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한번 하면 주워담을 수 없으니 항상 말조심 해야 한다”

구연남 강진읍 남문마을 이장이 남문마을회관에서 청년시절 인연을 맺은 문재동 강진향교 감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청년시절 양복점 하던 때 인연 시작
항상 과묵하시고 다른 사람 말 경청
배움에 대한 열정 누구보다 큰 사람
한자지도사 자격증 취득, 서예실력도 탁월


나는 병영면 도룡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3살 때 강진읍으로 이사와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기에 병영에 대한 기억보다 강진읍의 기억이 더 많다.

강진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다가 양복점 일을 배우게 됐고 일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서울의 한 양복점에서 옷 만드는 일을 7년동안 배웠고 그 사이에 군대도 다녀왔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고향을 떠난지 10년만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후 1~2년 정도가 지난후 결혼을 하게 됐고 강진읍내에 양복점을 시작했다. 처음에 현재 강진완도새마을금고 자리에 양복점을 시작했다.

양복점은 전세로 살았는데 집 주인이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팔면서 가게를 나가야했다.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해 친척들의 집을 빌려 물건을 보관해두면서 영업을 해야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양복점을 하던 중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기성복이 등장했다. 이때 나는 양복점이 사양길에 접어들겠다는 예상에 과감하게 가게를 접고 강진읍시장안에서 옷가게를 오픈해 현재까지 약 25년간 영업해오고 있다.

동시대에 양복점을 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그때 양복점을 접었던 것이 신의 한수였다는 말을 나에게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당시에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양복점 하던 당시에 알게 됐던 문재동씨를 꼽고 싶다. 평소에 사석에서는 “형님”이라고 부른다. 형님은 내가 현재 강진완도새마을금고 자리에서 양복점을 하고 있을 때 근처에서 한일가스를 운영하고 계셨다. 이때 처음 알게 됐다.

형님은 첫 인상은 지금 떠올려보면 다소 조심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형님은 평소에 과묵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씀을 많이 하지 않으셨고 주로 듣는 입장이셨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다소 대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했지만 형님의 진면목을 알게 된 이후에는 누구보다 열정이 많고 마음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형님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사실때문이었다. 나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다. 이 것이 평생 한이 맺혔고 항상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형님도 학교를 많이 다니지 못했고 이 때문에 항상 배우는 것을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문재동 강진향교 감사
어느 날은 한자에 대해 알아야 겠다는 생각에 서예와 한자학원을 다니게 됐다. 강진읍에 금릉학원을 등록하고 다니게 됐다. 이때 형님도 나와 함께 금릉학원을 다니게 됐는데 나는 한자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배움의 속도가 느렸다. 반면 형님은 평소 한자에 대해 잘 알고 계셨던 탓인지 얼마 배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자에 대해 잘알게 됐고 서예도 금방 배우셨다. 선생님 못지 않는 멋진 필체를 뽐내셔서 내가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또 나는 우연히 작천에 사는 한 후배의 권유로 목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게 됐다. 일주일에 1번정도 직접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나머지는 집에서 라디오를 통해 공부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당시에 국가가 인정하는 고등학교 과정이었고 3년동안 다녀야 했다.

이 곳을 다니면 고등학교 졸업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기에 나는 열심히 다녔다. 3년후 나는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고 형님에게 이 같은 내용을 소개했다.

내가 직접 형님을 모시고 목포에 있는 학교까지 가서 소개를 한 덕분에 입학을 하셨고 3년동안 학교를 다니셨다. 나는 졸업까지 어떤 과정을 배우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대학에 들어가고자 수능시험 준비까지 했으나 큰 딸도 대학에 들어가야하는 때였기에 등록금에 대한 부담과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나중으로 미뤘고 그 꿈은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형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전에 있었던 성화대 복지관련 학과에 입학하셨고 자격증도 따서 시각장애인관련 단체의 장으로 정년까지 근무를 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하지못했던 일들을 형님은 과감하게 하시는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는 점을 느꼈다. 최근에 형님은 강진군립도서관에서 한자교실 훈장으로 초빙돼 강사로 활동하고 계신다. 형님이 한문지도사 자격증을 갖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 덕분이다.

한문지도사 1급 자격증은 일반적으로 많이 취득하는 한자급수 자격증에 비해 난이도가 훨씬 높아 현직 한문교사들도 시험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형님의 한자 실력은 대단하다. 나 자신도 더 나이들면 한문지도사 자격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난이도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형님은 항상 나와 함께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좋아하셨고 다양한 분야에 지식도 많으셨다. 법률, 부동산 분야 등에 있어서 탁월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풍부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나도 어려운 일이 있거나 궁금한 점이 있을 때에는 항상 형님에게 물어볼 정도이다.
 
나와 함께 서예를 배우셨지만 나와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서예실력도 탁월하다. 대회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한 경력도 있다. 최근에는 장흥지청 검찰시민위원회 위원장과 강진향교 감사 등 지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다.

형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면서 인생에 필요한 조언을 많이 들려주셨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바로 “말은 한번 하면 주워담을 수 없으니 함부로 말하지 말아라”라는 것이다. 형님은 항상 과묵하시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셨다. 이는 말이라는 것이 잘못하면 칼날이 되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비수로 꽂힐 수 있다는 점을 아시고 말을 아끼셨던 것 같다.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큰 형님을 보면서 항상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가고자하는 인생의 롤모델이 바로 문재동 형님이다. 앞으로도 형님과 함께 계속 배움의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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