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이황
퇴계의 학문뒤에는 아픈 가족생활이 있었다
다산도 비슷... 대학자 뒤에 있는 아픈 가족사

행당 윤복선생과 그의 후손들이 퇴계학을 호남지역에 전파한 주역으로 알려지면서 퇴계 이황선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퇴계선생은 조선의 주자학을 확립한 학자다. 

'주리설'을 기초로 삼강오륜의 봉건적 도덕이론을 체계화했다.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퇴계선생의 이미지는 1천원짜리 지폐에 있는 얼굴이다. 퇴계선생의 초상화는 1973년도부터 1천원짜리 지폐에 새겨져 있다.

퇴계선생은 34세되던 1534년에 과거에 합격하면서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퇴계는 애초에 벼슬에 큰 뜻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관직을 맡아 오던 퇴계는 50세 되던 해에 풍기군수재직중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15년간 공무에 얽매여 전력할 수 없었던 주자 성리학 공부에 전력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이후 조정에 다시 불려가 관직을 맡고 다시 사퇴를 거듭하며 학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퇴계는 결국 1561년 고향으로 돌아가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에 도산서당을 짓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행당선생은 퇴계선생이 낙향한지 4년만인 1565년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하게 된다. 행당선생과 퇴계선생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퇴계선생은 우리나라 대표 사상가이면서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의 생애는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다. 이는 다산선생과도 비교된다. 다산선생은 역작 목민심서를 비롯해 수백권의 저술을 남긴 대학자였지만 그의 삶은 슬픈가족사로 점철됐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는 6남 3녀 아홉자녀가 있었다. 그중에 여섯명이 어려서 죽었다. 그는 아들 둘과 일곱 살된 막내 딸을 남기고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퇴계선생도 비슷했다. 퇴계는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1세에 동갑인 허씨와 결혼했으나 어린두아들을 두고 27세에 죽었다. 둘째 부인은 권씨였는데, 역시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퇴계선생의 불행한 가족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48세때에는 둘째아들 이채가 정혼날짜를 받아 놓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를 재가를 시킨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사대부 집안이 여자를 재혼시킨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 1550년 8월에는 가장 믿고 의지했던 형 온계가 주변의 모함에 의해 처벌을 받은 후 귀향가던 길에 사망했다. 이 사건은 퇴계가 현실세계에서 뜻을 펴려는 생각을 완전히 접는 계기가 됐다고 후세평론가들은 전한다. 이렇듯 유명한 학자뒤에는 왜 슬픈 가족사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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