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수/재경강진군향우회 사무총장

2019년 올해는 기미 독립 만세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영향과 1919년 1월에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그해 2월 8일 동경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의 덕수궁 함녕전 독살의혹에 따른 승하가 본격적인 촉발의 계기가 아닌가 싶다.

시위 참가자는 종교계 대표를 중심으로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 인사 등 33인이 중심이 되어 서울에서 시작되었으며 평양, 대구, 원산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나 읍·면단위 농촌 지역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전국적으로 218개 시군에서 200만명 이상이 참여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며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시대의 상황에서 서남부 지역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있던 우리 강진도 예외일 수가 없어 일본 유학생 출신인 김영랑, 김안식 배재학당 출신인 오승남, 김학수 강진읍교회 기독청년회 이기성, 황호경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특히 당시 배재학당 학생이었던 오승남은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세시위에서 받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교복 가슴에 품고 호남선 열차를 타고 영산포를 경유 3월 31일 도착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919년 4월 4일 강진 장날 강진읍교회 정오 종소리에 맞춰 1,0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하자 이를 진압하고자 장흥과 해남의 수비대,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한 진압을 하고 주동자 전원을 체포하여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이러한 강진의 4.4 독립만세를 기념하고자 1976년 5월 9일 강진읍 서성리 낙화정에 동아일보와 강진유지들의 힘을 모아 기념비가 제막되고 1992년 8월 15일에 남포리 주민들의 뜻을 모아 강진 26인 의사 중 강주형, 차명진, 박학조, 박명옥 남포출신 들의 기념비가 제막되어 현충 시설로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1916년 부임 직후 강진을 방문할 당시 서울에서 한정식 요리사를 대동하여 현재까지 강진한정식의 토대가 되게 하였다는 하세가와요시미치 2대 총독이 3.1운동 강제진압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이후 문화정책으로 통치 방식을 전환하였다.

전라남도의 군 단위 최초이자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이 100년전 우리 강진에서 일어난 점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암울한 당시에도 깨어있는 강진사람들의 당연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니 내고향 강진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현재에 살아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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