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이 굽어져 둘러치고 있는 목 좋아 살기좋은 마을

해남윤씨 자자일촌, 90여가구 230여명 거주
불교신자보다 기독교 신자 압도적 우위‘독특’


이 글은 올해 전라남도교육청의 지원으로 강진교육지원청과 금릉성요셉상호문화고가 공동 주관해 진행하는 마을학교 사업의 일환으로 ‘강진 마을답사’기록이다. 지역공동체의 구체적 사례인 마을의 ‘과거-현재-미래’와 ‘우리/나’의 연관을 탐색하는 이 프로그램은 16명이 참여해 관내 6개 마을을 답사할 계획이다. 현재 사업에는 12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도암 항촌, 읍 남포, 성전 안운, 옴천 신월을 답사완료 했다. 앞으로 다음달 1일 칠량 봉황, 15일 대구 백사마을을 답사한다. 앞으로 6회에 걸쳐 답사기를 연재할 계획이다.

도암 항촌마을내 위치한 명발당의 모습. 이 곳은 19세기초 다산의 친구 유서유와 윤영희, 윤정기가 살았던 곳이다.
요즘 우리는 풍수지리를 쾌쾌 먹은 낭설쯤으로 여기지만, 지금의 사람살이가 자연을 극복하고 지내는 인공의 기술이 많이 발달해서 그렇지, 땅에 의탁해 지냈던 시절에는 이게 절대적이었다.

도암 항촌은 이 조건을 두루 잘 갖춘 곳이다. ‘신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성전 금당과 항촌을 강진의 대표적 촌락으로 언급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인물이 많이 난 마을을 지칭했을 뿐, 저자가 세세한 내력을 잘 알고 있진 않았을 것 같다.

옛 풍요를 보여주는 헛간이다. 길이 30m에 이르는 집 본채의 마당 건너편에 있는 긴 이 헛간 건물은 기와집도 아닌 초가집 본채의 크기로 볼 때, 농사 규모가 어느 정도 컸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헛간 건물은 허름한 나무기둥에 새끼로 대를 엮어 외벽에 논흙을 바른 전형적인 이 마을의 건축물이다.
강진읍 기룡에서 시작한 덕룡산 맥은 해남 땅끝까지 직선거리 50여 킬로미터를 1자로 쭈욱 뻗은 한반도에서 보기 드문 형세의 산맥이다. 노령산맥에 가 닿지만, 이 맥은 엄밀히 볼 때 ‘중뿔 난’ 것이다. 옛날 도암 사람들은 이 산을 ‘덕스런 용(德龍)’으로 봤다.

맥을 따라 서남해안 바다가 탐진강을 좇아 강진읍 쪽으로 40여㎞를 들어오는데, 항촌은 덕룡산 맥의 윗부분에서 뱀이 또아리를 틀 듯, 산들이 굽어져 둘러치고 있는 ‘목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500년을 이어온 해남윤씨 자자일촌
지금 이곳에는 90여 가구에 230여명이 살고 있는데, 1/3 정도가 해남윤씨고, 2/3 정도가 65세 이상이며, 할머니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많다. 원래 해남윤씨는 도암의 옛 지명을 딴 ‘도강윤씨(道康尹氏)‘였는데, ‘15세기 말부터 이곳 도암 북부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아왔고, 16세기 초 항촌파가 이주해 와 뿌리를 내려서 종가 터인 명발당(明發堂)이 있다. 도면에 살고 있는 4천여 인구 중 1/4 정도가 해남윤씨인데, 항촌파가 절반 정도니 도암에서 항촌은 중심 마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윤운현씨 논에서 캐낸 돌로 가로 100, 세로 50,높이 50m 정도 크기의 산돌이다. 정유재란때 의병과 일본군의 대혈전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화약을 만들었던 기구로 추정된다.
마을에 있는 명발당은 19세기 초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의 친구 윤서유와, 그의 아들이자 다산의 제자이며 사위인 윤영희, 그리고 아들인 방산 윤정기가 살았던 곳이다. 그 중 윤정기는 어려서부터 연경에 유학하고 장성(壯盛)해 돌아오자 경향각지의 인물들이 서로 친구가 되기를 원할 정도였고, 20살 위로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추사 김정희의 친구 윤정현(尹定鉉)과 벗으로 지낼 정도로 학덕이 높고 문장이 수려했다. 하지만, 오직 남인가(南人家)의 정통(正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집안 종손인데도 피를 잇는 손(孫)이 없이 통한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주역, 지리, 시경, 시 등 여러 저술들을 남겼는데, 이런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극히 최근(20여년)의 일이며 그에 관한 20여 편의 학술연구 논문들 중 상당수가 주역에 집중돼 있고, 근래 몇 년 (4-5년)사이에 ‘지역주의’(國風論), ‘시론’(詩論, 詩經講義續集) 등에 관한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5.10 장인 도암장이 이곳 장촌(場村)에 있었는데, 그 원래 이름은 도암의 옛 지명을 딴 ‘보암장’이었다. 이 장은 다산의 친구 윤서유의 아버지 윤광택(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의 친구)이 옛 길목인 ‘용머리’라는 곳에 개설한 장마당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신작로가 개설되자 현재의 ‘새터’로 옮겼다가 없어지고, 지금은 장촌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는데, 이마저 인구 4천여 명이 살고 있는 면소재지 중심 상권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해버렸다.

