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였던 제주도, 이주한 호남사람들의 손으로 개발됐다

60~70년대 가뭄으로 고향 떠나 제주로 이주
가뭄은 농업뿐만 아니라 제조업에도 영향미쳐

행정구역상으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해당되는 사라봉 부근.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즐비하지만 70년대 초반까지 전라도동산이라는 호남인 집단거주 마을이 있었다.
갑자기 태풍이라도 불어 몇일씩 배가 묶여버리면 벽파진은 그야말로 사람의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벽파진에 오면 바로 제주행 배에 올라탈 요량으로 음식이나 여비를 준비해 온 사람들이 며칠씩 발이 묶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처지가 됐다.

사람이 많으면 돈이 있어도 잠을 잘 방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너댓평 남짓의 여인숙방에 30~40명의 손님들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좁은 의자에서 몸을 움츠리고 잠을 청하는 모습이 다반사였다.

강진사람들이 벽파진으로 갈 때는 배를 타고 가기도 했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장흥이나 강진에서 출발하는 배가 있었다. 이 배는 완도 군외면 앞바다를 거쳐 해남 지산면을 통과해 벽파진에 도착했다고 한다. 또 완도~벽파를 왕래하는 명신호라는 배가 있었다. 지금은 완도에서 배를 타면 쉽게 제주로 갈 수 있는 일을 당시에는 배를 타고 한참을 올라와 제주로 내려갔던 것이다.

60, 70년대 제주로 이주했던 전남 출신 향우들은 가뭄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이가 아주 많이 된 주민들은 60년대 중반에 큰 가뭄을 겪고 나서 들어왔고, 그보다 나이가 덜 된 사람들은 68년부터 3년 동안 계속된 가뭄이 사람들을 섬으로 들어오게 했다고 했다. 또 77, 78년 가뭄 때 고향을 떠나 제주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다.

60, 70년대 대규모 이농현상에 대해 여러 정치, 경제학적 분석이 있지만 주민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징그러운’ 가뭄이다.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이농을 강요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지만 가뭄은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야겠다고 작심하게 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67년부터 78년까지 12년 동안 1967년, 1968년, 1976년, 1977년, 1978년 등 다섯 차례의 큰 한해를 입었다. 1967년 8,9월 동안에는 호남지역에서, 1968년 6, 7월에는 호남과 영남에서 예년 강우량의 20~30% 정도밖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60년 만에 겪는 가뭄이었다.

가뭄은 농업에만 피해를 준 게 아니었다. 전남일보 8월 3일자 사회면을 보면 ‘불타는 대지’라는 연속 시리즈 기사에 2일 현재 전남도내 생산기업체의 절반 이상이 공업용수가 없어 조업을 중단했고, 광주시내 상가가 상당수 철시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 전남지역 최대 제조업체였던 호남비료공장이 7월 18일부터 조업을 완전히 중단해 당시 돈으로 하루 700만원씩의 손해를 본다고 했고, 역시 굴지의 업체에 속했던 전남제사는 하루 400리터의 수돗물을 써야 하지만 물이 없어 3일부터 완전히 조업을 멈춰야 했다.

가뭄의 불똥은 수산업으로도 튀었다. 역시 전남일보 8월 2일자에는 목포 앞바다에 빈 고깃배만 둥둥 떠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계속된 가뭄으로 육지의 유기물질이 바다로 흘러들지 않아 부유생물의 먹이가 없어지고, 바다의 염도가 높아지면서 고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당시의 기록적인 가뭄이 농업은 물론 공업, 상업, 수산업 등 전 산업을 초토화시켜 사람들을 고향에서 떠나도록 등을 밀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0년대말 이농은 정부의 계획된 이농정책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해 심각해진 농촌의 피폐화 현상이 농민들을 농촌에서 밀어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으로 보인다. 68년 대 한해는 8월 25일 호우가 내려 해갈됐다.

60년대 이후 제주 개발 붐 일어, 이주 가속화
호남 이주민들 맨손으로 막노동하며 개발 동참

아름다운 제주항의 모습.
68년 양곡수매상황을 보면 당시에 얼마나 수확량이 감소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강진군의 경우 당초 추곡수매 일반매입 목표량이 3천464M/T이었으나 실적은 101M/T를 수매하는데 그쳤다. 목표량의 2.9% 수준에 그친 것이다.

