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쓸어 버리자” 주변 주장에 “그 사람들이 뭘 알고 그랬겠나”

1963년 7월22일 경찰서앞에서 강진의용소방대원들이 찍은 사진이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해방 직후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활동한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역사에 기록된 분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다. 이번 ‘강진인간극장사’에 소개하는 김영현이란 인물은 우리 강진사람들이 꼭 한번은 되새겨서 그 기억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하는 사람이다.

강진 초대기동대장이었던 김영현(金榮炫, 1906-1964)선생은 강진이 낳은 고매한 인격과 사랑,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을 갖춘 인물이었다. 김영현은 1906년 이방(吏方)을 지낸 김대규(金大奎)의 집안에서 출생했다.

교우관계로는 아남산업 회장 김향수의 장인 오승남과 강진읍장을 지낸 조재희(趙才熙) 등과 막역한 사이였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오사카(大阪)에 건너 가서 중ㆍ고등교육과정을 수료했다. 이어서 각고의 노력 끝에 일본에서 피혁공장(皮革工場)을 창설하여 제화(製靴) 등 가죽제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상당한 부를 쌓았을 때, 귀국하여 부친김영현은 1945년이 되면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한 결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웠다는 예감을 했다. 그는 우리 가족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조국에 나가서 해방을 맞아야겠다고 결단한다. 그는 공장을 급히 정리해서 현금화한 후 돈가방만 들고 가족과 함께 1945년 초에 귀국했다.

일본에서 사업, 해방직전 귀국

1962년 5월 16일 강진 의용소방대원들이 지금의 우체국 옆 의용소방대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해방 직후 각 지방에서 조직되었던 건준의 지방조직은 대부분이 지방의 명망가 또는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식민지상태에서 해방의 상황이 급격히 들이 닥쳤기 때문에 기층 농민과 대중들이 조직화되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강진의 건준지부는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 조직되었다.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항복방송으로 일본제국의 패망 사실을 안 후 하루가 지났다. 일본의 패망에 궁금증을 가진 주민들이 강진읍사무소를 중심으로 모여 들었다.

영랑 김윤식을 중심으로 한 40대와 차래진을 중심으로 한 50대 전후의 사람들이 읍사무소 회의실에 모인 것이다. 이들은 유지급으로서 차래진, 김안식, 김 광, 김윤식, 차부진, 손치수, 김상균, 오경추, 배영석, 오용추, 차형환, 양경천, 김현장, 차경모, 김을조, 차성모, 홍계후, 김명서, 윤영식, 유재의, 조권한, 조재희, 김영현, 이창교 등이었다.

여기서 김영현 선생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은 총독부의 행정이 마비된 상태에서 이를 대행할 조직기구와, 철수하는 일본인의 신상을 보장하는 문제, 상실된 민족성을 고양시키기 위한 조직기구의 마련에 대한 논의를 했던 것이다. 이 비상한 시기에 김영현은 조국의 해방과 치안유지, 건국을 위한 열정을 갖고 국권회복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60년대 초반 의용소방대 시범소방 훈련을 하는 장면이다. 좌측으로 지금의 도서관 앞 팽나무가 조금 보인다. 당시에는 의용소방대에 대한 정부지원은 한푼도 없어 모두 자발적인 모금으로 운영됐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우국지사 김영현은 일본에 체류할 당시 오사카(大阪)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상당한 부(富)를 축적하고 있었다. 김영현의 가슴에는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처지에 대한 울분과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되야겠다는 우국충정이 남달랐다.

그러던 중 독립자금을 지원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일제시대에는 극비(極秘)에 붙여진 상황이었고, 해방 후 당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해방직후 필자의 선배 김철주의 선친으로 일본에서 수학한 후 강진부읍장을 지낸 김정현을 비롯한 김영현의 일본친척과 집안 어른들의 입에서 회자(膾炙)되었던 것이다.

친구의 선친 김영현이나 가족들도 무슨 좋은 일을 해놓고도 남에게 생색을 내는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강진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는 바이다. 강진에 조선의 부자 김충식을 비롯한 수많은 부자들이 있었지만, 아직 독립자금을 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혹여 있었드라도 당시 일제의 탄압정치 속에서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광복 74돌을 맞아 고인의 애국적 선행을 몇 줄의 글로 치하드리는 바이다.

