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폭한 마음을 다잡는데 서예 만큼 좋은 게 없지”

뛰어난 정신력으로 자신의 장애 극복
독창적인 한글서예로 전국에 명성 떨쳐

한글 서예가로 명성이 높은 백사 정윤식 선생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에 신전면 수양리에서 태어난 백사 정윤식 선생은 나와 12살 띠동갑이지만 ‘형님’이라고 부른다. 같은 동네이고 작년에 세상을 떠난 나의 큰형의 친구이자 집안 고모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큰 형과 같이 다녔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소재지인 장촌 일제식 적산가옥 1층 터미널 옆에서 한국일보 지국을 운영했다. 1978년쯤에 장충체육관에서 99%의 찬성으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뒤이은 민주평화통일국민회의(평통) 대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됐던 것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요즘과 달리 그때는 평통 대의원을 선거로 뽑았다.

그의 정치성향과 이력을 들은 것은 최근 일이다. 99%가 아닌 1%의 야당생활만으로 점철해왔다. 한때 문화원 일도 관여했었고 무엇보다 그는 ‘한글서예’를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의 삶과 정치이력보다 글씨에 더 관심이 많다.

흔히 한글서예 대가로 작고하신 신영복 선생님을 많이 꼽는데 그분의 운필처럼 그의 글씨는 누구의 본도 따르지 않고 독창적이다. 이 독창적이란 말은 좋게 말해 그렇지 ‘족보’나 ‘스승’이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은 ‘똘 것’ 혹은 ‘중뿔난’ ‘개 밥의 도토리’ 격이란 말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이 예술의 본령이라 생각한다. 그와는 강진에서의 서예작업과 강진이라는 소지역 현실정치와 선거에 대한 얘기를 주로 나눴다. 

알다시피 그의 몸은 한 손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신의 약점을 글씨쓰기 작업을 통해 극복해낸다. 때로 그의 집에 들렀을 때 그가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면 손에 힘이 없어서 심하게 떨었다. 그런데도 서예작업을 하고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그만그만 하냐 하면 그게 아니다.

그의 글씨를 봐 온 사람들을 알겠지만, 그는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을 것만 같은 유려한 한글글씨를 써 낸다. 그런 정신력이야말로 더 젊은 후학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왜 글씨를 쓰게 됐는지에 대한 물음에 그는 “폭폭한 마음을 다잡는 데에는 글씨만큼 좋은 게 없다”고 대답했다.

소지역이지만 정치나 정당활동, 선거를 많이 해봤으니, 군수, 군의원, 도지사, 도의원, 국회의원 같은 선출직 공직자들에 대한 생각도 물었는데, 구체적인 사람마다의 호불호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다만 다소 두루뭉술 한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만 이렇게 말했다.

“아야, 그 사람들이 공복 아니냐. 그란디 너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혼자 가만히 앉거서 생각해볼 때, 자신을 희생해서 표 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냐?”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내년 6월이 새정부 들어서 하는 지방선거인데, 선거 얘기 좀 들려주라는 말에는 이렇게 답했다.
 
“요새 사람들은 선거 끝나면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 톡 떨어지고도 바로 다음날이면 읍내 거리에 나댕기데잉? 우리는 선거에 떨어지면 후보가 됐던지 운동원이 됐든지 챙피해서 한 열흘간은 집에 쿡 처박혀서 이불 뒤집어 쓰고 잠만 잤어. 그라고 누워 있는다고 해서 잠이 올 것이여? 이불 속에서 울었제”

그만큼 절실하게 선거에 임했고, 결과에 책임을 졌었다는 얘기 같았다. 선거운동을 했던 이야기도 들려줬다.

“언제는 40일간 선거운동을 했는데, 아침에 날계란 하나를 컵에 따라서 들깨기름을 부어서 한 잔 마시고 집을 나서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다 보면 간데마다 막걸리 판이여. 그랑께 그거 한 잔씩 받아마시다 보면 밥은 안 먹어도 막걸리 그것이 요기가 됐고, 그렇게 많이 마시고 댕겼어도 취할 틈이 없었어”라고.

기실 이런 정치지향이지만, 평생 야당만을 해왔기 때문에 그에게 남은 건 별로 없다. 후회만이 밀려든다고... 38살에 선거에 출마해봤는데, 그때는 물불을 안가렸었는데, 세월은 어쩔 수 없더라고.

10여년 전부터 그는 우리서예원(우서회)라는 서예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유림회관을 작업실로 쓰고 있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시작해서 9시까지 10명 정도의 회원들이 모여서 묵향에 젖어 산다. 어떻게 묵고 사냐는 물음엔 이렇게 답했다.

“아, 어떻게 묵고 살어? 대한민국이 이라고 선진국인디 밥 굶어죽는 사람 봤냐? 뭣을 하든지, 심지어는 얻어먹더라도 굶어죽지는 않아. 담반 쪼끔 더 있고, 없는 것 차이제. 그냥 나는 없이 살어? 차비 없으면 걸어댕겨불고. 누가 아무리 잘 살어도, 그 사람도 하루 밥 세그릇, 나도 세그릇 먹는 거제, 잘 사는 놈이라고 하루 밥 네끼 먹을 것이라고?”   

백사 정윤식 선생은?

1951년 도암 수양리 출생. 도암 한국일보 지국 운영, 읍내로 이주해서 강진문화원 이사로 활동했다. 현재 한글박물관 초대작가. 강진 문화재 작가 회장이며 여러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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