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과 일본의 지볼트는 표류인들이었고 강진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하멜은 월급받기 위해 표류기 작성
폐쇄된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알려

해양문학의 효시로 평가받는 표해록을 쓴 장한철이 표류했던 곳으로 보이는 청산도 당리 전경.
하멜일행은 네덜란드에 돌아가서도 같은 요구를 했으나 대답은 ‘밀린 월급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작성한게 ‘하멜표류기’다. 조선에서 억류과정을 소상하게 밝혀 월급을 받는데 유리한 자료를 제시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하멜일행은 암스테르담 동인도회사 본사에서 하사금형태의 2년치 월급을 받는데 그쳤다고 기록이 전해 온다.

하멜의 표류기는 원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 책은 ‘폐쇄된 조선’을 서양에 알린 최초의 책으로 기록되며 오늘날까지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하멜표류기’가 없었다면 하멜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정사에서나 몇 줄 보게되는 작은 역사로 남게 됐을 것이다.

1666년 하멜이 여수를 탈출해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한 162년 후인 1828년 3월, ‘일본의 하멜’로 추앙받고 있는 지볼트란 네덜란드 사람이 나가사키 표류민 수용소에서 강진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을 만났다. 의사였던 지볼트는 일본에서 ‘지볼트 학회’가 구성돼 있을 정도로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지볼트가 강진사람들을 만나 나눈 대화는 당시 강진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함께 지볼트의 저서 ‘일본’에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지볼트의 저서 ‘일본’에 소개된 조선사정은 하멜표류기 발간이후에도 여전히 쇄국정책을 고수했던 조선을 서양에 아주 구체적으로 알린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두 사건에는 재미있는 공통점들이 있다. 하멜이 총 14년의 조선억류 기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은 강진 병영이었다. 하멜표류기 속에 강진에서의 억류생활이 구체적으로 서술된 것은 물론이다. 어찌보면 하멜표류기의 중심무대는 강진 병영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유적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도 강진 병영이다.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표류기’는 강진의 냄새가 흠뻑 베어있다. 지볼트의 ‘일본’속에 설명된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을 통해 한글의 기본형태와 조선의 문화, 조선인들의 골격, 조선의 지리 등을 파악해 ‘아직도 여전히 쇄국정책이 진행중이던 조선’을 서양에 알렸다.

지볼트의 책이 발간된 이후 서양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이를통해 조선이 본격적인 개화기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상당수 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우리나라를 서양에 알린 두 사례가 모두 표류와 연관이 있고, 무엇보다 강진과 강진사람들이 깊게 관련됐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심도있게 평가돼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표류인들은 이처럼 문명을 전파하는 외교관 이었으며, 서남해안 끝부분에 위치한 강진은 지리적으로 표류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사는 하멜의 흔적만을 기억해 왔다. 하멜이 갖는 상품성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 하멜은 더욱 뜨는 관광상품이다. 강진 병영에는 강진군이 31억 원을 들인 하멜 전시관이 들어섰고 하멜이 우리나라를 탈출한 곳인 여수시에서는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P.아이슬스 시장 등이 2007년 12월 방문해 호르큼시가 직접 제작한 하멜 동상 제막식을 가지기도 했다.
 
또 하멜이 처음으로 표착한 곳으로 알려진 제주특별자치도 남제주군은 지난 2003년 하멜표착 350주년을 기념해 용머리해안이란 곳에 하멜기념관을 세워 운영하고 있고 하멜의 고향인 호르큼시도 현지에 하멜기념관을 세운다는 소식이 있다.

이제 우리도 표류의 역사를 하멜 중심에서 벗어나 우리조상들의 이야기로 범위를 넓힐 때가 됐다. 이는 지리적으로 표류와 깊은 연관을 가져 온 강진군의 큰 자산이다.

우선 학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는 표류를 연구하는 학자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표류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치단체가 장을 마련하고 학술대회 등을 열면 관심을 갖는 학자들도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이나 중국 현지에서 표류 흔적들을 발굴해 내는 일도 필요하다. 기자가 일본 오도열도를 취재하면서 우연히 만난 조선사람들의 무덤자리는 아무런 관심도 못받고 있었다. 그렇게 숨어있고, 방치돼 있는 표류의 역사가 차근차근 밝혀져야 한다.
 

