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 조선의 사화(士禍)만큼 잔인한게 없었다

지구상에 조선의 사화(士禍)만큼 잔인한게 없었다
강진·해남에 유학의 씨앗 뿌린 금남 최부
중국에 표류해 갖은 어려움 극복하고 6개월만에 돌아왔지만
1504년 갑자사화에 휘말려 극형...강진 덕호사에 배향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에 자리한 금남 최부의 묘이다.
탐진최씨 금남 최부(1454~1504)가 강진과 해남등에 유학의 씨앗을 뿌리며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학파를 형성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나주에서 태어났지만 해남의 정씨에게 장가들면서 주로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했다고 한다.

최부의 외손자인 대유학자 유희춘은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윤효정, 유희춘 자신, 유계린등을 가르치면서 해남이 확 바뀌었다’고 적었다. 최부가 이 지역에 미친 학문적 영향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효정은 윤행·윤구·윤복 등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리던 고관들이었고, 그 후손으로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는 명문의 학문가를 이룩했다. 유성춘·유희춘 형제는 금남의 외손자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최부의 제자들이 해남과 강진일대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금남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바로 우리지역 유학의 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최부의 인생의 큰 고비는 1487년에 찾아온다. 1487년 부교리(종5품)라는 벼슬을 하면서 그해 9월에 제주지역 추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 추쇄경차관은 제주도에 도망가 있는 죄인들을 잡아드리는 임무를 가진 직책이었다. 그런데 그해 12월말 나주에서 갑자기 부친의 부음소식이 전해온다.

최부는 다음해 정월 초 3일 겨울바람을 마다하지 않고 상복을 차려입고 일행 43명과 함께 해남을 향해 뱃길에 오른다. 그때는 강진과 해남이 제주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오면서 배가 망망대해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표류는 장장 10일 동안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긴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과 첨예한 갈등을 겪는다. 최부는 그때마다 유학자 답게 원칙을 견지하면서 뱃사람들을 설득하고 희망을 갖게한다. 그렇게해서 바람에 떠밀려 도착한 곳이 중국 절강성 영파, 지금의 상해와 가까운 곳에 표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새로운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적으로 오인받아 죽을 순간도 있었다. 해적을 만났을 때는 주변사람들이 조선의 벼슬아치임을 보이기 위해 상복을 벗고 관복을 입을 것으로 권장했지만 최부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한 것이 드러나면 반드시 의심을 살 것이니 언제나 정도를 지켜야 한다”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

최부는 육로와 대운하를 따라 중국대륙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파에 도착한지 70여일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최부와 일행은 북경에서 황제가 하사한 선물을 받는다. 중국측인사는 대영광명이라며 상복을 벗고 황궁으로 가서 감사의 절을 할 것을 요청한다.

최부는 상복을 벗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대궐에 들어갈 때만 잠시 상복을 벗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길복을 입는다. 최부는 북경에서부터는 호위를 받으며 동행인 43명과 함께 6월 14일 그리운 조국 조선땅으로 돌아왔다. 제주를 출발한지 5개월 12일만의 일이었다. 최부는 표류기간과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일기형식으로 꼼꼼히 기록해 ‘표해록’을 남겼다. 

최부는 이렇듯 망망대해란 극한 상황에서 풍파와 시련을 이겨내고, 낯선땅 중국에서 꿋꿋한 조선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정쟁만큼 무서운게 없었다. 그렇게 고생하고 살아 돌아온 최부였지만 연산군 10년(1504)인 갑자사화때 김종직의 계파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극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51세때 일이였다. 강진 덕호사에는 최부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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