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폭력으로 얽룩진 2대국회, 역대 선거 중 최고 경쟁률 기록

박두만․ 차경모․ 양병일․ 김갑자남, 이희철,
정종실, 김용선, 김승식 후보 출마 8:1 경쟁률
양병일 후보 3만6천6백32표 당선
현역 차경모 9백50표로 7위 오명

양병일 의원 민주주의 신념, 정치적 소신 대단
이승만 대통령 1차개헌 반대 ‘기권’ 소신

양병일 의원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이하 2대 총선)는 제헌국회 선거가 미군정하에서 실시되었던 것과 달리, 의정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만든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실시됐다.

그러나, 2대 국회는 임기동안 6․25 전쟁이 일어나고 ‘부산정치파동’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하는 등 격랑에 휩싸인 국회였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2대 총선으로 선출된 의원들은, 6월 19일 개원식을 가졌으나 며칠 후 6․25 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옮겨가야 했다.

2대 총선은 선거일 결정부터 논란을 벌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총선패배가 예상되자 총선을 6개월 연기한다고 발표했다가, 야당의 반발과 미국의 군사․경제원조 중단 경고로 선거 연기를 번복하고 5․30 총선을 실시했다.

2대 총선은 제헌선거에 비해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의원 정수는 제헌 국회보다 10명 늘어난 210명. 모두 39개 정당․단체와 무소속이 참여하고, 전국에서 2천2백9명이 입후보해 10.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제헌 선거에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일부 중간계열의 참여가 경쟁률을 높였다. 무투표 당선자는 전국에서 한명도 없었다. 전남지역은 제헌 때보다 1개가 늘어난 30개 선거구. 모두 2백41명이 금배지에 도전했다.

5대 총선과 함께 역대선거중 가장 치열

강진선거구 역시, 경쟁률이 높았다. 강진은 모두 8명이 출마, 8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이 같은 경쟁률은 지난 2008년 18대 총선까지 역대 강진지역 총선 중 5대 총선과 함께 가장 높은 기록이다.

두 선거는 강진 단독 선거구 때였다.

금배지에 도전했던 후보들(기호 순)은 이희철(李熙喆․41,무소속) ․ 박두만(朴斗萬․39,노농당) ․ 차경모(車庚模․61,국민당) ․ 정종실(鄭宗實․36,무소속) ․ 김용선(金容善․61) ․ 양병일(梁炳日․41,민국당) ․ 김승식(金承植․46,무소속) ․ 김갑자남(金甲子男․26,노총)후보 등 모두 8명. (김갑자남 후보는 동아일보 기록에 김경남(金景男)으로 되어 있음)

박두만․차경모․양병일․김갑자남 후보는 강진읍 출신이고, 이희철․정종실 후보는 성전면, 김용선 후보는 병영면, 김승식 후보는 작천면 출신 이었다.

선거전이 전개될 때 강진지역 분위기는 전국 분위기와 다를 바 없었다. 제헌선거 당시보다는 심하지 않았지만, 후보자가 난립한 관계로 선거전이 치열해 선거 벽보가 훼손되고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이 살포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선거 직전에 강진과 가까운 목포와 광주를 비롯한 원주․대구․부산․대전 등 전국을 순회 방문, 가는 곳마다 “선거 성과를 기대한다”고 노골적으로 여당 지지를 호소했다.

이 대통령은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목포항에 도착, 12만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정부시책을 설명하는 연설회를 갖기도 했다.

선거전은 차경모 후보와 김용선 후보, 양병일 후보가 3파전으로 전개됐다. 제헌 의원인 차경모 후보는 국회에서 사퇴서가 수리되지 않아 현역 의원 신분으로 재선에 도전했다.

제헌선거 때 2천7백여 표 차이로 2위 낙선했던 김용선 후보 역시, 두 번째 금배지에 도전했다. 김후보는 일본 명치대를 졸업하고 제6대 병영면장을 지냈다. (선관위 기록은 면장 3년이나, 병영면 홈페이지에는 면장 9년 2개월간 재임으로 기록되어 있음)

광주에서 변호사를 개업 중이던 양병일 후보는 변호사활동을 하면서 한청 광주시단장을 지냈었다. 김용선 후보와 같은 당인 민국당 후보로 출마했다.

선거 결과, 선거전 때의 3파전 양상과는 다르게 첫 출마한 양병일 후보가 유효 투표수(3만6천6백32표)의 24.8%인 9천99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8천5백16표(23.2%)를 득표한 김용선 후보. 김 후보는 같은 당 소속인 양 후보 보다 불과 583표 차이로 아깝게 낙선했다.

차경모 후보는 ‘현역 국회의원’이란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예상과 달리 9백50표(2.6%)를 얻어 출마자 8명중 7위를 기록했다. 어찌 보면 차 후보의 큰 표 차이 낙선은 예상된 것이었다.

