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미 / 청운중학교 교사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영랑 김윤식의 고향인 강진에 오니 절로 시를 읊게 되었다. 사의재 앞 평상에서 하늘을, 별을 우러르니 일상에 지친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나는 농가체험을 위해 서울에서 5시간을 달려 온 지친 아이들도 이렇게 위로받았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북한도 무서워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중2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 녀석들이 낯선 장소에서 부모와 교사도 없이 처음 만나는 시골 어른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강진에 도착한 첫 날 저녁 아이들을 농가로 떠나보낸 후, 교사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의 불안이 기우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부랴부랴 찾아간 농가에서 만난 아이들은 웃고 있었고, 편안했다. 아이들이 고작 하룻밤 사이에 너무 극적으로 변하여 감탄과 함께 정말 얼떨떨했다.
불평과 거친 언어를 밥 먹듯이 쓰는 아이들에게 듣는 ‘좋아요’는 반가웠지만, 실은 믿기 어려운 긍정적인 단어였기 때문이다. 강진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보면서 무엇이 아이들을 이렇게 변하게 했을까 생각해보았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음식이었다. 산과 들과 바다가 있는 강진의 한정식은 재료들이 직접 나는 곳이라 더 신선하고, 맛도 으뜸이었다. 남도의 반찬은 어딜 가나 푸짐하고도 정갈했다. 아이들이 처음 이야기한 것도 농가로 흩어져 돌아간 후 낯선 집에서 받은 따뜻한 밥 이야기였다.
지천에서 난 톳이며 나물이며 빠지지 않는 게장이며…. 반찬도 많았겠지만, 한나절은 고았을 백숙, 새벽 조업으로 잡았을 요리며 반찬에 아낌없이 들어간 낙지 등 그 넉넉한 인심은 서울에서 새벽부터 달려 내려가 지친 몸과 마음을 든든히 채워주었을 것이다.
정성스런 음식이 곧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 사랑을 먹은 아이들이 한 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미 어머님, 아버님 또는 이모, 삼촌께 폭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안해하던 우리를 보고 강진군청에서 인솔해주시던 분이 그런 위로를 해주셨다. 아이들이 뭐가 제일 좋았냐 하면“엄마가 없어서 좋고, 선생님이 없어서 더 좋다”라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쉴 수 있어서 더 행복해한다고. 다음날 해맑아진 아이들 표정을 보고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인간의 행복감이란.
첫 날 저녁 배를 채우고 난 후, 아이들은 수련회의 단체숙소 방이 아닌 자기들만의 오붓한 방에 단짝 친구들과 있었을 것이다. 또래와 밤을 보내는 일은 얼마나 즐거웠을까. 밤에 자라고 외치는 ‘선생’도 없고,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부모’도 없었다.
내 집을 허락하고 아이들에게 시간을 허락한 넉넉한 ‘어른’만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은 방에 놓인 체스도 하고, 오목도 두고, 놀이도 하고, 못다 한 얘기도 실컷 하며 그 밤을 보냈고 아주 재미있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농가의 어른들은 아이들과 전통 윷놀이도 함께 하고, 바둑도 두셨다고 한다. 또 누구는 별도 보고 흐르는 물소리도 듣고 그랬단다. 어른과 함께 하는 저녁 시간은 아이들에게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우리 반 아무개의 아빠는 2주에 한 번 집에서 볼까말까 하다고 했다. 어른과의 좋은 시간. 안타깝고 그래서 더 고마운 시간이다.
다음날 아침은 또 어땠느냐면, 아이들은 평상시와 달리 실컷 게으르고 실컷 나태할 수 있어 정말 좋았다고 했다. 10시까지 푹 자고 일어난 아이는 그래서 서슴없이 이것이 수련회보다 몇 배나, 몇 백배나 좋았다고 했다. 수련회가 아니라 여행을 온 것 같다고 했다. ‘충분한 잠’이라니. 학교의 종소리에 따라 바삐 움직이고, 학원 숙제를 못해 가면 밤늦게까지 집에 못가는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수련’이 아니라 지친 마음을 쉬게 할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아이들이 또 맛있는 남도의 아침으로 그득히 배를 채우고 와르르 집밖으로 뛰어나갔을 것이다.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또는 갯벌이 펼쳐진, 닭과 막 알에서 깬 병아리가 고물고물 대는 마당에 나섰을 때. 흙길을 슬슬 걸을 때,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 속에 들어섰을 때나 광활하게 펼쳐진 차밭을 마주했을 때, 아이들은 얼마나 탄성을 질렀을까. 평소에 바쁘게 또는 무심히 지나쳤을 강아지에게 달려가 귀여워하고 지천으로 핀 꽃들에 물을 주면서 도시에서 채울 수 없는 자연이 아이들에게로 물들어갔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불쑥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과 함께 뱉는 아이다. 뭘 좀 하라고 하면 ‘왜요’ 하고 눈을 치켜뜨는 아이다. 3, 4, 5월 3개월 동안 지도가 되지 않아 담임을 그렇게 괴롭혔던 아이다. 나 역시 그를 그래서 그렇게 괴롭혔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이가 변화하는데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미안하고 또 너무나도 다행인 일이다.
어느 농가에는 평소에 마음이 거칠고 말투가 공격적인 아이 철수와 너무 샌님이라 아이들과 어울릴 거리가 없는 아이 영철이가 함께 있었다. 그런데 물을 한 바가지 들고 옷이 흠뻑 다 젖은 채로 뛰어다니는 건 바로 그 영철이고, 물을 맞으면서도 깔깔대는 건 철수였다.
