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태초에 강진과 제주에 길이 있었다

마량과 제주시간 쾌속선 운항이 조만간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길은 새로운 뱃길은 아니다. 삼국시대, 아니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뱃길이 불과 100여년전 끊겼다가 이번에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강진과 제주는 역사적으로 거부하지 못할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 강진과 제주의 뱃길 역사를 3차례에 걸쳐 조명한다./ 편집자 주.

1985년 10월 4일부터 제주신문사 '고대제주항로탐사단'이 제주 화북항에서 출발해 마량까지 뱃길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사진은 탐사뗏목인 '물마루호'가 노를 저으며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이다.
‘강진을 탐진이라 했으니 그 이유는 탐라 사람들이 배를 처음 대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부터 공식 교류... 탐라 방문단 강진을 통해 육지 왕래
                                
고려 고종 10년(1223) 제주라는 새로운 이름 획득
최상품 강진청자 개경으로 활발히 실어나르던 시기

강진과 제주는 원시시대부터 한가족
끈끈한 DNA가 있다.

강진의 옛 이름은 탐진(耽津)이었다. 강진군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보면 강진은 신라 35대왕인 경덕왕 16년(757) 탐진이란 지명을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고려시대 940년(태조 23)들어 도강군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다시 조선시대들어 태종 13년(1413년)에 강진이란 현 지명을 얻었다. 

제주가 탐라로 불리웠던 이유는 각종 문헌속에 수 없이 소개돼 있다. 제주사람들이 육지에 올 때 탐진을 통해 건너왔는데 임금이 그들을 반기고 그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탐라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 고후(高厚)등 형제 3인이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다. … 읍호를 탐라(耽羅)라 하니 이것은 올 때 처음 탐진에 배를 대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선 기록으로 삼국사기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문주왕 2년(476)에 탐라에서 백제에 조공을 바쳤으며 이것은 백제멸망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가지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제주는 백제와 통교하였고 신라 문무왕 2년(662)에 신라의 속국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볼 때 고려사를 비롯한 몇가지 기록은 변경되어야 맞다.

1985년 제주신문사의 물마루호가 제주에서 마량까지 항해한 항로의 모습이다.
강진이 탐진이란 지명을 갖게 된 것은 757년이다. 제주는 탐라국(耽羅國), 탁라(乇·羅),탐모라(耽牟羅), 섭라(涉羅)등의 지명을 백제와 교류할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탐라란 지명이 탐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름이다. 그러므로 ‘강진을 탐진이라 했으니 그 이유는 탐라사람들이 배를 처음 대었기 때문이다’가 정확한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다.
‘강진현에는 구십포가 있다. 물의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현 서쪽의 물과 합쳐 구십포가 된다. 탐라의 성자가 신라에 조회할 때에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하였다’

이 문헌은 탐라의 성자가 신라에 예를 올리기 위해 방문할 때 배를 구십포(구강포)에 정박했기 때문에 탐진이라고 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렇다고 강진과 제주의 첫 교류가 삼국시대 부터 였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기록일 뿐이다. 실제 강진과 제주의 교류는 훨씬 이전부터 가능했을 것이다.

2008년 2월 초, 한국토지공사가 대규모 택지개발을 추진 중인 제주시 삼양동, 도련동, 화북동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지금까지 제주지역에서 발견된 옹관묘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옹관묘는 청동기시대에 발전된 무덤양식으로 이 시기에 영산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됐다고 전해온다.

그럼 이 무덤양식은 어떻게 제주지역으로 전파됐을까. 이에 대한 대답이 오늘날 제주 와 호남의 해양교류 역사를 말해주는 잣대같은 것이다.

제주시의 삼양동과 도련동, 화북동등은 제주도의 최 북단지역이다. 화복동은 과거 강진과 해남으로 연결하는 항로의 출발점이다. 고대 항로를 통해 화북동의 옹관묘 문화가 들어갔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제주에서 마량까지 고대뱃길을 다시 항해한 것은 마량과 제주의 역사에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1985년 10월 10일 마량항에 도착한 탐사단이 마량주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있다.
좀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제주에서는 지난 1973년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동굴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타제석기가 발견돼 약 4만년 이전인 중기구석기시대때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사람들이 빌레못의 용암동굴에 살면서 한라산의 숲속에서 나는 식물줄기를 섭취하고 짐승을 잡아 단백질을 보충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이때는 제주도가 육지와 연결돼 있을 때였다. 그뒤 빙하기가 퇴조하기 시작하는 2만년 전후가 되면 해수면의 상승으로 제주도는 점차 섬으로 변하면서 육지와 격리되게 되었다.

이후 제주도는 섬의 자체적인 생활 양상과 육지와 우연적이고 산발적인 교류가 뒤섞이면서 다양한 문화가 형성돼 왔을 것이다.

