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카정의 야산 정상에 표류해온 조선사람 6명이 잠들어 있었다

5천년전 구석기시대 유물 출토
한반도 남부지방과 유사성 발견

나가사키항 데지마섬에 있는 화란상관. 작은 인공섬이다. 하멜도 이 곳을 오다 제주도에 표류했었다.
안내원에게 나가사키 항구가 보이는 가장 높은 지점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서북쪽을 향하여 한국으로 오가는 뱃길이 아스라이 열려 있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문화적 차이 중 가장 큰 하나는 장례문화이다. 우리나라는 매장문화가 많지만 일본은 화장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려 있다. 일본에서는 조상들의 납골을 모시는 비석들이 마을 안에 있다.

그런데 나가사키현의 오지카정이라는 인구 3천여 명의 작은 섬에는 마을이 아니라 산위에 묘가 있다. 그것도 납골을 안치한 비석이 아니라 둥그런 분묘를 하고 있다.

전해지는 말과 모양으로 봐서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의 묘지였다. 한반도에서 수천리 떨어진 일본의 이름없는 이 조그만 섬에 우리 조상들의 묘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7년 11월 13일 오후 일본 나가사키현의 오지카섬.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의 항구에서 페리호를 타고 서쪽으로 4시간을 이동해서 도착한 곳이다.

부두에는 오지카정의 민속자료관 담당자인 츠쿠하라 히로시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강진으로 이야기하면 면단위에서 향토민속을 연구하는 사람이었지만, 일본고고학회 회원이면서 아시아해저고고학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는 일본내 고고학 분야의 유명 인사였다.

오지카청사에 들러 정장(町長)과 인사를 하고 전통가옥을 개조해 만든 민속자료관으로 갔다. 쓰쿠하라씨는 자신의 전문분야인 해저유물에 대해 설명할 자료를 수북히 준비해 놓고 있었다.

오지카는 일본의 서남단에 위치한 150여 개의 크고 작은 유· 무인도로 구성된 오도(五島)열도의 북쪽에 위치한 섬이었다. 지도를 보면 오도열도의 섬들은 마치 그물망같다. 겨울철에 우리나라 서남부지역에서 북서풍을 맞아 동쪽으로 표류한 배들의 7할 이상이 이곳 오도열도 어디엔가 표착했다. 오지카에서는 5천 년 전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쓰쿠하라씨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이곳에서 나오고 있다”며 “한반도의 원시인들이 표류를 해서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츠쿠하라상이 오지카의 오래된 지도를 펼쳐놓고 이것저것을 설명할 때였다. 지도의 한 귀퉁이에 깨알같이 써진 글씨를 발견했다. 아마도 필자의 시력이 나빴다면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朝鮮人の 墓’
호기심이 발동했다. 통역을 통해 ‘조선인의 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츠쿠하라 히로시씨가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손가락으로 지도의 여기저기를 문질렀다. 잠시 후 표정이 밝아졌다.

“산 정상 부근에 조선사람들의 묘가 모두 6기가 있었다. 그러나 나도 20여 년 전에 본 것이어서 지금도 그 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 조선의 어떤 사람들의 묘란 말인가. 통역을 통해 쓰쿠하라씨의 몇 마디가 더 들려왔다.

“조선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 중에 몸이 쇠약해져서 죽은 사람들의 묘라고 전해 온다. 누가, 언제 장례를 치렀는지는 모른다. 고향이 보이는 쪽에 묻히겠다고 해서 산 정상에 매장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쯤은 숲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그동안 표류이야기를 취재해 오면서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서남해에서 표류를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쪽 기록은 너무 미약하다.

1408년~1888년까지 1천여건 표류
돌풍에 배 파손돼 죽는 경우도 빈번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표류관련 자료들의 모습. 수많은 배들이 이 곳으로 표류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일본 나고야 대학의 이케우찌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1599년~1872년까지 270여 년 사이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971건의 표류가 있었으며 표류인원은 9천770명이었다. 이는 일본측 표류기록이 남아 있는 1888년까지 확대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그러나 이렇게 기록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운이 많은 사람이다. 그밖에 표류중에 바다 한가운데서 실종됐거나 섬 어딘가에 도착해 사망한 사람들은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또 1888년 이후부터 최근까지의 표류기록은 일본쪽에서도 나온게 없다. 조선시대에는 표류가 한일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중요하게 논의됐으나, 1900년대로 접어 들면서 표류사건은 적어도 기록상에서 잊혀진 일이 됐다.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 중반까지도 바람에 의지해 항해하는 돛배가 운항되고 있었다. 강진만 해도 1970년대 초반에 제주에서 옹기를 팔고 돌아오던 3명의 주민이 태풍을 만나 오도열도쪽으로 표류한 사건이 있었다.

두 명은 실종됐고, 나머지 한 명은 시신으로 돌아왔다. 이를 보면 1900년 이후 기록되지 않은 표류사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쓰쿠하라씨를 졸라 민속사료관을 나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조선인 묘를 찾아야 할 일이었다. 따뜻한 날씨의 오지카는 오후 5시가 넘어서면서 조금씩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섬의 서쪽에 해발 116m의 이시가미다케(石神岳)란 산이 있었다. 산은 높지 않았지만 산 초입에 대나무가 밀림처럼 자라고 있었다. 쓰쿠하라씨는 산의 입구를 찾느라 한참을 헤메더니 소를 방목중인 목장 입구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급경사의 산길이었다.

한참을 올라갔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조선사람의 묘를 찾아가는 길이다. 엄숙했다. 뒤쪽으로 꼬불꼬불한 오지카섬의 해변이 보였다. 우리의 조상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표류한 끝에 저 해변 어디엔가 도착했을 것이다.

앞서가던 쓰쿠하라씨가 “여기다”고 소리쳤다. 산 정상의 조금 평평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묘지는 없었다. 온통 억새풀이었다. 쓰쿠하라씨는 묘지가 있던 부분을 대충 기억하고 있었다. 한 구석에 3기가 있었고, 약간 오른쪽에 3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고 했다.

20년 전에도 오래된 묘지였다. 지금은 묘지가 억새속에 숨어버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억새풀의 뿌리가 닿는 곳 어디엔가 ‘죽어도 죽지 않고 싶었던’ 조선사람들의 유골이 있을 것이다. 멀리 서쪽 수평선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고향이 보이는 쪽을 향해 묻히고 싶다고 해서 여기에 묘를 만들었다고 했다.

간신히 생명을 건져 섬에 도착했으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운명을 다해야 했던 조선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후손들은 태풍에 떠내려간 조상들이 바다 한가운데 어디에선가 죽었을 것이라고 자포자기 했을 것이다.

필자는 분묘가 있었다고 하는 곳으로 몸을 돌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쓰쿠하라씨는 “아마도 한국사람이 이곳을 참배하는 것은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표류인들은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도 아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서민들로 단지 바다에서 삶을 영위하다가 바람에 밀려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행적과 죽음이 아무런 조명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들의 삶은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그들의 후손들도 잃어 버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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