차 후보는 해방 후 좌익계열의 과격한 활동에 대한 지역민들의 거부감, 국회프락치 사건 연루, 아들 자살, 의원직 사퇴서 제출 등 여러 사안들이 상대 후보들에 의해 부풀려지고 왜곡․악용되는 바람에 저조한 득표율은 당연했다.

<강진선거구 제2대 총선 입후보자 명단>

이름

(나이)

기호

주소

직업

학력 및 경력

소속정당 단체명

득표수

(득표율)

이희철

(41)

1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변호사

서울법전 졸, 지방법원 서기3년

무소속

567

(1.5%)

박두만

(39)

2

강진군․읍 남포리

 

공업

대졸, 경리회 이사

노농당

3,194

(8.8%)

차경모

(61)

3

강진군․읍 동성리

국회의원

한문 10년,

농회서기 20년,제헌의원

대한국민당

950

(2.6%)

정종실

(36)

4

강진군 성전면 성전리

농업

대졸, 성전중 교장 3년

무소속

5,967

(16.3%)

김용선

(61)

5

강진군 병영면 상낙리

농업

일본명치대 졸,병영면장 3년

민주국민당

8,516

(23.2%)

양병일

(41)

6

강진군․읍 남성리

변호사

중앙대 법과 졸, 한청광주시단장,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민주국민당

9,099

(24.8%)

김승식

(46)

7

강진군 작천면 군자리

상업

미 콜롬비아대 졸, 만주세관 세무과장 3년, 식산은행 이사

무소속

7,232

(19.7%)

김갑자남

(26)

8

강진군․읍 평동리

상업

대졸

대한노동총연맹

1,107

(3.0%)

 ※명단의 내용은 입후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임

 

 양병일 의원 “왜 아들을 낳지 못하느냐”는 어머니 핀잔에
“어머니는 제가 있지만, 제 집사람은 그마저도 없지 않습니까” 위로
  

민국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 등원에 성공한 양병일 의원(1910년생)은 강진읍 남성리 출신. 2대 총선 때 첫 금배지를 단 후 5대 국회 때 재선에 성공했다. 일본 주오대학(중앙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광주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한청 광주시단장과 5대 국회 당시,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양 의원의 2대 국회 이후 정치행적은 5대 국회 때 소개할 예정임)

양 의원을 비롯한 2대 의원들은, 임기 4년을 6․25 전쟁과 함께 했다.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욕이 만들어 낸 정치적 사건들까지 더해져, 말 그대로 임기 내내 ‘고난의 의정활동’을 했다. 

양병일 의원은 변호사 출신인데도 눌변이었다. 키도 작았다. 유세장 연단에 서면 항상 마이크보다 얼굴이 아래에 놓일 정도였다. 그러나, 인간적인 매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대단했다고 지역원로들은 증언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았다. 언젠가 양 의원의 어머니가 “왜 아들을 낳지 못하느냐”고 핀잔을 주자, 양 의원은 “어머니는 제가 있지만, 제 집사람은 그마저도 없지 않느냐”고 위로했다는 일화가 회자될 정도였다.

양 의원의 정치적 신념은 확고했다. 독재정권으로 변해가는 이승만 정권 앞에서 올곧은 정치철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동하다 이대통령에게 미운털이 박혀 국제공산당 연루혐의를 뒤집어쓰고, 52년 5월 26일 새벽 10여명의 동료 의원들과 함께 경찰에 구속됐다.

6․25 전쟁으로 부산에 임시 천도했던 이승만 정권은 1952년 7월 4일 국회를 무장경관들로 포위하고,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도입을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일명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발췌개헌(1차 개헌)’이란 친 이승만계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발췌하고 혼합했다고 해서 붙였다.

그러나 표면적인 의미와 달리, 이승만 대통령이 2대 총선 결과가 좋지 않아 간선으로는 재집권이 어렵게 되자, 강압적으로 직선제 개헌을 통과시킨 것을 말한다.

이승만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부산의 국회의사당을 경찰과 군인들로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을 강행했다.

개헌에 필요한 재적 3분의 2 이상 출석을 확보하기 위해 경찰들은 은둔중인 의원들을 수소문해 반강제적으로 데려오고, 군사 재판 중이던 의원들도 보석결정을 내리고 데려와 표결에 참여토록 했다.

표결 며칠 전부터 백골단과 땃벌떼 등 폭력조직이 관제 시위를 벌이고 신문사를 습격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구속 중이던 양병일 의원도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등원했다. 재적의원 179명중 166명이 출석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을 기립 표결한 결과,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으로 가결됐다.

이때, 양병일 의원은 끝까지 기립하지 않고 의연히 앉아 기권해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박순천 의원과 윤담 의원이 기권에 동조했다.

양 의원이 사상 유례가 없는 극한적 공포 속에서 실시된 표결에서 찬성 기립을 하지 않고 기권한다는 것은 정치적 소신과 배짱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양 의원은 53세 때인 1962년 9월 5일 서울 성모병원에서 입원치료 중 뇌출혈로 사망했다. /임영상 객원기자(정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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