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바닷논을 가진 ‘성머리’ 마을

지역에서 가장 넓은 어장 보유
이웃 구곡마을까지 성터 존재


이 원고는 올해 강진군교육지원청이 주최하고 성요셉상호문화고가 주관해 진행한 ‘금릉마을학교 사업’의 일환인 ’마을답사‘ 기록이다. 지역공동체의 구체적 사례인 마을의 ’과거-현재-미래‘와 ’우리/나‘의 연관을 탐색하는 이 프로그램은 12명이 참여해 지난 9월부터 도암 항촌, 읍 남포, 성전 안운, 옴천 신월, 칠량 봉황, 대구 남호를 답사했다.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친다./편집자 주

대구면 구수리 남호마을 전경. 마을 앞에는 강진만 갯벌이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대구면 남호마을은 완도에서 강진읍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강진만의 입구를 지긋이 가로막아주는 ‘곶’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강진만 입구를 신전 사초리와 이 마을의 ‘곶’이 마치 성문처럼 감싸 안고 있는 형태다.

어촌체험마을로 알려진 대구면 백사리와 구곡마을, 마량면 서중마을을 경계로 두고 있고, 현재 45여 가구에 80여명이 살고 있다. 신전 사초리와 더불어 강진에서 가장 넓은 어장을 가진 마을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이 마을에서 이뤄지고 있는 주된 일은 농업이다.

탐진강 상류에 댐이 들어선 이후 고막, 바지락 등 어패물의 채취량이 줄어들었고, 7년여 전부터는 아예 귀한 존재가 됐다. 때문에 지금은 굴양식으로 그나마 바다농사를 짓고 있는데, 이마저 인구 감소와 노령화 등 일손 부족으로 쇠퇴해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곳에 ‘성머리’라는 곳이 있다. 사람들이 마을을 부를 때 남호보다는 성머리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는데, 현재 마을의 서쪽 산등성이에서부터 시작하는 석성(石城)의 흔적이 있다. 지금 폭 7, 높이 3.5, 길이 70m 정도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아랫마을에도 꽤 허물어졌지만 형태가 남아 있고, 이것은 이웃 구곡마을 앞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수동, 난산, 계치리 지젯재를 넘어 대구에서 장흥 대덕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아래쪽, 대덕으로 넘어가서 신월리, 대덕읍, 대덕읍 동남쪽 들판 민가 사이, 회진으로 이어진다.

대구 항동 일속산방에서 살았던 황상(黃裳, 1788-1870)은 이를 ‘말을 머물게 하던 긴 성’이라는 뜻의 ‘마류장성’이라 했고, 도암 방산 윤정기 (尹廷琦, 1814-1879)는 ‘바닷가를 따라서 쌓은 성’이라는 의미의 ‘연해장성’이라 부르곤 ‘진도에서 시작하여 경상도에서 끝이 난다’고 했다.

1865년에 작성된 ‘여지’지에는 단종 원년(1453)에 계참곶이 토지가 비옥하고 풀이 풍요하여 말을 기르기에 알맞아 목장을 세우니 둘레가 사방 90리나 된다’고 기록했다.

굴을 까는 마을주민
하지만 근래 들어 조사한 탐진문화연구회 등 여러 사람들은 이런 언급들에 그리 높은 신뢰를 갖지 못하는데, 당시 사람들의 구전에 의지했기 때문인 탓으로 여겨졌다. 필자는 몇 해 전 이에 대한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장흥 동학사 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향토사학자 위의환(장흥 대덕)씨로부터 였다.

청해진 성터로 추정된다는 것이며, 여러 문헌근거들을 제시했다. 그 중 하나가 어디엔가 ‘만호지’라는 기록이 있고, 현재의 장흥 대덕읍 남서쪽 일대가 그곳이라는 것이다.
 
지형상 성의 형태가 이 만호성지를 중심으로 육지 방향으로 빙 둘러친 모양이고, 마량의 가장 높은 산 이름이 관찰봉인 점, 이곳 남호마을 성머리가 내륙의 강진만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 등에서 신빙성 있게 들렸다. 지금도 대덕 만호성지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나오고 있다.

강진에 있는 8개의 섬 중 2개, 바두섬과 노리섬을 갖고 있는 남호마을은 비록 지금은 원마을에만 가옥들이 집중해 있고, 골짜기들에 집들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지만, 예전의 기록들을 살펴 보면 마을을 둘러싼 주변으로 곳곳에 인가들이 있었고, 거기에서 바다에 의지해 살아왔다.