강진이 이 정도였던 것을 감안할 때 간척답이 많은 해남과 영암, 산간 천수답이 많은 구례, 곡성 등지의 피해는 얼마정도였을지 상상하고도 남을 정도다.

이같은 와중에 1974년 8월 말 전남지방에 50년 만에 대홍수가 발생해 6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농경지 1만여 정보가 침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또 1976년에는 전국적으로 7월 강우량이 예년에 비해 40%에 못미쳤고, 1977년 6월 중순 이후의 강우량은 전국적으로 ‘0㎜’에 가까울 정도였다.

강진은 강진읍 장동마을과 신전면 수양리, 옴천면 영산리, 칠량면 계치마을 등이 가뭄을 가장 심하게 타는 곳이었다. 이 일대는 80년대 초까지 저수지가 거의 없었다. 농촌에서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농이 시작됐다.

매년 반복되는 한해는 농촌생활이 지겨울 정도로 농민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강진지역은 지난 1967년 인구가 12만7천170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다가 68~70년까지 3년 동안 9천353명의 인구가 감소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간은 1만793명이 역시 줄어들었다.

두 기간 모두 3년 단위 인구 감소폭으로 가장 큰 규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75년부터는 매년 1만명 이상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75년 한해 동안 1만6천903명이 전출했고, 76년에는 1만1천781명이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 전출인구는 1980년에 1만3천629명으로 최고를 기록했다. 83년에는 1만3천30명에 달했다.

제주사람들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마을별로 뭉쳐야 했고, 서로 의지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외부의 침략을 받았고,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난리를 수차례 치러야 했다. 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는 새로운 변화를 하게 된다.

60, 70년대 전남지역 농촌이 극심한 불황을 겪었던 시기라면 제주도는 막 희망이 싹트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제주지역 여기저기에서 개발의 붐이 일어났고 제주지역 최대 농산물인 귤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시기였다.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섬지역이었던 제주도의 인구는 한정돼 있었다.

제주도는 1960년대 초반부터 60년대 말까지 각종 건설사업과 관광개발로 전입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늘기는 했다. 10여 년 동안 이사 오는 사람이 이사 가는 사람보다 1만7천400여 명이나 많았다. 그러나 1970년~1975년까지 많은 인구유출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제주도로 전입해 들어오는 인구는 2만50명이었으나 나간 인구가 3만4천48명에 달했다. 5년 동안 나간 사람이 1만3천900여 명이나 많았다. 전남지역 등에서 사람들이 ‘희망의 땅 제주’를 향해 물밀듯 들어올 때 제주사람들은 더 나은 곳을 향해 떠났던 것이다.
 
60, 70년대 제주에서 개발 붐이 일 때 가장 힘든 노동을 담당할 만 했던 현지 토박이들이 너도나도 육지행을 결행했던 것이다. 그 일들이 나중에 제주도로 들어간 호남사람들의 몫이었다.

제주의 개발은 196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개발계획과 발맞춰 시작됐다. 1963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건설개발연구위원회’가 설치돼 1964년 건설부 주관으로 측정지역 지정 겸 건설종합개발계획을 위한 조사가 실시됐다.

1966년부터 제주도가 특정지역으로 지정돼 산업이 개발되고 용수, 도로, 동력 등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됐다. 1970년에는 ̒제주도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이 수립돼 제주도를 국제적 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한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지역사업을 국가적 우선 순위에 반영하게 됐다.
 
이어 1973년에는 ‘제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돼 9년간에 걸쳐 집중적인 개발사업이 진행됐다. 1973년~1982년까지 제주지역에 투자된 돈이 3천116억3천7백만원에 달했다.

제주지역의 1962년 총생산액은 36억3천만원이었으나 1979년에는 2천739억7천만원으로 약 75배로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주민 1인당 소득은 1만2천385원에서 59만9천519원으로 48배가 불어났다. 이같은 증가세는 1979년을 기준으로 경남, 부산, 경기, 경북 다음으로 전국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주민총생산 규모로 보면 제주도가 70년대에 얼마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는지 알 수 있다. 1970~1978년까지 우리나라 연평균 성장률은 10.2%였다. 제주도는 이 기간동안 12.8%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경기도 27.7%, 경남 14.8%, 부산 14.5%에 이어 전국 4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전남의 연평균 성장률은 8.3%, 전북은 6.6%였다.