내성적이고 얌전한 아이를 명랑하게 만드는 것도, 공격적인 아이에게 여유를 주는 것도 하룻밤이었다. 푸소 농가의 이모님께서는 우리를 보자마자 아토피가 있는 철수 얘기를 꺼내셨다. 그 아이의 편식 습관을 바른 소리 해주셨단다. 또 아토피에 좋다는 뱀딸기와 녹차 잎을 선물로 바리바리 싸주실 것이라 하셨다.
전날 밤 아이를 미지근한 물에 씻겨 약을 발라주셨으니 아이가 햇볕 속에 뛰어놀아도 가렵다고 불평하지 않았고, 친구들과 깔깔대고 있었던 것이다. 몸도 마음도 튼튼해지는 철수의 그런 변화는 고맙고 눈물겹고, 또 그래서 내 마음도 가벼워지는 시간이었다. ‘선생님 제가 너무 행복해졌어요.’ 철수를 만난 동료 교사의 소감이었다.
누구는 이모님이 싸주신 유부초밥을 들고 소풍을 간다했다. 줄줄이 줄맞춰 가는 유적지는 불평이 가득한데, 단짝들과 함께 가는 여행은 아주 즐거웠다고 한다. 오전에 백운동 정원을 한가로이 걸었을 뿐인데 정말 좋았다는 얘기, 친구들과 바닷가 낚시를 가서 복어를 잡고, 해파리를 건져 올렸다며 흥분한 아이들의 목소리, 사랑 플러스 구름다리에서 친구랑 사진 찍으며 감탄했다는 얘기. 학교는 더 이상 아이들과 소풍을 가지 않는다.
행사는 다 교육으로 바뀌고, 그나마 외부로 나가는 체험이 있어도 못 걷겠다는 아이들을 질질 끌고 다니느라 바쁘다. 아이들 불평이 나오기 전에 어서어서 걷게 하는데 누구는 아이스크림을 사먹는다고 하고 나는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고 싸우고, 그건 전쟁이다. 이런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다. 학교에는 여유가 없고, 여기에는 여유가 있었다. 아이들은 싸주신 점심을 맛있게 먹었고 친구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아이들을 위해 소풍을, 나들이를 계획하시는 분들의 마음은 일일이 다 감사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글을 적는 순간에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 전쟁을 치르지 않을 자신이 없다. 학교는 교사 하나당 맡아야 하는 아이들이 서른 명 가까이 되고, 개별적으로 나누어 프로그램을 진행할 여유가 없다. 행사는 또 다시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이 상상이 안 가는 일들을 해낸 강진군청의 대단함을 반드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어마어마해서 엄두가 안 난다.
이것은 학생들을 위한 너무나도 좋은 프로그램인 동시에, 강진이 가진 농촌과 어촌의 일상들을 관광 상품화한(마치 일본의 온천상품처럼 역사와 전통과 특색이 녹아난) 미래 지향적인 사업이었고, 강진군청이 군민들의 일상을 살피고 교육해내면서 넓은 지역의 외롭고 동떨어진 개개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단단히 결속시키는 훌륭한 정책이었다.
우리를 인솔해주신 최순철 팀장님은 농가의 어머니들 이름을 한 분 한 분 다 외우고 있고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찾아갔을 때 다들 버선발로 와서 맞아주시고(이웃이 아니라 군청의 공무원을 두 팔 벌려 맞아주는 모습이 상상이 가는가) 이 사업에 대해 강한 의지와 헌신을 약속하시는 것을 보면서 강진군이 군민과 하나의 유기체마냥, 그러니까 짱뚱어가 펄떡이는 그런 정도의 생명력이 있다고 느껴졌다.
기적에 가까운 이러한 일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질 높은(아이들이 그랬다. 선생님 이건 질이 높은 정도가 아니라 마술이에요) 내용을 선사했다. 글을 줄이고 싶으나 아직 좋았던 강진의 문화거리에 대한 건 한 줄도 못썼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바다 위를 걷는 듯한 가우도 출렁다리, 물수제비를 뜨고 게를 잡던 가우도 해안가. 아이들에게 바다를 선사한 강진만과 계단이 되어버린 나무뿌리들을 밟으며 오르던 다산초당, 석문산과 만덕산 사이에 걸쳐져 쓸데없이 장엄했던 이름도 멋진 사랑+ 구름다리, 월출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강진의 차밭과 영랑생가, 모란공원 그리고 우리를 쉬게 했던 정약용 선생의 고즈넉한 사의재까지.
이렇게 많은 명소들을 직접 데리고 가서 보여주셨던 어른들 덕에 아이들 깊숙이 강진은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 잡았다. 청자체험으로 ‘자기 꿈’을 쓰라는데, 강진이 최고라고 쓰는 아이가 심심치 않게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촌으로 배정되어 낙지 입하장에 따라가고 직접 살아있는 낙지를 잡아본(아마 생전 처음 어촌을 경험했을)그 아이가 강진으로 내려와 살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은 딱 내 마음이었다. 다시 꼭 오고 싶고, 시간을 내어 한참을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작별의 순간에 이모님들이 내 손도 꼭 잡아주셨다. ‘강진으로 다시 오세요.’ 정말 과분한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내가 말씀드렸어야 했다. 다시 오고 싶은데 허락 좀 해달라고. 또 내려오겠다고. 우리 학생들도 저도 꼭 좀 다시 부탁드린다고. 기적 같았던 사흘, 그림 같은 풍경과 따뜻했던 강진 군민들, 그리고 마법을 부리는 게 아닐까 의심되는 강진군청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