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구간: 마량 하분 방조제~ 대구 기잿재 <3>하분마을과 분토마을

개울이 실개천을 만들고 실개천이 만나 긴 하천을 만들었다
 

실개천 주변에 옹기종기 강진 상분마을 장흥 분토마을
일제강점기때 징용피해 실개천 건너 강진으로, 장흥으로

 대구면 만경대 중턱 기잿재에서 강진의 동쪽 끝마을인 마량면 하분마을까지는 폭 15m 정도 개울이 하나 흐른다. 그 서쪽은 강진이고 반대편은 장흥이다. 기잿재를 중심으로 강진쪽에 해발 398m의 관찰봉과 338m 용마산, 해발 358m 봉대산이 하분마을까지 준엄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다. 장흥쪽으로는 422m 안팎의 부곡산과 공성산, 오성산이 역시 대덕읍 분토리를 거쳐 서신, 신리, 이신마을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겹겹이 둘러 쌓인 산세에 하천이 흐르지 않을 수 없다. 산의 계곡에서 조금씩 모여든 물이 실개천을 이루고, 그 실계천이 만나 기나긴 하천을 만들었다. 기잿재에서 내려 온 물이 관찰봉에서 흐르는 물과 만나고, 이 물은 다시 부곡산 물과 공성산 물이 합쳐지면서 조그만 내를 이뤘다. 사람이 건너뛰기에는 조금 멀지만 그렇다고 웅대한 다리를 놓기도 마땅치 않은 거리다. 개울은 내려와 분토저수지에서 만난다. 저수지 부지중에 장흥의 분토땅이 많이 들어가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개울은 20년전에 비해 많이 말라 있었다. 20년전 이맘때 사진을 보니 하천의 수량이 꽤 되어 보였다. 마을주민들은 여름 장마철을 제외하면 물이 많지 않다고 했다. 아주 오래전에는 일년이면 큰물이 내려갈 때가 많아 마을앞이 범람할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아마도 하천정비가 잘 되어서 그렇겠지만, 한편으로 강수량이 매년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다는 주민들의 걱정을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로 생각하며 한쪽 귀로 흘러 보낼 수 만은 없었다.   

개울 주변에 강진 마을, 장흥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강진쪽에 하분, 상분이라는 두 마을이 있고 개울 건너 장흥쪽에는 호동과 분토라는 마을이 있다. 그중에서도 강진의 상분마을과 장흥의 분토마을은 말 그대로 개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강진 상분마을은 현재 가구수가 20여가구에 주민 30여명이 살고 있고, 건너편 분토마을에는 이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 마량 상분마을(왼쪽)과 장흥 분토마을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 멀리 관찰봉 아래서 시작해 신리 방조제까지 군계를 이룬다.<1998년 촬령된 사진>
일제강점기에는 그런일이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일제의 징용 착출이 거셌다. 그때 끌려가면 일본으로 갈지, 필리핀으로 갈지, 아니면 태평양의 이름모를 섬으로 갈지 아무도 몰랐다. 징용이 곧 죽음으로 인식되는 시대였다. 그때 군계덕을 본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 강진쪽에서 강제징용이 나오면 상분사람들은 개울건너 분토마을로 피신해 버렸고, 장흥쪽 분토마을에 징용 통지서가 나오면 개울을 넘어 상분마을로 건너와 버렸다. 그렇게 하면 관할구역을 중시하던 일제의 경찰들은 십중팔구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6.25때도 마찬가지였다. 건너편 대덕에는 좌익과 우익을 통틀어 피해가 많았다.

1950년 10월경 인민군이 들어온 후 우익인사와 가족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고, 한 달 후 경찰이 되돌아 왔을 때 좌익과 그 가족들에 대한 잔인한 학살이 이어졌다. 건너편 분토마을의 경우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했다. 인민위원회의 지역책임자가 분토마을 출신이여서 인민군이 퇴각한 후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다행히 강진쪽 상분과 하분마을은 피해가 거의 없었다. 분토마을 건너편 상분마을 김현대(83)어르신은 6.25가 전란이 한창이던 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런데 건너마을 분토마을에서 지역책임자를 맡고 있던 사람의 이름이 자신과 똑같은 김현대였다. 그는 경찰이 돌아온 후 어린나이로 조사를 몇 번이나 받아야 했다. 분토마을 지역책임자과 초등학생 김현대를 동일인으로 본 경찰이 이 지역을 집중 조사한 것이다.

