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말 모란다방에서 팝송 감상실이 문을 열다

반세기 전에 서울에 쎄시봉이 있었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초까지 명성을 날렸던 쎄시봉 멤버들이다. 좌측부터 이상벽, 김세환, 윤형주, 송창식.<인터넷 캡쳐>
쎄시봉이란 1960년대 서울 무교동에 있었던 최초의 음악감상실을 가리킨다. 당시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들어온 재즈와 팝송이 이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음악감상실이라는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당시 시대상은 이러했다. 1960년대 중반, 대학생들은 박정희 군부정권의 한일굴욕적 외교에 대해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1964년 6월 3일에 일어난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관련된 일련의 항쟁을 한일회담 반대운동, 6·3시위라고 한다.

분노한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한일회담 반대”를 외쳤다. 서울대와 고대 학생들은 “한일협정은 망국행위다. 현 정권은 하야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시위에 나섰다. 경찰과 유혈 충돌을 빚었다. 결국 계엄이 선포되었고 옥내외 집회와 시위의 금지,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모든 학교의 휴교, 통금 연장 등이었다.

쎄시봉이란 1960년대 서울 무교동에 있었던 최초의 음악감상실이다. 대학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팜 음악을 들으며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던 곳이었다. 당시 정치적 불안으로 휴강이 잦던 대학생들에게는 문화적 해방구였다. 1966년부터 ‘대학생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금요일마다 라이브 공연을 했다.

1970년대 초반 강진읍 중심가였던 버스터미널 주변 상가의 모습이다. 좌측에 영다방의 모습이 보인다.<강진일보 자료사진>
또한 많은 젊은 음악인들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기도 했다. 이 곳과 관련된 인물로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등이 있다. 2010년 9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쎄시봉에서 노래를 불렀던 이들이 뜻밖에 나와서 1960년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나왔던 불후의 팝명곡을 통키타를 치면서 불렀다.

복고풍 팝뮤직이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에게는 반세기 전 20대로 돌아간 추억의 ‘쎄시봉’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요즘 20대에서 70-80대 실버들에게도 폭넓은 공감을 얻어 유투브에서도 보면 그 감동이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쎄시봉은 프랑스어로 ‘멋지다, 아주 좋다’라는 뜻이며, 샹송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강진에도 쎄시봉이 있었다.

1960년대 말 강진 모란다방에서 팝송 감상실이 열렸다. 모란다방을 5일 동안 빌려서 ‘팝송음악감상실’을 열었던 것이다. 강진농고 시절 브라스밴드의 트럼펫 연주자였던 박춘일(朴春日, 광주예향)이 베트남전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다가 스테레오 전축을 갖고 귀국한 것이 발단(發端)이었다.
 
박춘일이 가져온 전축은 일제 ‘아까이’였다. 60대년말 70년대초반의 전자제품 기술은 겨우 금성라디오가 출시되었고, 전축은 외제 부품을 조립해서 모노를 만들어서 쓰는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아까이, 상수이, 네셔날, 히마치 등이 알아주는 외제 전축이었다.

스테레오(stereo)란 음향재생을 두 계통의 회로로 좌우를 분리하여 입체감있는 음향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전문성있게 말하면 입체음향인 레코드 연주나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입체 음향 재생 증폭 장치를 말하는 것이다. 원래 ‘스테레오포닉 사운드’(stereophonic sound)의 약자(略字)이다.
 
스테레오 전축은 한편 스피커에서 섹소폰 소리가 나면 다른 한편 스피커에서는 드럼이 쿵착 쿵착 울렸다. 모노(한꺼번에 나오는 소리) 전축만 듣다가 스테레오를 들으니 천지가 개벽한 느낌이었다.

강진 쎄시봉(가칭, 서울쎄시봉에 빗댄 명칭)은 곧장 박춘일의 스테레오 ‘아까이 시스템’을 활용해서 ‘팝 음악감상회’를 열기로 담합(談合)을 했다. ‘강진쎄시봉’은 강진읍민들의 열렬한 성원으로 절찬리에 5일정도 열렸다.

당시 강진극장주인 서정완, 김유홍, 이철수, 김성수, 한고식 등을 비롯한 강진의 유지들, 사업가, 공무원, 체육인, 음악애호가들, 건달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성황을 이뤘다. 강진 사람들은 스테레오 음악에 놀랐고 더 원음에 가까운 음악을 감상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1960년 중반부터 70년대 말에는 강진에도 다방가에 가면 폴 앵커, 루이 암스트롱, 에니멀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y). 안 마가렛, 프랑크시나트라, 클립 리챠드, 톰 죤스와 같은 팝송 가수들의 노래가 흔히 들려왔다. 성탄절 무렵 첫눈이 오는 밤이면 강진의 소리사에서 팻분이 부르는 감미롭고도 성스러운 ‘크리스마스’ 케롤이 울려퍼져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한국가곡도 가끔씩 나왔다.
 
‘가고파’‘그리운 금강산’ ‘그 집앞’ ‘동심초’ ‘보리밭’ ‘봄처녀’ ‘봄이 오면’ 대중적인 외국가곡도 흘러나왔다. ‘산타루치아’ ‘아 목동아’ ‘오 쏠레미오’ ‘다뉴브강의 잔물결’ ‘라팔로마’등의 나왔다. 가벼운 클래식도 나왔다. ‘G선상의 아리아’ ‘백조의 호수’와 같은 노래였다고 기억한다. 