표류인들의 역사 활용 관광자원화 가능
강진의 미래를 밝혀줄 부가가치 잠재

제주로 가는 길목인 진도군 벽파진항.
우리조상들이 표착한 현지에 기념물을 세우는 일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여수의 하멜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아이슬스 호르큼시장은 “바다와 하멜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여수와 호르큼시간의 교류 협력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좋겠다.
 
바다를 주제로 한 여수세계박람회가 2012년 여수에서 개최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여수는 2012년 세계박람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네덜란드는 이처럼 하멜을 국제외교의 큰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도 나가사키 표류민 수용소 자리에 기념비라도 세워야 할 일이다. 나가사키에 조선시대 평상복을 입은 강진 사람들의 동상이 세워진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표류민들의 동상은 관광도시인 나가사키의 큰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현지에서 하멜의 동상이 대한민국의 여기저기에 세워지고 있는 마당에 강진사람들의 동상을 일본에 세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같은 일들을 통해 강진이 표류문화의 실질적인 중심지로 거듭나는게 궁극적인 목표다. 하멜의 경우에서 보듯이 표류가 갖는 관광적 매력은 대단한 것이다. 표류는 신비로움과 안쓰러움, 모험심 등이 뒤섞이며 현대인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하멜이 강진에서 각광 받기까지 민선1기 지자체에서부터 10여년이란 세월이 소요됐다. 그 전에 하멜은 한낱 역사적인 인물에 불과했다. 강진에서 청자가 다시 태어나기까지 70년대초반부터 20여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오랜 세월 동안 청자만큼 관심을 받지 못한 것도 없다.

장보고가 완도에서 다시 떠오르기까지 80년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운 노력이 있었다. 그때까지 청해진의 본거지인 장도는 잡초만 무성한 무인도에 불과했다. 지금부터 강진에서 표류의 역사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 진행되면 10년 후에 어떤 부가가치들이 발생할지 그 범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표류라는 거대한 역사는 지금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항. 벽파진항 여객선 대합실에서 조그만 매점을 운영하는 김구월(2006년 당시 76세)할머니는 60, 70년대 제주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사람들의 행렬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혼자서 달랑 가방 하나 들고 배를 기다리는 사람에서부터, 부부가 짐을 꾸려 들어가는 사람, 족히 다섯은 되는 가족들이 이삿짐을 싸들고 제주행 배에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60, 70년대 이농이 본격화되던 시절, 제주도는 서울, 부산 등과 함께 전라도사람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희망의 땅이었다.

“제주도에 가면 일단 먹고살 게 많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한 사람이 제주로 들어가면 소문을 듣고 다른 사람이 따라가고, 다시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가는 형태였습니다” 김할머니는 전남 사람들이 제주도로 들어갔던 상황을 그렇게 설명했다.

전라도 서남부지역 사람들이 제주도로 들어가는 뱃길은 목포~벽파진~추자도~제주 노선이 유일했다. 지금은 완도~제주 뱃길이 일반화됐지만 완주~제주 간에 정기여객선이 처음 취항한 것은 1979년 4월 17일의 일이었다.

그 이전에 강진, 해남, 완도, 장흥, 영암지역 사람들이 제주배를 타기 위해서는 이곳 벽파진이나 목포로 와야 했다. 보성이나 순천 등 전남지역 동부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목포로 가서 배를 타는 경우가 많았고, 구례나 곡성, 담양사람들도 버스를 이용해 목포로 가서 배에 오르는게 일반적인 행보였다.

이곳에서 배를 타면 완도 앞바다를 거쳐 거의 직선항로로 추자도에 이르고, 제주도에 가장 빨리 도착했다. 지금은 고속페리호가 2시간 10분이면 벽파항에서 제주에 도착하지만 당시에는 장장 7~10시간이 걸려야 했다.

제주와 목포를 오가는 배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철선이 선을 보인 것은 1948년 해방 이후였다. 당시의 해상교통은 영세하고 대부분 시설이 낡고 속력이 느려서 날씨가 나쁘면 결항하기 일쑤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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