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지인의 요청으로 마을과 인연 시작
10여년간 터잡고 용정 주민들과 교류
작천면 일대, 영암 일부서도 제자 찾아와
마을주민들에 사서삼경 등 지도해줘
나는 작천면 용정마을 출신으로 지금까지 43년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했다. 지난 1995년 정년으로 교직생활을 마무리한 뒤로 용정마을에서 줄곧 살고 있다. 어려서부터 우리 용정마을에는 뛰어난 한학자도 많고 마을의 자랑인 효자비도 있다.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는 반증이다.
우리 마을에서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 배출될 수 있었고 부모님과 마을어른을 공경하는 효심도 깊은 사람들이 많을 수 있었던 데는 마을에 뛰어난 스승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바로 신묵재 김귀성 선생님이다. 요즘은 초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됐지만 내가 교직생활을 하던 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 첫 근무지로 영암 구림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주로 영암지역의 학교에서 생활했다. 정년퇴임 직전에는 고향인 강진 성전국민학교로 돌아와 교직생활을 무사히 끝냈다.
이처럼 나 자신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롤모델과 같은 분이 바로 신묵재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일제시대때 뛰어난 한학자셨다. 본래 고향은 화순 청풍면이지만 작천 용정은 선생님의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마을출신중 한분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용정마을을 찾아와 사람들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신묵재 선생님은 고향 어르신의 유언에 따라 작천 용정마을을 찾아왔다. 당시에는 마을앞에 드넓은 농토가 펼쳐져 있었고 뒤에는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산이 있었다. 이처럼 수려한 풍광에 반해 선생님은 마을에 터를 잡으셨다. 마을사람들을 지도하러 오신 선생님을 마을사람들은 환대해주었고 마을내에 거처도 마련해주고 음식도 나눠줬다.
당시에 신묵재 선생님이 용정마을에서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문이 나면서 용정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작천면 인근의 박산, 죽연마을에서 신묵재 선생님에게 배우기 위해 마을을 찾아왔고 멀리떨어진 영암의 모정마을에서까지 용정마을을 찾아오기도 했다. 선생님의 정식 제자는 15명이지만 실제 선생님에게 배운 사람들은 30명이 훨씬 넘었다.
신묵재 선생님은 뛰어난 한학자셨지만 공자님의 말씀을 잘 따르셨다. 첫닭이 우는 새벽에 일어나 상투와 도복을 가지런히 하고 제자들을 맞을 준비를 하셨다. 이렇게 반듯한 옷차람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변함이 없었고 잠자리에 들때가 되서야 옷을 벗었다.
훌륭한 한학자셨지만 누구보다 제자들에게 따뜻했던 스승님이기도 했다. 제자들에게 별도의 수업료도 받지 않으셨고 궁금한 것이 있는 제자들에게는 꼼꼼히 답을 해주셨다. 선생님에게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사서삼경을 배웠고 이따끔씩 삼국지를 함께 읽기도 했다. 삼국지외에 소설책을 읽는 것은 좋지 않다며 보지 못하게 하셨다. 10여년동안 마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실 때에는 마을주민들 모두가 슬퍼하며 붙잡기도 했다.
선생님의 고향인 화순 청풍면에는 선생님을 모신 사당이 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현재까지도 고향에 있는 사당에 용정마을 주민들이 직접 찾아가 제사에 참석하고 있다. 요즘도 동짓달 열하룻날이 되면 청풍면을 찾아간다.
선생님이 마을에 남긴 것은 많은 제자들도 있지만 근고정이라는 마을정자의 명칭도 지어주셨다. 근고정은 일제시대에 용정마을이 우리의 옛 풍습을 잘 지키며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아 지어주셔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생님이 용정마을에서 사는 동안 누구보다 마을주민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따른 덕분인지 마을내에 효자비도 세워질 만큼 어른을 공경하고 우리의 옛 풍습을 잘 지켜가는 마을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에 마을주민들은 선생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신묵재 선생님과 15명의 제자들을 모신 숭의단이라는 단을 만들었고 매년 음력 3월 7일이면 마을주민들이 의복을 갖춰입고 제를 지내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풍습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길 바라고 신묵재 선생님이 모셔진 숭의단이 지붕도 없이 방치되고 있어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