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향선생의 미망인 박영숙씨가 금서당 안 천정에 걸어둔 그림에 비가 스며든 자욱을 가리키고 있다.
유작 습기에 축축...금서당도 위태
완향선생 작품은 강진의 자산
“강진군이 매입해서 전시관리해야”

장마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찾아든 23일 오후 3시경 강진읍 남성리 영랑생가 뒤편에 있는 금서당. 강진 최초의 현대식 교육시설 건물이자 완향 김영렬 화백이 2003년 작고하기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남긴 화실이기도 하다.

남쪽으로는 맑게 거친 하늘아래 강진읍과 강진만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뒤쪽으로는 우람한 적송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강진의 몇 안되는 절경이었다.

완향선생집 안으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바람을 들이기 위해 사방문이 열려 있었으나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습기를 견디지 못한 그림들이 썪고 있는 중이었다.

고풍스러운 대들보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이 오랫동안 스며들면서 직경50㎝가 넘은 대들보가 마치 물에 잠기듯 위태로운 상태로 한옥을 버티고 있었다.

완향선생의 미망인 박영숙(73)씨는 “장마때가 되면 집안에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습기가 많다”며 “자주 문을 열고 선풍기를 틀지만 물이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지경이다”고 하소연했다.

거실 오른편 천정에 걸려 있는 그림에는 물이 스며들어 둥그런 원을 만들고 있었다. 이날은 비가 그친 상태였지만 물기가 흥건했다. 흐르는 물은 오른쪽 기둥으로 타고 내려가 그림의 액자속으로 파고 들었다.

본가 건물 뒤쪽 별실은 완향선생의 작품만 걸어 놓은 곳이다. 이곳에서도 썩은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더위에 못견디고 5분을 참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그림 곳곳에 마치 어린아이가 오줌을 싸 놓은 듯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습기와 그림의 액자, 벽지들이 고온다습한 기온속에서 끊임없이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완향선생은 강진의 풍경을 유화작품으로 남긴 대표적인 향토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지역차원의 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지난 10여년 동안 곰팡이 투성이의 한옥건물에서 그림이 썩고 있는 중이다.

혼자서 이곳을 지키고 있는 미망인 박영숙씨는 “그동안 그림과 집을 함께 파라는 서울사람들이 많았으나 강진에서 선생님의 유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절대 응하지 않았다”며 “미국으로 그림을 가져가려고 굉장한 정성을 보인 교포도 있었다”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완향선생의 그림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강진군이 그림과 집을 매입해서 전시실을 건립하고, 이를 영랑생가와 연계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주민들은 “완향선생의 작품과 고택을 강진군의 자산으로 만들어 영구히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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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향선생의 그림이 보관중인 금서당은 오래된 목조건물의 절반을 보수유지하고 있는 형태여서 비가 내리면 여기저기서 물이 새고 있다.
금서당(琴書堂)은

강진 영랑 생가의 약 150m 위쪽, 보은산 선인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서당이 있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에 사립 금릉학교에서 강진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강진중앙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면서 강진 지역에 신학문을 보급하는 터전이 되었다.

한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1950년 이후 김영렬 화백이 매입하여 관리해왔다. 2003년 김영렬 화백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부인 박영숙씨가 남편의 작품을 보관하며 관리하고 있다.

건물은 반쪽자리 2채의 건물을 붙여놓은 모습인데 반쪽은 기와, 다른 반쪽은 슬레이트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몸체도 오래된 옛집에 벽돌집 절반을 붙여지어 색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이곳에 그림이 1천여점이 보관돼 있으나 습기가 많아 그림은 물론 금서당 건물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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