월평균 임금수준도 육지를 앞섰다. 197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산업의 월평균 급여를 100으로 봤을 때 제주도는 110이었다. 이는 강원도의 119보다 뒤지는 것이었으나 경북과 함께 2위의 수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각 항구의 물동량도 폭증했다. 제주항을 통해 이뤄진 제주~목포, 제주~부산간 여객선 여객 수송규모는 1972년 31만5천 명에서 1979년 71만5천 명으로 늘어났고, 화물수송은 1972년 9만6천800톤에서 1979년 16만6천 톤으로 증가했다.

건설자재의 핵심으로 꼽히는 시멘트 입하량을 보면 1975년 7만9천톤(제주항 5만9천 톤. 서귀포항 2만 톤)이던 것이 1979년에 22만6천 톤(제주항 17만4천 톤, 서귀포항 5만2천 톤)으로 4년 동안 세배 가까이 늘어났다. 시멘트가 이 정도 일 때 다른 건설자재와 기타 여타 산업원료의 유입도 함께 폭증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주의 관광객은 1970년 24만4천여 명에서 1984년 121만7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제주의 관광객은 1995년 399만 명에 이어 2004년에는 660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오는 2010년에는 920여만 명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농업구조도 확실하게 바뀌었다. 1961년 총 재배면적의 94.1%를 차지해 자급적 농업을 대변하던 식량작물의 비중이 1982년까지 46.7%로 급감했다. 식량작물의 생산량도 85.8%에서 31.7%로 떨어졌다.

대신 특용작물의 재배면적이 크게 늘어나 감귤의 재배면적은 1961년 0.3%에서 1982년 21.6%로 늘었고, 생산량도 0.3%에서 47.9%로 급증했다.

제주 감귤산업의 발달은 눈부시다. 61년 서귀포를 중심으로 63정보에 불과했던 감귤밭은 1969년 3천126정보로 불어났고, 1972년도에는 6천955정보로 폭증했다. 1975년에는 1만930㏊가 1984년에는 1만6천900㏊가 됐고, 2004년에는 2만2천㏊로 증가했다.

제주는 80년대 초반부터 감귤의 과잉현상이 나타났고 요즘도 감귤밭 줄이기 운동을 하고 있다.
어쨌든 서귀포를 중심으로 들어섰던 감귤밭은 제주사람들에게 부를 안겨다준 황금알이었다. 70년대 초반에는 실제로 귤나무 5~6그루만 있어도 대학생 한 명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였다.
 
제주 서귀포 강진향우회 회원들의 말에 따르면 장상주 전 서귀포시장은 지난 2005년 12월 재 서귀포 호남향우회에 참석해 “나는 호남사람들이 제주에 기여한 것을 크게 두가지로 생각한다. 호남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제주의 감귤산업은 생각도 할 수 없다.

또 호남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제주의 음식문화가 이 정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참석자들은 장 시장의 이 말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어 열매를 맺게하는 실제 중노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일생일대의 자부심이었다.

제주땅은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 감귤밭을 늘려가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화산석 투성이의 돌 반 잡목 반의 황무지에서 돌을 치워내고 잡목을 베어내면서 하루 몇평 정도의 땅을 늘려가는 역사였다.

이렇듯 제주에서 수륙양면에 걸쳐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호남사람들은 제주에 도착했다. 그들이 간 곳은 제주의 가장 아래층이었다. 정부가 제주를 국제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가장 먼저 추진했던 것은 항만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개발이었다.
 
곳곳에 막노동을 할 수 있는 일터가 터졌다. 제주의 관문 제주항은 십여 년 이상 날품일터가 끊이지 않았다. 제주에 도착한 호남사람들은 노가다로 표현되는 이런 막일터를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찾아갔다.

제주항에는 서귀포에서 재배된 감귤이 육지로 운송되기 위해 줄을 지어 도착했다. 당연히 짐꾼이 필요했다. 제주에 들어온 호남사람들은 상당수가 제주항 주변에 모여살며 매일 지게꾼 일을 했다. 

육지 사람들은 60년대 황룡호에 올랐던 사람들과 그들의 한을 모두 잊어가고 있다. 지금 전라도에서 건너간 10만여 명의 사람들이 제주에 살고 있다. 2세, 3세까지 합하면 15만이 넘는다.

그 시절 육지사람들이 가난에 못이겨 가족 친지들을 섬으로 보내야 했다면 30년이 지난 지금 이제 그들에게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됐다. 제주의 호남인들이 갖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은 서울이나 부산 등지 호남인들의 그것과 또 다르다.<끝>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