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은 1417년 병영성 이설 후 상업발달

회령은 1638년부터 무역시장 회령개시 열려
주민들 “남북화해시대, 적극적인 구상해도 좋을 듯”


지난 29일 아트홀 소공연장에서 열린 제6회 강진역사문화 학술심포지엄에 강진고등학교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이 참석해 발표내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이날 군동출신 독립운동가인 오기호 선생의 후손들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29일 열린 ‘제6회 강진역사문화학술심포지엄’에서 1904년도에 함경도 사람과 강진 사람간에 큰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짐으로서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강진군과 한반도 최 북단에 위치한 함경도간의 교류가 세삼 관심을 받고 있다.  

광주교대 김덕진교수의 논문 ‘민장치부책을 통해 본 에 따르면 회령의 1904년 유공율이란 사람이 강진의 작천 박장원에게 6천20냥을 빌려주었다. 6,000냥이면 당시 논 300마지기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논 300마지기의 가치는 지금 보다 당시가 훨씬 높았다.

1904년이라면 한반도에 아직 철도가 개설되지 않을 때였다. 강진과 함경도 회령지역 사람이 자본을 거래하기에는 아주 먼 거리였다.

이와 관련해 김덕진 교수는 강진의 상업발달을 그 이유로 꼽았다. 김교수는 “강진에는 병영상인들이 대외거래를 활발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경도 회령사람이 상업의 인연으로 사채형태로 투자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강진은 1417년(태종 17년) 조선 태종때 전라병영성이 설치하면서 상업도시로 번성했고, 함경도 회령은  1638년(인조 16)부터 청나라와 무역을 위해 조정에서 매년 회령개시(會寧開市)라는 교역시장을 허용함으로서 상업도시로 급성장한 곳이다. 조선전기에는 만주 동부 및 여진족간에 무역을 하던 관문이었다.

강진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들어 철도가 들어선 후 함경북도로 많이 진출한다. 1914년 목포- 대전을 잇는 호남선과 용산-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선이 잇따라 개통됐다.

또 1928년에는 원산-함흥- 성진- 길주- 청진- 회령- 상삼봉 구간을 잇는 함경선이 모두 연결됨으로서 영산포에서 기차를 타면 청진, 회령까지 가는 길이 트였다.

이때 회령, 청진 시장을 가장 먼저 개척한 사람들이 바로 병영상인들이었다. 만주지역에 면제품 소비가 급증하면서 병영상인이 그쪽 시장으로 뛰어든 것이다.

1920년대부터 만주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병영에만 50여명에 달했다. 병영면 중고마을이나 하고마을, 도룡마을 등에 만주장사가 많았다. 이들은 보통 3-5명씩 한 조를 이뤄 ‘만주장’을 보러 다녔다.  

병영면 도룡마을 김연두 선생은 일제강점기때 강진과 만주를 다니며 포목장사를 하다가 청진시에서 자리를 잡고 화물운송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또 대선재분을 창업한 작천 출신 박세정 회장이 일제강점기 장흥과 강진에서 수산물 시장을 하면서 명태를 구입해 온 곳이 바로 함경남도 원산에 있는 태동상회란 곳이었다. 박회장은 해방 후 3.8선이 통제되자 태동상회에 외상값을 값기 위해 3.8선을 밤중에 월경한 유명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훗날 태동상회 사장이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란을 와서 박세정 회장을 만났고 명태거래를 통해 쌓아왔던 신용을 바탕으로 대선재분을 공동 창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렀듯 강진과 함경도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상업을 통한 거래가 있었다.

이에대해 주민들은 “함경도와 강진이 오래전부터 교류를 해왔다는 것은 남북화해 시대를 맞아 강진에게 큰 자산이 아닐수 없다”며 “우리 강진군이 통일시대를 앞두고 좀 더 진취적인 구상을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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