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정치인가...아쉽다   그러나 희망을 찾고 싶다
3선 군의원→ 아내 암 사망→ 자신도 위암 수술→ 지금은 야인생활
후배 군의원들에게... 정치 열심히 해라, 가족도 잘 돌보라


“민주주의는 후퇴해서는 안될 일,
지방 정치인으로서의 삶 고달프지만 보람있었다”

초창기 지방자치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세월
지금은 의원들에게 많은 기회가 있다
지역발전위해 게으름없이 뛰어라


20대 초반에 김대중 선생을 만났다. 1971년이다. 7대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선생을 위해 지원유세를 했다. 그렇게 정치에 발을 내 들였다. 야당의 길이었다. 1991년에는 초대 군의원에 당선돼 본격적인 의정활동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마량에서 3번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2012년 여름. 정치를 시작한지 40년. 이제 65세가 됐다. 군의원은 2006년에 그만뒀다. 재산이라곤 거의없다. 동갑내기인 부인 우정순여사가 지난해 8월 갑작스럽게 암선고를 받고 세상을 떴다. 그리고 네 달. 자신은 위암판정을 받았다. 수술을 했다. 혼자 남았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위암 수술환자에게 안정이 최고라고 하지만 밤이면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후회가 너무 크다.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했나.

윤흥오 전 의원은 원래 여수사람이다. 20대 초반에 장사를 하기 위해 마량에 와서 정착했다. 마량여자와 결혼도 했다. 그때는 재산을 꽤 모았다. 정치라는 것을 알면서 버는 것 보다는 쓰는게 많아졌다. 야당 생활이라는게 그랬다. 정치적 탄압이 다반사였다. 사업이 어려워졌다. 어느때 인가 사업을 접었다. 직업 정치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직업정치라는게 돈버는 일이 아니였다. 그는 항상 야당쪽에 서 있었다. 지구당 사무국에서 조직관리와 사무부국장등을 하며 김영진 전 의원을 도왔다.

80년대 평민당 시절은 정치인으로서 참 흥분의 시기였다. 노랑깃발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88년 군부독재의 탄압과 물량공세를 이겨내고 김영진의원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때는 정말 정권교체가 눈앞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이 정권을 잡은게 97년이다. 88년 국회의원을 당선시키고도 10년이란 세월 후에 정권은 교체됐다.

1991년 30여년만에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했다. 중앙정부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자방자치였다. 지방자치는 야당이 여당을 상대로 집요한 정치공방속에 획득한 전획물이었다. 그는 마량에 출마했다. 각 읍면에 1명씩 군의원을 뽑던 시절이다. 결과는 당선이었다. 

정치대로가 평탄하게 열리는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외지에서 왔지만 막걸리도 많이 샀다. 똑똑하고 말도 잘했다. 야당생활하며 고생도 많이 했다. 돈 욕심도 없다. 저 사람은 당연히 정치를 해야 할 사람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20여년 동안 재야에서 뭍혀 있던 사람은 오랫 동안 움크리고 있던 개구리와 같았다. 그는 몇몇 의원과 함께 군과 정치권, 주민을 연결하는 중심에 서 있었다. 

1991년 4월 15일 초대군의회가 열린 날 군의원들과 군관계자들이 군청정문에서 현판식을 하고 있다. 좌측에서 두번째가 윤흥오 의원이다.<사진=강진군정 50년사>
그러나 초대 군의원이라는게 참 힘들었다. 선배의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곳의 사례가 있는 것도 아니였다. 오직 맨몸으로 부딪혔다. 의원들에게 대한 권한도 미미했다. 감사권이나 자료제출요구권등이 있었으나 공무원들이 의원들의 요구를 우습게 생각했다.

의원들이 이것은 저렇게 고쳐야 한다고 요구하는게 먹혀들지도 않았다. 오직 군수와 과장들의 지시만 통용되던 시기였다. 30년 만에 쟁취한 지방자치였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일방통행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국회도서관등을 오가며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전례는 국회에 있었다. 질문하는 방법, 자료요구하는 요령, 질문을 확인하는 절차등을 국회도서관에서 체득했다. 참 바쁘게 살던시기였다. 군정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보며 이게 군의원의 재미구나 하는 기쁨도 누렸다.    

그러다가 시련이 찾아왔다. 강진만 어장정리사업에 잘 못 관여 했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참 억울했다. 당시 어장정리사업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이였으나 몇몇 사람들이 복잡하게 연류되면서 사건이 커졌다. 큰 시련기였다. 그때 다짐했다. 앞으로 정치인으로서 돈과 관련된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 그게 당시 다짐이었다.