김어르신은 “당시에는 남녀노소할 것없이 누가 손가락질만 하면 죽임을 당할 판이었는데 당시 마을 어르신들이 초등학생이 무슨 일을 했겠느냐며 적극적으로 증언을 해줘서 살수 있었다”며 “다행히 상분마을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고 60여년 전을 회고했다.

지금은 행정구역이라는게 큰 의미가 없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후 50, 60년까지만 해도 유별난 그 무엇이 있었다. 주민들은 행정구역을 놓고 강진은 강진쪽 대로, 장흥은 장흥쪽 대로 상당한 자존심 대결을 벌였다.

대표적인게 아이들을 상대편 지역의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자신의 행정구역에 보낸다는 고집이 있었다. 상분과 하분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는 건너편 장흥 대덕읍 대덕남초등학교였다. 하분마을의 경우 마을에서 하천을 건너 좁은 산모퉁이를 돌면 바로 대덕남초등학교가 있었다. 길어서 10분 거리였다. 대신 강진쪽에는 옛 대구남초등학교, 지금의 마량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하분마을에서 마량초등학교까지는 거리가 5㎞였다.

시골에서 흔히 먼 거리로 표현하는 ‘십리가 넘는 길’이었다. 걸어서만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길도 불편하고, 겨울이면 바닷바람도 세차게 부는 등굣길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 대부분은 아이들을 마량초등학교로 학교를 보냈다.  마량 하분마을 우소현(75)선생은 자신이 초등학생 시절 마을에 40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중 정확히 33명이 대구남초등학교를 다니고, 3~4명 정도가 대덕남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물론 당시는 학군이라는게 없어서 부모가 원하면 언제나 가까운 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주민들은 하분마을은 강진이기 때문에 당연히 강진의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계속>             

군계에서 만난 사람 ■ 장흥군 대덕읍 분토리 호동마을 이용희 선생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사올 때는 저쪽보다 이쪽이…”

강진땅에 살다 장흥땅으로 이사와서 사는 주민
겨울에는 수숫대빗자루 만들어 시장애 내다 파는게 큰 재미

▲ 장흥군 대덕읍 분토리 호동마을 이용희 선생
마량 상분마을을 끼고 있는 분토저수지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장흥군 대덕읍 분토리 호동마을이다. 그곳에 사는 이용희(61)선생은 마당에서 겨울바람을 맞으며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있었다. 보통 하루에 20여개를 만드는데, 장에 가지고 나가 5천원을 부르면 금방 팔린다고 했다.

“수수빗자루 요게 아주 좋은 거요. 마당을 쓸면 깨끗하단 말이요. 옛날에는 한집에 서너개씩은 가지고 살았는데 요즘에는 시장에서도 파는 사람이 귀하제”

이용희 선생은 건너편 하분마을 명동이라는 행정구역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지금의 하분마을과 상분마을 중간쯤 산자락에 형성된 작은 산촌이었다. 명동마을에는 다섯가구가 살았는데 모두 이용희 선생처럼 마을을 떠 집한채 없는 곳이 됐다. 그러다가 몇 년전 귀농을 한다는 사람이 들어와 이동식 주택을 짓고 살고 있다. 주변에는 태양광발전소를 지어서 먹고 살겠다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스므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여기도 큰 마을이었제. 뒷산이 경사가 급한데 곳곳에 집이 있었는께.
보기에는 좁은 곳 같아도 밭들이 아주 많은 곳이요. 그란디 이제 4다섯가구 정도만 남았어. 이쪽으로 이사올 때는 저쪽 보다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재미도 없단 말이여”

돌아오는 길에 수수빗자루를 하나 샀다. 손잡이가 통통하게 잘 묶인게 제대로된 빗자루다 싶었다. 그런데 수수빗자루를 아직까지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언젠가 아파트 계단이라도 쓸어야 할 것 같다.   

취재에 도움주신 분들

마량면 하분마을 우소연님, 백형배님, 윤영오 이장님
상분마을: 대덕읍 분토리 호동마을 이용희님

 


▲ 김현대님

 
   
▲ 윤우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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