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로 귀향가던 우암 송시열 선생 백련사서 강론

120년 지나 강진유림의 후손들이 남강사 짓고 학문기려
주자 가르침 담은 현판 남포에 표착
주자와 우암 두분 함께 모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초상. 우암 선생은 83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1689년 2월 23일 저녁 무렵 83세의 한 노인이 강진에 도착했다. 노인은 조선후기 근대사를 대표하는 최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였다. 그는 배를 타기 위해 강진읍 남포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의 목적지는 제주였다. 왕세자 책봉문제로 숙종임금의 진노를 사 제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귀향을 떠나는 길이였다. 위리안치란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큰 바람이 불었다. 배가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 우암의 아우 송시걸이 현감의 말을 전했다. 선박을 구해 수리할 동안 물맛이 좋은 만덕사로 옮겨 머무르는 것이 좋겠다는 전갈이였다. 그래서 우암은 백련사로 향한다. 그곳에 며칠 머무르면서 바람이 자면 남포로 돌아와 제주행을 시작할 요량이였다.
우암은 백련사로 가면서 '이제까지 바다와 산이 쓸쓸하여 봄빛이 보이지 않더니 절 아래에 이르니 상록수가 우거지고 춘백이 만개하여 장춘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봄기운이 감돌고 있다'고 기록을 남겼다.

대학자가 백련사에 머문다는 말은 삽시간에 퍼졌다. 강진과 인근 지방의 학자들이 우암을 알현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우암은 만덕사에서 29일까지 머무르면서 문생들과 '태극도설' ' 중용' '수장' '대학의 격물'등 여러 가지 주제를 강론했다. 또 제주도를 유람한 노승을 불러 제주의 풍토와 경치를 자세하게 물어보고 만덕산의 주산인 금산에 오르면 제주도를 볼 수 있느냐고 물어본 기록도 전해오고 있다.

우암은 3월 1일 백련사를 나서 남포에서 제주행 배를 탄다. 우암 선생은 제주도까지 갔다가 얼마 후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고 올라가다가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고 만다.  

강진의 사림은 그를 잊지 않았다.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후 120여년이 지난 1803년에 사우(社友)를 지어 봉향하기로 결의하였다. 원래 정읍의 고암서원에 봉안된 우암의 영정을 백련사에 옮겨 모시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강진 읍내에 별도의 사우를 건립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송시열 선생 사후 120년 후이니 당시 선생으로부터 강론을 듣던 강진의 유림들도 모두 세상을 떴을 시기다. 그들의 후손들이 송시열선생을 잊지 않고 사우를 지은 것이다.

강진읍 교촌리 강진향교 옆에 있는 남강사. 우암 송시열 선생과 주자님을 함께 모시는 사우다.
강진의 유림은 조정에 주청하여 마침내 이듬해 강진읍 교촌리에 남강사(南江祠)를 낙성하였다. 얼마 후 우암선생이 제주도로 출발할 때 승선하였던 곳에 주자의 가르침을 담은 갈필(葛筆: 먹물의 사용을 억제하여 마른 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수묵화의 기법) 20판이 해류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이 해는 우암이 체류한 지 두 갑자(甲子)가 되는 기사년(1908)이어서 우암이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은 확증이라고 여겨 주자를 정향위(正享位)로 모시고 우암을 배향위(配享位)로 하여 남강사(南康祠)로 개칭했다고 한다. 남강은 주자가 다스리던 중국의 지명이다. 남강사는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1년 다시 복설되었다. 남강사는 주자와 우암의 유림정신을 이어받은 곳이자 강진 사림들의 보은정신이 전해오는 곳이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