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부터 ‘참 지앙스런 사람’오토바이 엔진으로도 비행기 제작

조경연 선생
1951년의 대한민국은 6. 25전쟁 중이었다. 남과 북의 군대는 치열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였던 전시였다. 여기에는 미국을 비롯한 참전 UN군 16개국과 중국군이 개입한 국제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는 세계적인 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最貧國)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대한민국 해군이 비행기를 만들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국방 예산이 부족하여 전 장병의 모금으로 미국 중고 군함조차 겨우 도입한 초창기 한국 해군이 비행기를 만들었다면 누가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강진이 낳은 항공대장 조경연(趙敬衍, 1918~1991년)에 의해서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다.

미항공기 AT-6를 개조하여 비행선을 만들다
 

조경언 선생이 1954년 제작해 직접 시험비행한 SX-1 서해호의 모습이다. 그는 이 사진에 시험비행 날짜와 이름을 직접 세겨 넣었다.
해군 항공전단이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51년 8월 해군 최초의 항공기『해취호』(海鷲號)를 인수 하면서였다. 외국에서 항공기를 통째로 수입한 육군 및 공군과는 달리 당시 해군 중위 조경연 지휘 속에 해군은 자체적으로 항공기를 개조/운용하겠다는 꿈을 가졌고 또한 실현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하늘의 제왕 공군보다 3년 앞서 항공기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군 최초의 항공기, 혹은 대한민국 최초의 자체 개조 항공기가 등장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렇다면 조경연은 과연 어떻게 고도의 항공기 제작기술이 요구되는 비행선을 직접 제작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필자는 조경연 중령에 관한 자료를 모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비행기 만드는 사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항공기 개발에 열정을 보여 온 故 조경연 중령은 단 하나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항공기 개발이라는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10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목재 모형 비행기 제작을 시도했었다는 것이다. 이후 해군 장교로 임관한 그는 목포 군항에 머물다 비행기 한 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불시착하여 방치된 채 고철로 녹슬어가는 미 공군 AT-6가 그것이었다. 그의 가슴은 기쁨과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드디어 평생의 소원이던 항공기 제작을 해낼 수 있는 재료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조경연은 AT-6를 정비 및 개조하여 해군의 수상 항공기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경연은 즉각 해군본부에 건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추락한 항공기라고는 하나, 자국의 항공기가 타국의 전력기로 사용되는 것을 미군 당국이 달가와 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원소유주인 미국은 쉽게 항공기를 내어주지 않으려 했다.

해군은 미 군정 당국과 교섭하여 미군의 비행 사고로 목포항에 폐기처분 예정이었던 미 공군 AT-6형 항공기를 길고 긴 교섭 끝에 ‘오직 교육 자료용 항공기로 사용한다’란 조건으로 드디어 항공기를 인도받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후 해군은 1951년 4월 해군 항공반을 조직하고 진해로 이송된 미 공군 AT-6를 수리 및 개조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해군은 추락하여 비행이 불가능한 고철 AT-6 항공기와 한국전쟁당시 깊은 산골에 추락하여 수거된 미군 항공기 잔해들을 수거해서 요긴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4개월의 작업을 통해 AT-6는 초대 항공대장 故 조경연 중령과 이하 기술 문관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항공기로서, 태극무늬를 선명히 도장한 채 조국의 바다를 누비기엔 전혀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조경연 선생이 해군 중위때 개발한 단발기 ‘SX-2’는 일본 항공 잡지만 보고 영감을 얻어 설계했을 정도로 그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이 비행기는 만족할 성능을 보이지 못해 시험비행단계에서 폐기처분됐다.<사진= 인터넷 자료 인용>
게다가 미 공군 전폭기 조종사의 시험평가에서 ‘성능이 훌륭하다’란 평을 받았을 정도로, 당시 대한민국 해군의 항공 정비 기술은 훌륭했던 것이다. 드디어 역사적인 날 ‘8월 15일’ 시민들의 우레같은 함성 속에 시험비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손원일 제독의 승인을 받은 조경연 중위는 4개월의 수리·개조 기간을 거쳐 육상 비행기를 수상 비행기로 개조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같이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는 1951년 대한민국 해군 압록강함(FF-62) 전기관으로 근무하던 조경연 중위로부터 탄생했던 것이다.