도암의 종교 현황은 20대1 정도로 불교에 비해 기독교 신자 수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그 기점도 이 마을이다. 1900년 전후, 마을 깊숙한 곳에 있는 ‘안태’에서 숯을 구워 팔아서 생계를 잇던 사람들이 해남 옥천 백호교회를 다니다가 너무 멀어서 1907년에 ‘가정예배’를 보기 시작했고, 1910년, 그곳에 작은 예배당을 지었다. 그 뒤 신도들이 만덕, 운동, 항촌에 교회를 지어 나갔고, 1937년에 이웃 선장마을에 교회를 지었는데, 지금도 교회 건물이 남아 있다.

유교적 전통과 교회가 공존하는 마을
생활윤리인 유교를 종교의 범주로 보기엔 곤란하고, 유교적 전통마을인 항촌에서 비록 도암교회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1년에 몇 번 하는 시제에 참여하는 사람 수보다 주일마다 열리는 예배에 나가는 신자 수가 월등하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마찬가지로 항촌은 유교적 전통과 기독교적 현실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5선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을 지낸 김영진씨가 항촌, 도암교회 출신이다. 

마을 사람들의 경제는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내세울 만한 특용작물이 없는 논농사 위주인데, 이마저 다른 마을에 비해 유독 노인 인구가 많아서 몇몇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논을 대여하고, 인근에 있는 그리 넓지 않은 밭에 콩, 깨, 배추, 무 등 가용작물을 심는다. 마을에서 제일 큰 수입을 얻는 사람은 소 100여 마리를 키우는 축산능가 2가구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촌 사람들의 생계가 여느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진 않은 편인데, 이는 정부기구나 현실경제 체제 안에서 산출해내는 통계수치의 맹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례로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보내오는 돈은 실물경제 계수에 잡히지 않는다. ‘군지’나 ‘마을사’에서는 마을 안에 있는 땅의 면적과 여타의 재부를 갖고 통계수치를 작성했는데,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현실은 그것을 훌쩍 뛰어 넘는다.

항촌 사람들의 혈연관계는 도암, 강진 일대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은 인근 도암, 신전 일대에 산재해 있다. 비록 경제성이 낮고 공공재이긴 하지만 ‘문중 산‘과 ’위토답‘은 거의 모든 마을마다에 있고, 항촌 사람들이 가장 잘 살았던 18세기 말에는 바닷가 갯펄 간척사업을 많이 해, 멀리 해남 화원반도에까지 이르렀고, 당시 위축된 해남 녹우당의 살림을 도와줄 정도로 풍족했었다.

지금 항촌에는 여느 마을처럼 빈집이 늘어가고 10가구 남짓의 귀농, 귀촌인들이 살고 있다. 오래 전에는 명발당 뒷동산에 있는 큰 노송 가지에 학이 날아와 장관을 이뤘고, 기와집들이 즐비했는데, 그런 와가(瓦家)들은 농업경제에서 상업경제로 이전해갔던 60~70년대의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까닭에 대부분 없어지고 단 한 채, 명발당만 남아 있다.

오래된 빈 집터는 자취마저 없어져 버렸고, 아직 남은 빈 집들은 도회지에서 살고 있는 자식들이 돌아온다고 팔지 않지만, 이내 허물어지기 일쑤다. 현재 가옥들은 대부분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으로 개량한 슬레이트 집이고, 이후에 지은 집은 대부분 양옥 구조다. 집 담장들은 대부분 시멘트 벽이고, 올해 마을 안길을 아스팔트로 포장했는데, 마을 한가운데에 전통적인 흙집구조로 된 큰 헛간이 남아 있다.

이장 윤해성(71), 노인회장 윤보현(82), 개발위원장 윤승동(78), 활성화사업 부위원장 윤영기(62), 새마을지도자 이장석(58), 부녀회장 최봉자(56) 씨 등이 마을 대소사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근래 항촌마을이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작년부터 꽃길가꾸기 등 마을환경조성사업을 시작했고, 면소재지인 장촌마을과 연계한 여러 가지 개발 사업을 추진 중이다. 
   
홀몸으로 육남매를 키운 임향심 할머니

임향심 할머니
열 아홉 살 때 이웃 삼인마을에서 시집 온 임향심(89) 할머니는 채 아이도 낳지 않고 남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해서 ‘미망인’이 되었다. 시집에서도 친정에서도 모두 개가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개가하지 않고, 당시 한 집에서 시부모, 손아래 시아재 내외, 그 여섯 남매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경찰이었던 시아재가 지병으로 숨졌고, 이내 홀몸으로 시부모와 여섯 남매를 거둬야 할 동서는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임할머니는 그런 여섯 남매를 보듬고 한방에서 잤다. ‘주르륵 이불을 덮고 자는데, 오늘 저녁에는 이 놈이 이불 속에서 훌쩍훌쩍 숨죽여 울고, 다음날 저녁에는 저 놈이 숨죽여 울기를 몇 달간’ 했다고 한다.

임할머니는 홀몸으로 시부모를 모시면서 그 여섯 남매를 모두 키워 대학까지 가르쳤다. 시골에서 아들 하나 대학 보내기가 보통 일이 아닌데... 물론 큰아들이 학교를 졸업해 돈을 벌면 동생들 학비를 대는 식으로였다. 지금 그 여섯 남매는 모두 결혼해서 손주들을 두고 있다.

자식들은 시골집에 혼자 사는 어머니가 안타까워서 날마다 전화를 해온다. 올해 초에는 광주 과학고와 대전 카이스트를 나온 큰아들 손주가 연구소에 들어갔다며 좋아하셨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