노래를 듣고 싶으면 다방 레지나 마담에게 곡명을 불러주면 주방에서 LP판 레코드를 틀어주던 그런 시절이었다. 강진사람들의 음악수준은 보통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다산(茶山, 마재등)다방, 대호(大湖, 차명진)다방, 호정(湖亭, 윤형순)다방, 모란다방(한고식), 궁전(宮殿)다방, 청자(靑磁, 김채성)다방이 있었다. 내가 강진을 떠난 뒤에 가보니 일년 선배 서정창이 영다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다방은 만남의 장소요 문화의 전당이었다. 왜냐면 시화전(詩畵展)이 당시에는 다방에서 주로 열렸다. 한국의 피카소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양수아 선생의 유화 개인전도 강진 모란다방에서 열린 것을 기억한다. 참 그 때 강진에서 그림을 사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돈이 있었다면 작품을 구입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쉽다. 당시 제일 강진 어르신인 효암 차부진, 서예가 소죽 김현장, 화가 김영렬, 前 성요셉여고 국어교사 임상호(신협 이사장) 등의 향토 예술인들도 자주 출입하였다.

당시의 다방은 드나드는 손님들의 품격에 따라 문화적이었고, 강진의 사교장이요 휴게실이었다. 아침에는 계란 노른자위를 넣은 ‘모닝커피’가 나왔다. 오전 10시까지만 주는 다방의 특별 서비스였다.

1989년 국제회의 참석차 일본 오사카에 갔는데 한국인이 모여사는 이꾸노꾸 지역의 다방에 갔더니 아침에 커피를 시키니 계란 후라이가 곁들여 나왔다. 노동자들은 아침 식사 대신 커피 한잔에 계란 후라이를 먹고서 출근을 한다고 했다. 당시의 다방은 음악감상실을 겸하고 있었다.

요즈음은 커피 숍에서 음악을 청해서 듣는 일이 드물다. 요즈음은 모두들 스마트폰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노래를 선곡(選曲)해서 듣는다. 요즈음은 농촌어르신들도 모두 휴대폰 유투브 앱을 깔아놓고서 자신의 기호대로 노래를 듣는 시대가 되었다.

당시 다방에서 고상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진의 협객(俠客), 건달(乾達)도 들낙거렸다. 건달이란 말은 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사람은 지은 업(業)에 따라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되는데, 죽어서 환생하기 전까지 불안정하고 허공에 뜬 존재를 중유(中有)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중유를 건달이라고도 한다.
 
아무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며 놀거나, 가진 밑천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된 사람”을 건달이라고 한다. 내 9년 선배인 창덕여관 아들 김성배(예비군중대장)는 건달에 대해 “아침에 빈 주머니 차고 나와서 점심, 저녁을 잘 얻어먹고, 술까지 거나하게 들이 마시고 집에 들어갈 때는 500원 짜리(요즈음 5만원수준) 한 장을 마누라에게 건내주는 사람이 진짜건달”이라고 정의(定義)를 내린 것을 기억한다.(독자들이여 필자의 기억력이 놀랍지 않으신가?)

다방에서 커피, 밀크, 쌍화차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위티(국산 도라지 위스키?), 깡티를 팔았는데, 다방에서 곤죠(일본어, 행패)를 부리려면 여나므 잔의 깡티를 시켜놓고 객기(客氣)를 부리는 친구도 더러는 있었다. 한 술 더 떠서 자신을 과시하려고 깡티 유리잔을 입으로 깨물어 질근질근 하는 친구도 가끔씩 있었다.

한 번은 강진 출신 헌병으로 휴가온 선배가 모란다방 앞에서 권총을 공중에다 쏘아대어 모란다방을 운영하던 한고식이 검도 유단자(有段者)로서 집에 소장하고 있던 목검(木劒)을 가지고 나와서 대결을 벌였던 사건도 있었다. 강진이란 사회는 돈이나 말이나, 학식이나, 예술이나, 잡기에나, 스포츠에나, 주먹까지도 만만찮은 사회였다.   

당시 강진에는 팝송 마니어들이 있었다. 서영창(徐永昌, 조제약국)은 기타를 잘 연주했고, 문화원장 이형희의 장남인 이 열(李 悅)아동복디자이너 겸 업체운영)은 클라리넷을 잘 불렀다. 이들은 이미 기타, 트렘펫, 클라리넷 연주(演奏)에 아마츄어 이상의 실력자들이었다.

강진사람들은 조제약국에 앉아서 항상 기타를 치고 있는 서영창의 모습을 흔히 보았을 것이다. 한성수(韓盛守, 은성철강)는 기타와 코넽을 잘 연주했고, 노래는 가요, 명곡 뿐 아니라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잘했다.

지금도 휴대폰 컬러링에 “Green green grass of home(고향의 푸른잔디)”을 넣고 다닐 정도로 팝송 마니아이다. 박춘일은 트럼펫을 가지고 이 열은 클라리넷을 갖고 북산(보은산)에 올라가서 읍내까지 들리도록 악기 연습을 했다. /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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