섬과 육지의 교류가 되기 위해서는 섬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거나 육지의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 학자들은 선사시대에는 원시배인 떼배가 그 역할을 상당부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떼배는 선사시대부터 한반도 섬이나 육지의 근해에서 사용되었고, 파도에 밀려 우연적인 표류와 표착이 이어지면서 육지와 제주의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육지에서 제주쪽으로 공식 항해가 이뤄진 기록은 기원전 3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진시황제는 늙지않은 불로초를 구하려 했다.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찾으로 떠났다. 서복은 거대 선단을 데리고 기원전 219년(진시황 28년), 기원전 218년(진시황 29년), 기원전 209년(진시황 37년)등 3차례에 걸쳐 발해와 조선반도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는 자신이 왔다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제주도 서귀포시 정방폭포 암벽과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등에 ‘서시과차(西市過此)’라는 네 글자를 남겼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제주의 대외교류 기록은 3세기 부터 나타난다. 3세기경에 중국(中國) 서진(西晋)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의 말미에 기록된 ‘주호(州胡)’에 관한 기사중에 ‘배를 타고 중한에 왕래하며 교역을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제주와 한반도 간의 교역이 서기 300~400년부터 이루어졌음을 설명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 통한다.

통일신라로 들어오면서 강진과 제주의 관계는 장보고란 역사적 인물을 빼놓고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장보고는 흥덕왕 3년(828)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신라와 중국, 일본으로 이어지던 삼각무역을 13년 동안 독점했던 사람이다.

그가 활동한 바다는 서쪽으로 중국 양주(揚州)로부터 동쪽으로 일본 구주(九州) 일원까지 다양하다. 제주는 그 길목에 있다. 강진만의 입구 장도에 진의 본부를 설치한 장보고가 삼각무역을 독점하면서 제주의 비중을 가벼이 봤을리 없다.

이와 관련해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의 법화사가 장보고가 창건한 절이라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완도 청해진의 법화사와 중국 산동성의 법화원등이 유사성을 갖는다.

법화사지는 신라 장보고에 의해 개창됐고 고려 원종 10년(1269년), 충렬왕 5년(1279년)까지 11년에 걸쳐 중창됐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은 없다.

하지만 1982년부터 1997년까지 진행된 법화사지 발굴조사에서 10세기를 전후해 강진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가 발굴됐고, 역시 법화사와 함께 제주의 대표적 사찰로 꼽히는 수정사(水精寺)터에서도 초기 청자 형태인 해무리굽 청자편이 발견되는 것등으로 봐서 장보고시대와 제주의 연관성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청해진 시절 당시 제주와 강진의 구체적인 교류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이 시기에 제주와 육지 사이에 가장 활발한 문물교류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제주는 수도인 개성과 교류를 트기 시작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제주도는 덕종 3년(1034) 11월 팔관회때 탐라에서 토산물을 진상한 기록이 있고, 이후 계속해서 팔관회에 참석해 문물을 교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중앙정부가 제주에 대해 성주(星主)와 왕자같은 전통적 지배체계를 인정하되 이들 지배체계를 정부가 장악하는 간접지배의 방식으로 통치되고 있었다.

이후 숙종 10년(1105) 제주가 탐라군으로서 고려 군현 체계에 본격 편입되고 12세기 후반 의종대에는 현으로 개편되면서 낮은 직책이지만 현령관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어 고종 10년(1223)을 전후해 탐라는 군에서 목으로 승격되면서 제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된다.

12세기를 전후한 고려시대는 강진과 개경간에 청자뱃길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제주와 강진, 강진과 개경, 제주와 개경을 연결하는 다양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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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들은 배를 참 잘만든다’
떼배가 제주배의 효시
고려시대때는 배(船) 진상


제주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배가 필요했다. 바다에서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도 배가 필요했다. 제주 배의 효시는 떼배로 본다. 터, 테, 태위, 태워, 터우, 테우라고 불리었다.

일종의 뗏목이다.  한라산의 구상나무 통나무를 재료로 해서 7~11본을 연결하며 선미폭이 170~260㎝, 선수폭이 140~180㎝, 길이 400~590이다. 이밖에도 대만의 죽선(竹船), 일본 대마도의 벌선(筏船)등을 제주도의 떼배로 통칭되는 원시배의 형태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 기록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배를 잘 만들고 뛰어난 항해술을 가졌다는 기록들이 여러곳에서 나온다. 고려사 현종2년(1012년) 기록에는 제주에서 대선 2척을 조정에 진상했다고 나오고, 조선 성종실록 성종8년(1477) 기록에는 ‘제주의 배는 왜선보다 견고하고 속력이 빠르다’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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