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욱 / 민족문화유산연구원

“강진청자와 고려청자는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강진청자의 변천사가 고려청자의 변천사이며, 고려청자의 변천사가 강진청자의 변천사라고 할 수 있다.”

강진은 조선 태종대(1400~1418년) 도강현(道康縣)과 탐진현(耽津縣)이 통합되면서 갖추어진 행정구역이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도강현과 탐진현이 각각의 행정구역을 갖추고 있었으며, 청자를 생산하였던 대구소(大口所)와 칠량소(七良所)는 탐진현 내에 있었다.

이들 “所(소)”는 국가 재정과 물품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운영되었으며 국가의 통제와 토착세력의 관리 아래 품질이 관리되었다. 고려시대 탐진현은 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는 단계부터 그 기술이 유입되어 퇴장하는 시기까지 청자를 생산하고 발전시켰던 가장 대표적인 고려청자 요장(窯場)이다.

특히, 강진은 도기를 만들던 전통적인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선진 도자 기술을 받아들여 독보적인 비색청자(翡色靑瓷)와 상감청자(象嵌靑瓷)를 완성하였던 곳으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따라서 강진청자와 고려청자는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강진청자의 변천사가 고려청자의 변천사이며, 고려청자의 변천사가 강진청자의 변천사라고 할 수 있다.

  고려청자는 선승(禪僧)들에 의한 다도(茶道) 보급과 강력한 해상세력을 구축하였던 장보고(張保皐) 대사(大使)에 의해 수입되었던 중국 청자가 고려에 더욱 확산되면서 자체적으로 청자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건국과 함께 사회가 안정되고 제도가 정비되면서 수도인 개경(開京)을 비롯하여 많은 곳에 다양한 건물이 신축되면서 이곳에 사용할 고급 기물이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여러 지역에서 생산된 청자가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가운데 강진 지역이 청자 생산의 중심이 된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왕실을 비롯한 수요층의 미감과 일치하였으며 기술력이 월등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수요층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기술력과 예술성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강진을 비롯한 전라도 지역은 풍족한 물산과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자기에 대한 이해와 수요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전라도 지역은 한반도의 곡창지대로 농경시대에는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많아 음식과 음주, 음다 등 풍류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고급 도자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즉, 생산과 물류뿐만 아니라 소비지의 여건도 갖추고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도자문화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닷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를 통한 선진 기술의 신속한 유입과 용이한 원료 수급, 편리한 유통 수단 등이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해로의 장점은 탐진의 지명이 耽羅(탐라; 현 제주)와의 해상 교류 때문에 생긴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한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강진은 겨울과 여름의 기온 차가 심하지 않아 일년 내내 온난하여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또한 요장 주변에 품질이 우수한 태토가 매장되어 있으며 땔감과 수량(水量)이 풍부하여 우수한 도자 생산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진 지역이 고려청자를 선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에 선진 기술을 수용할 수 있었던 전문 기술과 우수한 문화, 그리고 이를 통제 운영할 수 있었던 세력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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