할 만큼 친근감이 드는 농촌이었다.
 
이 동네 옆에는〈다까스까와〉라는 큰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강폭은 넓고 물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어찌나 물이 맑았던지 강바닥이 보이며 은어가 수없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어부들은 한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길쭉한 배에 타고 은어떼가 노는 곳에 빨리 가서 그물을 쳤다. 삿대로 물을 때리면 성질 급한 은어들이 도망하다 그물에 걸려서 많이 잡게 된다. 그렇게 잡은 고기는 전부 어업조합에서 수집하여 고급장교들의 식탁에 올린다고 했다.

또한 가을에 홍수가 나면 집이 물에 잠기기도 하지만 굵은 고기들을 많이 잡을 수 있는 재미도 맛보았다. 대도시에는 쌀 품귀현상이 심각했다. 이곳에서 쌀을 구입해서 오사카에 갖다 팔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수송이 큰 문제였다.

종수 할아버지도 생존의 수단으로 쌀 밀거래를 하셨다. 잡히면 경제사범으로 큰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박상우는 공으로 밥을 얻어먹는 처지였다. 결국 이 암거래를 두 번이나 감행했던 것이다. 큼지막한 ‘니꾸사꾸’(배낭)에다 쌀 2말, 작은 가방에 5되, 합 2말 5되의 쌀을 담았다. ‘니꾸사꾸’의 원 발음은 ‘릭쿠삭쿠’(リツクサク)인데 ‘Rucksack’ ‘륙색’에서 온 것이다.

쌀이 담긴 ‘니꾸사꾸’를 짊어지고 기차편으로 오사카까지 간 것이다. 그 당시 기차표는 4정거장까지만 끊어주기 때문에 나머지는 기차 승무원의 조사를 피해 무임승차 할 수 밖에 없었다. 쌀은 의자 밑에 숨겨 놓았다. 검표원이 오면 몸은 변소 칸에 몸을 피해 있었다. 내릴 때도 개찰구를 통해서 나가지 못하고 역무원의 눈치를 살피다 몰래 도망쳐야 했다.

일본에서 성공한 조선인 부잣집 도련님 대접을 받으면서 성장해왔던 박상우에게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다. 세 번째 쌀 암거래를 하러 오사카에 가니 거리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알아보니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는 소식이었다. 폭격 당해 타버린 집들과 죽은듯이 고요한 거리에는 미군들의 지에무시(GMC-General Motors Truck Company, 미국 제너럴 모터스) 트럭이 먼지를 내면서 질주하고 있었다.
 
해방 후 강진사람들이 보통〈제무시〉라고 불렀던 미군군용 트럭이었다. 일본인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선사람들은 해방이 되었다고 기뻐 뛰면서 만세부르고 다녔다. 일본인들은 인간생존의 기본권마져 잃어버리고, 패전국민으로서 단말마적인 고통 속에 기가 죽어 있었다. 박상우는 기운을 차려 시네마현으로 돌아와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귀국선, 애국가 합창하며 귀환
 
해방의 기쁜 소식을 안고 귀국을 하려고 선편을 알아 보았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귀환선을 운행하는 항구는 시모노세끼와 하까다, 센자끼등  3곳 이었다. 박상우는 가까운 센자끼에서 배를 타려고 가보았다. 알아보니 귀환자가 많아 순번이 돌아올려면 3, 4일 걸린다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항구 광장에 가재도구를 쌓아놓고 거기서 숙식을 했다.

박상우는 지인을 통해 그날 밤에 출발하는 귀환선을 탈 수가 있었다. 고국을 향한 귀국선은 긴 뱃고동을 울리면서 해방된 고향 땅으로 출항했다. 그 때 누군가가 “쪽바리들아 잘 있거라”라고 외쳤다. 참으로 한 맺힌 설움이 폭발한 것이었다.