쇠락했지만 지금도 어촌계는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데, 이장(채찬호, 72)이 어촌계장을 겸하고 있는 현실은 어촌계의 실속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전통적으로 바다농사는 이즈음의 자본제 시대와 다른 ‘공동생산 공동판매’ 성격이 아주 짙다. 농사도 그렇지만 어업은 전통적인 데다가 물이 들고 나는 바다의 자연조건을 함께 어울려 극복해야 하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남호마을이 흥성했던 때는 어패류 채취와 김 농사를 하던 1960-70년대 무렵이었다. 당시 강진만에서는 신전, 도암, 마량, 대구, 칠량 어촌마을 대부분에서 김양식이 이뤄졌다. 김 농사는 겨울철 한때에 국한된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가구에서는 한 철 농사로 대가족의 1년을 거뜬히 넘길 수 있었다.

남호마을 사람들의 생활력은 유독 강해서 멀리 신전 쪽에 있는 깊은 바다 복섬 인근에까지 ‘발장’을 설치해 소득을 올렸는데, 지금도 마을 노인들 중에는 그런 경험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대나무로 발장을 치던 때에는 멀리 장흥 대덕 옹암, 고금도 용치까지 가서 ‘포자’를 붙여오기도 했다. 이후 나일론 줄로 발장을 매는 기술이 개발되어서부터는 마을 앞바다에서 곧바로 포자를 붙였다. 

탐진댐 건설은 이 마을에 치명적인 어족자원 감소결과를 가져왔는데, 실제 이에 대한 공적 차원의 보상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한용심(72)씨에 따르면, “댐을 건설할 때 마을 주민들이 장흥 건설 현장에까지 찾아가 농성과 데모를 하며 보상을 요구했지만,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통상 어촌마을의 ‘텃세’는 여느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편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지금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어촌계에 속해 있고, 이주해온 가구들도 원하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가입할 수 있는데, 가입비가 연고자 200만원, 무연고자 300만원으로, 공동어장을 가진 인근 섬마을들에 비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한 번의 가입으로 평생 구성원으로서의 혜택을 누리니까 말이다. 어장의 구분은 공동어장이 있고, 이를 뺀 바다를 구획해 가구별 개인어장을 두고 있는데, 이는 정부에 등록된 형태는 아니지만, 여느 농지와 마찬가지로 관행적으로 소유를 인정받고 있고, 필요에 따라 서로 매매도 이뤄진다.

지금 이 마을에는 45가구 중 15가구 정도가 할머니 혼자 살고 있다. 해방 직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사망해서 서쪽 골짜기에 초분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마을사), 이 무렵 7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와의 연관성은 확인하지 못했다. 가옥들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에 지어졌다가 새마을사업으로 지붕개량을 한 형태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최근 지어진 집들은 모두 양옥 구조다.

마을 앞 바두섬과 더 안쪽에 있는 노리섬에는 지금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마을에 있는 땅은 둔덕의 형태를 가진 지형인데다 최근 농기계의 발달로 많은 계간지를 만들어서 밭 면적이 상당히 넓고, 이곳에 주로 맥주보리를 심고 있다.

서편 어촌계 공동작업장에서는 지금도 날마다 10여명의 주민들이 인근 양식장에서 캐온 굴을 까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용심(72), 박종현(76) 부부 등 연로한 주민들의 1인당 하루 7-8되(되당 3만원)를 까니, 비록 위축되었다고는 하지만 꽤 쏠쏠한 벌이로 겨울을 지내고 있는 것이다.<끝>


청해진성으로 추정되는 남호마을 ‘성머리’

이곳 남호에서 시작해 이웃 구곡, 계치, 관산 신월, 읍내 중앙, 동편, 회진까지 이어지는 긴 성터는 강진, 장흥, 완도가 잇대 있는 해안을 중심으로 해 육지 방향으로 호를 그리고 있는데, 아직까지 그 실체가 규명되지 않았다. 

‘말 목장의 경계’라는 기록(황상)이 있으나 이는 지형상 오르막이 아닌 내리막에 세워졌고, 일부가 2단 구조로 되어있어서 외침 대비용에 더 적합해 보인다며 ‘청해진성’(위의환, 장흥)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곳 성머리로부터 시작해 장흥 회진까지 이어지는 성터의 중심에 대덕읍 ‘만호성지(萬戶城地)’가 있다.

해양세력의 유물이자 영산강 유역에 분포하는 ‘장고분(長鼓墳)‘, 일명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앞쪽 네모진 부분이 내륙을 향해 있는데, 구조가 이와 같다. 일대가 청자 도요지인 점도 연관성을 높여 준다.

성머리로부터 시작하는 이곳 성터와 마찬가지로, 강진읍 영파리와 국내 최대 규모의 해남 북일 방산리 장고분 등 2-30여기의 고분이 해남과 강진 일대에 산재해 있는데,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조사 작업 역시 이뤄진 바 없다.

유역이 이웃 장흥, 완도, 해남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군 단위를 뛰어넘는 지역간 연대가 필요하다. 현재의 성터는 오래 전부터 논밭 조성, 어장 축조, 도로 확장 등으로 많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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