기동대장등 다양한 명예직 활동

김영현은 해방이후 6. 25를 전후해서 돈이 안생기는 많은 명예직을 맡아서 헌신했다. 필자가 듣는 바로도 해방직후 강진귀환동포(歸還同胞)위원장, 기동대장(機動隊長), 도교육위원회 상임의장, 의용소방대장 등을 지냈다. 6. 25 남침이 일어난지 한 달이 훨씬 지난 1950년 8월 1일 인민군은 영암 풀칠재(풀치, 불티재)를 넘어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강진에 무혈입성(無血入城)했다.

이 때 인민군은 정치보위부 직원들이 치안을 접수한 후 군청에다 강진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군청업무를 접수하게 했다. 당시 강진기동대장 김영현은 대원을 지휘하여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기동대가 경찰부대와 함께 활동을 했는지 특수한 임무를 따로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기동대는 주로 전투업무를 띤 민간조직으로 경찰역할을 대행했던 부대라고 본다.

김영현은 엽사(獵師)로서 사격실력까지 갖춘데다, 그의 인격적인 지도력으로 대단한 활약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강진 일대가 수복된 것은 아군이 총반격작전을 전개하고도 상당시일이 지난 1950년 10월 5일이었다. 오전에 이봉하 경감이 경찰 1개 중대 규모를 이끌고 수복을 시작했다. 이들은 강진 해창에 상륙하여 성전면 소재지까지 진격했다.(강진군지 참조) 이 무렵 기동대도 남포에 상륙했다.

이 때 대원 중에서 남포는 좌익이 많은 곳이니 “이곳을 쓸어버립시다”라고 진언을 했으나 기동대장 김영현은 단호히 물리쳤다. “그 사람들이 설혹 좌익을 했다고 하더라도 사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했겠냐” “무고한 사람이 피해볼 수도 있으니 그냥 가자”고 설득해서 남포 주민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실은 남포는 포구로서 뱃사람다운 성품이 강하고 일제시대에는 3. 1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일으킨 마을이다. 물론 소수의 좌익성향의 인사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김영현은 인도주의 입장에서 강진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남포주민들의 생명을 보호했던 것이다.

기동대장이라고 해서 이런 결단을 자의적으로 내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김영현은 원래 품성이 인정많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린 남포주민들이 해마다 명절이면 감사의 표시로 집에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갖던 것을 친구 김귀남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마다 친구의 선친 김영현은 다음에는 오시지 말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는 것이다.

고상한 취미와 격조높은 생활 멋 즐겨

해방후 김영현은 일본집을 불하받아서 안방을 다다미에서 온돌방으로 개조했다. 필자는 초등학교 4-5학년 무렵에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잔적이 있다. 그저 평범한 농촌가옥에서 지내온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현관을 들어서면 다다미방이 있었다.

이 방이 필자의 친구의 장형이자 초등학교 6년 선배인 당시 광주고에 재학 중인 김성남(金成男, 사업가)의 공부방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용으로 “새벗”이란 월간지가 나왔고, 중고등학생용이 보는 학원(學園)이란 잡지가 나왔는데 김성남 선배는 학원을 정기구독하고 있었고 서가에는 수년간 모은 학원이 잘 정리되어 꽂혀 있었다.

강진에는 천석꾼 지주가 열손가락을 꼽을 정도요 수백석꾼은 그 이상으로 많았다. 군읍단위치고 강진만큼 부자들의 경제력이 융성한 곳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 이면(裏面)에는 농경시대에 지주소작제도 모순 속에서 소작인들에게서 과도하게 소작료를 수탈당했던 민중들의 아픔도 분명히 잊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김영현은 일본에서 가져온 재산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하면서도 선진적인 레져(여가, leisure)를 즐기면서 고상한 취미와 격조높은 생활상의 멋을 강진사람들에게 묵묵히 보여주었다.<계속>
  /출향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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