누가 선창했는지《애국가(愛國歌)》를 힘차게 합창으로 불렀다. 눈물을 흘리면서 몇 번이고 목이 쉬도록 애국가를 불렀다. 밤 바람이 추워서 갑판 위 증기기관 뚜겅 위에 앉아서 밤을 새웠다. 검푸른 현해탄 을 내려다 보다가 새벽녁이 되어 부산에 도착했다. 박상우는 8시간의 항해로 파란만장했던 일본생활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왔다. 이 때가 1945년 11월 3일이었다. 당시 박상우의 나이 18세였다.

부산에 도착한 박상우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폭격과 공습이 반복되는 가운데 잿더미에 앉아있던 일본의 모습과는 달랐다. 거리에서 해방된 기쁨으로, 희열)이 가득찬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인파를 만났던 것이다. 시가지의 상점에는 과일, 과자, 생필품 등 물자가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다. 하루 전 박상우는 일본에서 폭격과 공습이 빗발치는 전화의 공포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오늘 해방된 조국에 와서 정반대 현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부산에는 일본에서 오는 귀환동포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이들을 귀향시키는 수송문제가 큰일이었다. 부산역 광장은 평안도, 함경도, 전라도별로 깃발을 세우고 기차승차를 기다리는 귀환동포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들은 며칠동안을 노숙하면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상우는 부산 상업학교 친구들의 도움으로 당일 기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삼랑진에서 다시 목포행 기차를 갈아탔다. 승차 대기 중에 강진출신 김영호와 강진작천 출신 소년항공병을 만나 같이 영산포역에서 내렸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안내로 트럭에 타고 강진중앙초등학교 앞에서 내렸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학산리 고향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박상우가 한국에 돌아와 살펴보고 우리나라 현실과 가정형편이 너무나 안타깝고 실망스러웠다. 귀국 후 살 집은 초가삼간 흙담집이고 방이 2개 밖에 없었다. 최빈곤층 인생들이 사는 오막살이에서 살았다. 소작논 몇마지기로 근근히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선친 박태순은 다시 밀항하였다. 거래처에서 조금씩 남은 한약대금을 수금하고 오다가 마산에서 해적을 만나 모두 빼앗겨 버렸다. 비운의 연속이었다.

박태순이 실의에 빠져있을 때 완도 고금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과거 일본에서의 명성을 듣고 그곳 유지들이 배를 가지고 아버지를 모시러 왔던 것이다. 고금도의 가교리란 곳은 해산물이 풍부하고 비교적 잘 사는 고장이었다. 선친 박태순은 거기서 돈도 벌고 친구도 사귀어 오랜만에 마음 편히 소일하고 있었다. 당시 해태채취용으로 대나무가 필수품이나, 품귀하고 값도 잘 나갔다.
 
박태순은 그 곳 어업조합 이사를 맡아 활동했으며 거기서 융자를 받아 대나무 장사를 하여 많은 이익을 봤다. 집 앞의 논두락을 장만하였다. 그것으로 겨우 식생활을 해결해 갈 수 있었다. 박태순은 강진읍 남성리 중심가에 점포를 얻어 한약방을 차렸다. 선친은 강진읍에서 천직인 한약방을 운영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박태순은 한약업으로 일본에서 큰 성공을 해서 형제와 일가들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식민지 백성으로 오사카에 살면서 가난과 무지에 시달리던 조선동포들의 교육과 후생복리를 위해 자신의 재물을 내어 봉사했다. 박상우는 아버지 박태순이 활수(滑手)한 기질로 이웃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살았다.
 
박상우는 일본제국주의 강점하에서 약업인으로 사업가로 살아왔던 선친 박태순에 대한 기억을 비망록(備忘錄) 형식으로 기록에 남겼다. 앞으로도 강진일보 지면을 통해 박상우 옹(92세)의 강진의 역사와 더불어 살면서 초등학교 교사생활 20년, 지업사(紙業社) 사업 46년, 그 어간에 평생을 책과 벗삼아 살아온 그의 인생 드라마가 몇 회에 걸쳐 소개될 것이다.(계속)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