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꼬창이 끝에 오는 무덤속 청자의 감촉, 그 희열 누가알까”

강진의 청자요지는 일제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외부에 알려진 후 도굴꾼들의 집중적인 공략의 대상이 됐다. 사당리와 용운리등 가마가 집중돼 있는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60년대에 청자 수집상들이 수시로 마을로 찾아들었고, 이런저런 그릇이나 파편들을 엄청나게 주워갔다. 주민들은 청자의 중요성을 거의 모를 때이다. 무덤을 탐색하던 도굴꾼들도 많았다.

동아일보 1970년 11월 6일자에는 서울 인사동에 전국의 호리꾼(도굴꾼)들이 4~5천명에 달하고 있다며 이들의 주 무대는 요지가 있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고부등은 물론 경주와 부여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 호리꾼과의 인터뷰 내용이 재미있다. 이 사람은 “쇠꼬창이 끝에 오는 감촉으로 무덤속 골동품을 찾아내는 호리꾼의 희열은 알피니스티의 정상정복에 비길 만큼 감격적이다”고 씨익 웃었다고 한다. 호리꾼들의 노다지는 옛날의 공동묘지이던 ‘모다지’란 장소였다. 모다지가 한번 나타나면 인근 도굴꾼들이 총동원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덜을 냈다.

고려청자는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해서 사당리나 용운리 주민들로부터 오랫동안 버림을 받았다. 도굴꾼들은 그런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까. 강진의 청자나 청자편은 얼마나 많은 양이 도굴됐을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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