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년전 대구 사당리 도공의 간절한 소원‘청자명문’
청자도판에 모친 극락왕생 기원하는 문장 빼곡이 세겨
도판 뒷면에는 고려시대 도공의 뚜렷한 지문이 그대로
1962년 사당리서 주민이 발견, 지금은 국립박물관에


900여년전 대구 사당리의 도공이 청자 도판위에 새겨 넣은 청자명문. 어머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고려시대 도공은 어머님의 죽음이 그렇게 안타까웠던 것일까. 손바닥만한 청자 도판위에 흑상감으로 빼꼭히 글자를 채웠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명복을 간절히 비는 장문의 발원문이다.

도판위에 새겨진 글자가 그렇게 수려하지가 않아 지체 높은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청자 만드는 일에 충실한 도공의 글자라고 해야 어울리는 문체다. 2017년 청자축제를 맞아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한번쯤 고개돌려 봤으면 하는 청자편이다.

청자에 명문(銘文)이라고 해서 간단한 글자가 적어져 있는 것은 많다. 보통 청자를 만든 연대를 적은 것이 많고, 간단한 그림이나 사인형태의 문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견된 청자에서 이렇게 많은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이 청자편은 1962년 봄에 사당리 118번지에 축사를 짓다가 발굴된 파편이다. 대구일대 고려청자는 1964년부터 발굴작업이 본격화 됐기 때문에 아직 청자가 일제강점기 이후 역사속에 묻혀 있던 시기다.

이후 이곳을 답사차 방문한 죠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인 부인이 어떤 소년으로부터 구입했다고 한다. 죠부인은 이 청자편을 1965년 봄 한국 도자사의 산증인이었던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 선생에게 보여 주었고 훗날 국립박물관에 기증해 세상에 알려졌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인들이 강진 청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사당리를 찾았다고 한다. 주로 미국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졌던 이 사람들은 겨울이나 이른 봄철에 검은 짚차를 타고 3~4명씩 사당리를 찾아와서 곳곳에 널려 있는 청자편을 주워가곤 했다.  당시 어린나이에 이들을 안내한 적이 있는 양광식 강진문헌연구소 소장은 “미국인들이 아마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사당리를 답사한 기록을 보고 강진 청자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자편에 남아 있는 명문은 10행 86자에 달한다. 사라진 것까지 합하면 더 많은 글씨가 있었다는 얘기다. 도편의 크기는 높이가 11.5㎝, 폭이 11.2㎝다. 전체적으로 손바닥만한 크기다. 매우 작은 청자도판에 100여자에 이르는 글자를 세긴 정성이 대단해 보인다.

최순우 선생은 이 도편이 유약의 질과 글자체로 봐서 청자의 최전성기인 12세기 상감청자를 만들던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12세기 최고급 상감청자는 사당리 일대에서 만들어 졌다.
청자의 명문 내용은 주로 불교의 경전을 이용해 부처님에게 어머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다.

청광 양광식 선생이 번역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중간중간 해독되지 않은 글자가 있어 한글이 잘 연결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열반하기 때문에 나는 있다’ ‘무덤에서 평안하다. 위로 오직 여러 부처님께 소원하니’ ‘법륜을 전하소서. 지금의 나는 어머니와 바로 헤어졌다’ ‘또 소원하나니 모든 성현과’ ‘법을 하여 주소서. 죽은 아버지께서도 어머니를 보호하시고, 부축하여 인도해 주십시오’ ‘두루 부족하니 법계에 포용하시어’등의 문구가 보인다.

전체적인 흐름을 요약해 보면, 부처님께 어머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고, 한편으로 먼저 돌아가신 아버님에게도 어머님을 보호해 주실 것을 빌고 있다.

이는 청자도판에 글자를 새긴 도공이 불교에 상당히 정통했고, 한편으로 돌아가신 아버님께 어머님의 극락왕생을 도와줄 것을 빈 것으로 봐서 민간신앙에도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청자도편의 뒷면에는 특이하게도 도공의 지문이 남아 있다. 도판의 뒷면에는 손자국으로 이뤄진 큰 심원(心圓)이 둥글게 남아 있고 이 심원에는 손끝으로 마무리한 손가락 자국이 네 곳 남아 있는데 이 손자국에 뚜렷한 도공의 지문이 남아 있는 것이다.

뚜렷한 지문이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최순우 관장은 “가이 사랑스럽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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