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볼트는 일본에서 한국 표류인과 만남을 통해 저서를 완성했다

일본관리 도움으로 강진사람 만나
표류인들은 언어, 지리 등 정보제공

일본 오지카섬에 있는 조선인 묘에서 바라본 석양의 모습. 일본으로 표류한 사람들은 고향이 보이는 곳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고영근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선박들의 한반도 연안 출몰이 잦아지고 1880년대 들어와서 서양과 수교가 가능해진 것도 지볼트의 한국기술이 큰 디딤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지볼트의 저술을 접한 서양인들이 한국인들의 우호적인 이미지와 국내실정을 파악하고 적극적인 접촉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지볼트와 강진사람들과의 만남은 이렇듯 큰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지볼트 저서의 이같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한국내 관심은 미미한 편이다. 고영근 교수는 “지볼트의 한국기록은 그것이 서양사회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언어학적 업적 외에 거의 주목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지볼트에 대해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강진 표류민들의 가치를 알아달라고 하소연할 수는 없다. 앞으로 많은 관심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지볼트와 강진사람들이 만난 과정을 살펴보자. 전술(前述)한 것처럼, 지볼트는 1828년 3월 17일 일본관리의 도움으로 나가사키에서 표류해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강진사람을 만난다. 나가사키는 일본 정부가 표류 외국인들이 거주하도록 허가한 구역이었다.

한국의 표류인들은 이곳에서 한반도로 부는 동남풍을 기다리며 때에 따라서는 몇 달을 기다리곤 했다. 이곳에서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는 데지마라는 곳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지볼트가 한국 사람을 만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지볼트는 원할한 대화를 위해 몇 사람을 골랐던 것으로 보인다. 총 36명의 강진사람 표류민 중에 ‘교양이 있고 명망이 높아 보이는 남자 4명(김치윤, 허사첨, 고응양, 곽성장)’과 복장의 차이를 살피기 위해 선원과 견습선원을 더 불러 모두 6명의 강진사람과 대화를 하게 된다.

강진사람들은 난생 처음 보는 푸른 눈의 서양사람을 친절하게 맞아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은 서양학자에게 한국의 언어와 지리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한시를 지어주는가 하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지볼트는 이들이 3척의 배에 타고 조선의 남서해안 지역인 강진에서 일본의 규슈(九州)의 서쪽해안이나 코토렛토(五島列島)에 표류해 온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지볼트는 강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한국의 문자와 풍습 등을 듣고 이를 기록하는 한편, 함께 데리고 간 화가에게 강진사람들의 얼굴과 모습, 이들이 구술하는 한국인들의 생활 모습 등을 그리게 해 이를 나중에 책을 발간할 때 첨부해 발행한다. 그야말로 한국을 소개하는 종합 안내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강진사람들이 만난 지볼트는 ‘하늘과 물의 반사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려는 듯이 눈썹이 쳐지고 상대방으로부터 눈을 피한 채 움직이지 않는 모습과 서민계급의 거친 골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고 적고 있다.

지볼트는 강진사람들에게 염색된 배와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마시는 게너버란 음료수를 선물로 주었다. 선물을 받은 강진사람들은 무슨 답례품을 줄까 생각하다가 자신들이 난파 당시 건져낸 소지품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몇 권의 필사본 책과 두루마리 그림 몇 폭, 작은 소반 한 개, 몇 개의 항아리와 사발이었다.

강진사람을 만나고 그동안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를 취합해 저술을 남긴 지볼트는 한국이 서양인들에게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그의 저서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자국의 생산품과 기술, 나라안의 교역만으로 삶에 만족하고 있는 국민에 대해 정부가 평온, 무사한 나날을 확보해 주려면 외국인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민들이 유럽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고의든지 우연이든지 바닷가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는 커녕 되도록 헤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볼트는 한국인은 오랜 옛날부터 자신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고 지적 수준이 오히려 일본보다 앞서고 있다는 점도 중시하고 있다.

또 한국민과 교섭을 하려면 미개인나 유목민족을 대하듯이 무력을 행사하거나 호의를 베푸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권장한다. 대신 한국정부의 정신, 다시 말해 왕권 중심이라는 통치원리를 탐색하고 한국인들의 풍습과 관습, 언어 등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1408년~1888년까지 1천여건 표류
돌풍에 배 파손돼 죽는 경우도 빈번

지볼트가 만난 강진 표류민들. 당시 화가가 그린 천연색 그림이다.
그 강진사람들을 만나 보자. 당시 지볼트를 만난 사람들은 김치윤(金致潤)과 허사첨(許士瞻) 등이며, 나머지는 상인, 선장, 선원, 견습선원 등이었다. 두 사람은 실명을 적었고 나머지는 상인, 선장 등 그들의 직업을 적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 있다. 1800년대 강진군은 강진현이란 행정구역으로 있었으며 강진현에는 현재의 강진군 지역을 비롯해 지금의 완도군 고금도와 신지도, 약산도, 청산도가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볼트가 만난 ‘조선국 전라도 강진출신’ 사람들은 행정구역상으로 지금의 강진군 지역 사람일 수도 있고, 완도 소속의 인근 섬지역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진사람이란 의미는 오늘날 강진주민들에게 축소되지 않는다. 과거의 지역 명칭은 오늘날 호칭되는 지역과 일치해 사용하는게 관례다. 이를테면 완도의 청해진이 9세기에는 전남 서남해안 지역을 총칭하는 이름이었으나 오늘날 완도군으로 국한돼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후술하겠지만, 지볼트가 만난 사람들의 대화 내용이나 즉석에서 지어 부른 한시(漢詩), 구술한 민요 등에서도 섬 지역의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옷차림이나, 말씨, 지볼트가 느낀 점 등을 분석할 때 이들은 지금의 강진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므로 추가적 사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들을 강진사람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다.

일본측 공식자료에도 당시에 일본의 규슈나 오도열도로 표류한 강진사람들의 기록이 있다. 일본인 지내민(池內敏)씨의 저서 ‘근세조선인(近世朝鮮人)의 일본표착년표(日本漂着年表)를 인용한 국내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 강진사람들의 표류 기록이 있다.

자료에 따르면 1827년 9월 초 강진을 출발해 충청도 은진향이라는 곳으로 물건을 팔러가던 주민 11명과 아이 1명이 항해길에 표류해 일본 오도 열도에 9월 12일에 표착했다.

당시 기록에는 1827~1828년 사이에 강진사람들이 일본으로 표착한 기록이 딱 이 한가지 사례이고, 표착지역도 오도열도인 점을 감안하면 1827년 9월 12일 오도에 표착한 사람들이 이로부터 6개월 후 지볼트를 만난 사람들로 추정되고 있다.

지볼트도 그의 저서에 적었듯이 일본에 무사히 표착한 조선인들은 봄철에 한반도로 부는 동남풍을 기다리기 위해 많게는 몇 개월씩 나가사키의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려야 했다.

배의 숫자와 표류주민의 숫자 등이 지볼트의 기록과 다소 상이하지만, 역시 지볼트의 기록대로 당시 나가사키에는 조선에서 표류해온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참고해 이해됐으면 한다.

1408년부터 1888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표류한 건수가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해도 1천109건에 달한다. 이들은 그나마 행운이 많은 사람들에 속한다. 표류라는게 돌풍을 만나 이뤄지는게 일반적인 일이었고, 돌풍에 휩싸여 망망대해로 밀려간 돛배는 상당수 중간에 파손돼 탑승자들은 죽음을 당해야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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