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만나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안규관 행복봉사단장이 오늘날 봉사의 삶을 살게 해주었던 이한성 전 강진군농촌지도소장을 생각하며 포즈를 취했다.
1988년 농촌지도소 입사하며 첫 만남
해남출신으로 따뜻하고 인자한 모습 인상깊어
직장동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배려
인생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에 대해 조언


나는 제46회 강진청자축제가 개최되는 청자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구면 용문마을이 고향이다. 고향에서 10대 시절을 보내고 19살되던 해에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집안형편상 학교에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2년정도 직장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됐다.

서울에서도 다양한 경험을 했다. 식당이나 숙박업소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중장비와 관련된 일을 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경험을 쌓으며 일을 하다가 25살 되던해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 고향인 강진으로 내려오게 됐다.
강진으로 내려온 후 우연하게 농업기술센터에서 운전직 직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고 다행스럽게 합격돼 공직생활을 하게 됐다. 이때가 1988년 무렵이었다.

나는 당시 농촌지도소에서 근무했다. 내가 맡은 일은 당시 소장님의 차를 운전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농촌지도소가 국가직이었기 때문에 소장에게 차량과 운전기사가 지원됐다. 나는 그 일을 했던 것이다.

약 12년정도 농촌지도소에서 일을 하며 5명의 소장님을 모셨다. 그중에서도 3번째로 모셨던 이한성 소장님이 아직도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이 소장님은 해남이 고향이셨다. 첫 인상은 인자하고 다정한 분위기를 갖고 계셨다.

겉으로 풍기는 느낌답게 이 소장님은 항상 부하 직원들에게도 친절하고 자상하신 분이셨다. 마치 자기 자식처럼 부하 직원들을 잘 챙겨주는 모습에 이상적인 상사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저절로 존경하게 됐다.

故 이한성 전 강진군농촌지도소장
보통 농촌지도소내에서 과장이나 계장님들과 어울릴 때가 있었다. 이때는 소장님은 직원들과 함께 어울리지만 운전기사는 별도 공간에서 대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소장님은 내가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과장님이나 계장님 옆에 내가 앉을 수 있도록 해주셨고 그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며 친해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특별히 외부에서 손님이 오셔서 함께 식사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식사자리에 나도 함께 동석사셨다. 이처럼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전혀없는 이 소장님의 행동과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마음에서 우러나와 이 소장님을 따르게 됐다.

이 소장님은 항상 나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나와 대화를 자주 나누곤 하셨다. 이 소장님은 나에게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라던가 부모님이나 선후배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말해야 하는 가 등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시곤 하셨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 생각해보면 이때 소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내가 오늘날 인생을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됐던 것 같다. 이럴때면 소장님이 생각나곤 한다.

이 소장님은 테니스를 정말 좋아하셨고 잘 치셨다. 당시에 농촌지도소에서 의료원 인근에 있었던 테니스 코트를 관리했다. 이 곳에서 이 소장님은 테니스를 치셨다.

소장님은 항상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테니스를 칠때면 항상 내가 함께 파트너로 게임을 하곤 했다. 소장님에 비해 실력이 한참 떨어졌기 때문에 상대가 되진 않았지만 항상 이 소장님은 나에게 테니스를 가르쳐주시며 함께 하셨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이 소장님은 정말 인간적인 분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내가 이 소장님을 모시고 차를 타고 어딘가로 대려다주면 소장님은 항상 나에게 “고생했다” “고맙다”라고 말씀하시며 격려를 해주셨다. 또 여행을 다녀오시면 항상 내 선물도 챙겨주시는 등 따뜻하고 인자한 상사셨다.

이 소장님이 나에게 해주신 말씀중에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사람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이 소장님의 말씀덕분에 나도 언젠가는 소장님처럼 좋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됐고 이는 오늘날 내가 활동하고 있는 봉사단체를 조직하는 원동력이 됐다.

나는 공직생활을 하다가 2014년 퇴직했고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는 어르신들을 위해 즐거움을 드려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어느날 부모님을 모시고 요양보호시설을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 어르신들을 보며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봉사를 계획했다. 이듬해인 2015년 행복봉사단을 조직해 현재 9명정도가 활동중이다. 회원들은 노래, 레크리에이션, 기타, 색소폰 등 다양한 특기를 갖고 있다.

회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요양시설을 찾아다니며 무료로 공연을 선물하고 있다. 여건만 된다면 1년에 1번정도 어르신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며 무료공연을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어려운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하는 길을 가게 된 것이 모두 이 소장님 덕분인 것 같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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