그는 2대를 쉬고 98년 3대 군의원에 다시 당선됐다. 2002년에도 다시 주민들의 신임을 얻어 3선에 성공했다. 주민들과 보통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어려운 3선이었다. 

기억에 남은 군수들이 있다. 31대 군수를 지냈던 문병일(91년 7월~93년 3월) 군수때였다. 일본에 의원연수를 갔는데 마을 간이 쓰레기장 옆에 작은 창고를 지어 현장에서 분리수거를 한 다음 재 활용용품은 건물에 보관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귀국해서 문군수에게 마량쓰레기장 옆에 간이창고를 하나 짓자고 건의했다. 당시에는 쓰레기 재활용이란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문군수가 선뜻 그렇게 하자고 했다. 나중에 쓰레기장 옆에 작은 창고가 들어섰고, 강진에서 최초로 재활용이 시작됐다. 작은 요청을 크게 생각하는 문군수의 판단력이 새삼스러웠다.

또 99년이였다. 지금의 국민체육센터 실내체육관을 지을때의 일이다. 당초 설계가 800석 규모로 나왔다. 군의회에서도 이 안이 통과됐다. 그런데 다른 지역 사례를 보니 모두 1천석~1천500석 내외였다. 그정도는 되어야 실내체육관 구실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윤영수 군수를 설득했다.

군비를 더 투입해서라도 자리를 늘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군의원들에게는 비록 의결을 했지만 다시 검토를 해서 규모를 넓히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게 현재의 2002석 규모의 실내체육관이다. 체육관 규모는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지만 지역의 미래를 위해 다시 검토를 해 준 윤영수 군수의 판단력이 돋보인 일이었다.

그는 의정 활동을 잘하는 군의원이었다. 군정질문을 참 잘했다. 자료를 많이 준비해서 누구나 수긍하는 질문을 하려고 노력했다. 당하는 공무원들도 고개를 끄떡였다. 재선과 3선을 하는 동안 몇차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합법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과감히 그런 것을 물리쳤다. 돈과 관련된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는 다짐이 그를 지켰다.

그러나 햇볕이 강하면 그늘도 짙었다. 좋은 군의원, 깨끗한 군의원, 좋은 정치인이란 소리를 듣는 동안 가정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 졌다. 군의원 월급을 받았으나 애경사비에 쓸 것도 부족했다. 생활비를 보태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가정은 완전히 부인에게 맡겨졌다.
 
아들 둘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런 세월이 20여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가족중 그런 아빠에게 불평한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누구 탓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학생운동을 했던 작은 아들은 아빠의 일에 적극 박수를 보냈다.

2006년에는 군의원 출마를 포기했다. 어느덧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할 시기가 돼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군의원 선거를 준비하기가 벅찼다. 12년 동안의 군의원 생활을 접는 것은 섭섭했지만 한편으로 시원했다. 바람처럼 지나간 세월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암 선고를 받았다. 지난해 7월의 일이었다. 가정 생활에 관심을 기울였던게 군의원을 그만두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나 돈 없으면 어느것 하나 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갑자기 사업을 한다고 나설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그 역시 돈이 필요한 일이였다.

지난 30여년 동안의 정치역정을 되돌아 보며 내가 뭘 했나하는 후회도 참 많이 했다. 그러다가 아내의 암선고를 덜컥 접했다. 하늘이 캄캄했다. 이제부터라도 잘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소원조차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내는 암선고를 받은지 한달 반 만인 8월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도 큰 아픔을 겪었다. 지난해 11월 위암 선고를 받았다. 12월 부분 위 절제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된 암이였다. 고통은 겹쳐서 오는 것이었다. 삶이 이렇게까지 힘든 것일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윤흥오 전의원은 후배의원들에게 정치를 열심히 하라고 권장했다. 군의원은 단순한 선출직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자리였다. 주민들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을 항상 지니라고 후배의원들에게 충고했다.

요즘에는 군의원들이 의정활동하기에 참 좋은 시대가 됐다.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있으니 의원들이 맘만 먹으면 접근이 어려운 문제가 없게 됐으니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정치를 한다고 해서 가정을 놓쳐서는 안될 일이다. 후회하면 늦은 일이었다. 가정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 윤흥오 전 의원에게 정치도 가족도 어느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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