1951년 8월 15일, 해군 최초의 수상 정찰기이자 대한민국 1호 항공기 ‘해취호(海鷲號 : 바다의 독수리)’가 탄생했다. 해취호는 한국 함대에 예속된 최초이자 유일한 항공기로서, 취역 이후 해상 정찰, 업무연락, 인원 이송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해취호』(海鷲號)는 조경연의 치열한 탐구력의 결실이었다

조경연이 해군에 입대하기 전에 이미 항공기의 추진력 실험에 대한 부단한 시도가 있었다.
조경연의 청년시절을 기억하는 주민이 비행실험을 본 기억을 이렇게 증언했다.
- 조경연이 젊은 시절 오토바이 엔진을 이용해서 비행시험을 했다는데 과연 얼마나 떴는가요? 
 △ 전봇대 높이만큼이나 떴제.
- 그 때 그 양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 그 양반이 나보다 한 두 살쯤 더 묵었제(들었제)……. 그니깐 내가 한 열두 살 때쯤이었을까…….    그 양반은 한 열네 살 정도 되었다고 봐…….
- 그 분하고 친하게 지내셨나요.
△ 아, 친했제….
- 어렸을 때는 어땠나요.
△지앙스런(신비스런) 일을 잘했제……. 배를 맨드러(만들어) 가지고 저절로 가게끔 하고, 종이 비행기며, 래디오(라디오)도 만들고……. 나중에는(나이 들어서는) 정미소를 했제. 낚시도 좋아하고, 자동차로 특허(차동장치)도 받고, 그것만 알제…. 우리 나이에는 그 양반이 어떻게 군대에 가고….(그런건 잘 몰라)
- 활주로를 만든다고 울력도 했다면서요.
△ 울력했제….
 
한 주민의 이야기로는 볏짚 가마니를 깔어 비행기가 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조경연 중령의 낡은 생가에는 며느리인 오순화씨의 명패가 달려 있고 곳간에 모아놓은 집안의 유물들로는 조 중령과 관계된 사진이며 일상도구들이 모아져 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조 중령은 성전면 생가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동체에 오토바이 엔진과 직접 만든 날개 등 부품을 부착한 목재 모형 비행기를 제작해, 영풍리 앞 들판 멍석을 깐 논바닥 활주로를 달린 것이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항공과학자요 초대 항공대장인 조경연(趙敬衍) 정신을 선양해야

포항에 있는 해군 6항공전단에서는 초대 항공대장 故 조경연(趙敬衍·1918~1991년) 중령 기념관을 건립했다. 한국 해군항공의 선각자로 일컬어지는 해군 초대 항공대장 고 조경연 중령의 업적이 재조명된 것이다.
 
해군 6항공전단은 국내 최초의 수상항공기 해취호(海鷲號)를 제작하는 등 도전 정신과 개척자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조 중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 그의 업적을 증명하는 각종 유품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은성 무공훈장과 금성·충무 무공훈장 등 네 차례 훈장을 수훈한 그는 58년 4월 초대 항공대장으로 취임했으나 이후 항공기 제작과 관련해 끊임없이 제기된 미국 군사고문단의 압력으로 63년 3월 함대 항공대가 해체되면서 해군중령으로 전역하였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탐구심으로 일생동안 30여건의 특허(特許)를 출원하였다. 물욕을 경계(警戒)하고 청렴한 삶을 살았던 그는 승진이나 어떤 불의한 제의를 단호히 거절한 채 해군 항공 발전에 헌신하였다. 항공대의 해체결정을 접하고 1962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강진으로 낙향하여 발명(發明), 서화(書畵), 수렵(狩獵) 등을 낙으로 삼고 살았으며 1995년 해군에 의해 해군 항공 공로자로 선정되었다. 조경연(趙敬衍, 1918~1991년)은   성전면 생가에서 지병으로 7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해양강국, 과학강국을 바라보는 시대에 선각자로 위대한 과학정신과 창조정신으로 항공기 제작에 진력한 그의 생애는 자라나는 우리 고향 강진의 긍지요, 자라나는 후학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향후 강진군에서나 교육청, 문화원 등의 기관과 군민들이 강진이 낳은 항공과학자 조경연의 삶과 정신을 선양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언하는 바이다.    /출향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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