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일행은 일본으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했다

봄철이면 남동풍에 표류하기 일수
1627년~1888년까지 95건 기록

하멜일행이 처음 표착한 곳으로 추정되는 제주특별자치도 남제주군 일명 용머리 해안가의 모습
속장은 풍랑에 배가 뒤집혀 죽은 뒤에 송장이 배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고 머리와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지 않도록 몸을 배에 묶고 얼굴을 천으로 덮어싸는 것을 말한다. 사공(선장)을 보니 연방 울어대며 몸을 얽어매고 있다. 사공의 자포자기한 모습을 보며 일행들이 더욱 놀라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태풍을 만나 바다 한가운데서 일어난 일을 실감나게 적은 기록이다. 장한철 일행은 일본쪽에서 표류 8일만에 다시 완도해역으로 밀려 왔으나 태풍속에 완도 청산도에 상륙하면서 일행 21명이 죽고 말았다.

19명은 바다에서 실종됐고 나머지 2명은 가까스로 섬에 올랐으나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죽었다. 바다에서 표류하는 일은 이렇듯 시시각각 생과 사의 갈림길을 걷는 일이었다. 이처럼 처절했던 표류 사건이 조선후기라고 할 수 있는 1627년부터 1888년까지 261년 동안 1017건이다. 이는 일본측 기록을 한국학자들이 인용한 것이다.

일본에 도착하지 않은, 다시 말해 도중에 풍랑을 만나 실종됐거나, 해적들에 의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제외된 수치다. 또 역사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1627년 이전에는 항해술이 훨씬 뒤떨어진 시기다. 표류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밖에도 봄철이면 남동풍을 만나 중국쪽으로 표류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중국쪽 표류기록은 종합 집계된 자료가 아직까지 없다. 이를 종합해 보면 남해안지역에서 일어났던 표류 규모는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측 자료를 보면 1627년부터 1888년까지 나타난 1017건의 표류사건 중에서 95건은 강진 사람들이었다. 바로 우리 조상들이 표류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이면 겪지 않길 바라는 가장 지독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표류사건이 문명을 전해주고, 대륙과 섬을 이어주며, 오늘날 들어 후손들에게 역사를 알게 해주는 커다란 유산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후술하겠지만, 대표적인 경우가 1828년 일본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파견원 지볼트란 사람이 강진출신 표류민들을 만난 것이다.

지볼트는 일본 규슈지역으로 표류해 온 강진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한국의 언어와 문자를 전해듣고 이를 기록으로 남겨 훗날 서양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해하는데 큰 자료가 됐다.

대만에서 일본향하던 하멜 제주도 표류
하멜표류기 통해 세계에 우리나라 알려져

용머리 해안가에 세워진 복원된 스페르베리호
멀리 갈 것도 없이, 그 유명한 핸드릭 하멜 일행은 1653년 7월 30일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도중 태풍을 만나 표류했다.

그후 13년이란 기나긴 억류생활이 어어졌고 1667년 순천에서 탈출할 때는 단 8명이 배에 올랐을 뿐이다. 그들이 겪었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멜은 탈출 후 ‘하멜표류기’란 책을 통해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린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밖에도 우리는 표류기록을 통해 우리 조상들이 아주 오래전에 어떻게 살았으며, 어디와 교역을 했으며, 무엇을 사고 팔았는지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상거래를 천시했던 조선시대는 서민들의 상업활동 기록이 많지 않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은 관에서 기록한 조세나 공물과 관련된 자료들이 대부분이고, 한양이나 개성과 같은 일부지역 상거래 활동이 전해 올 뿐이다. 그래서 전라도 강진땅 사람들이 어디와 어떤 거래를 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 열쇠를 풀어주는 게 표류기록들이다. 바다에 나가 풍랑을 만나 일본이나 중국으로 표류하면 그곳에서 문초를 받았다. 언제 어디서 어디로 가는 배였으며, 어떤 물건을 어떤 목적으로 싣고 가는 중이었는가 하는 것이 기본적인 질문 내용이었다.

이들이 우여곡절 끝에 귀국을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문초를 했다. 언제, 어디로, 무엇을 싣고, 어떤 목적으로 가다가 어느 지역으로 표류했으며, 표류지역에 도착하기까지는 몇 일이 걸렸는지가 주요 심문내용이었다. 심문기록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이나 중국으로 표류했듯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에 많이 표류해 왔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네덜란드사람 하멜의 표착이다. 하멜은 1653년 8월 16일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현 바닷가에 네덜란드 상선 한 척이 표착했다. 배의 이름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스페르베르호. 이 배는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으로 가던 길이었다.

대만에서 출발한 배에는 64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배가 암초에 부딪쳐 표류하면서 28명(2명은 병사)의 선원이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36명. 이중에 배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일을 기록하는 서기인 핸드릭 하멜이 있었다. 이후 하멜 일행은 1666년 9월 4일 전라좌수영을 탈출하기까지 13년 28일 동안 강진 등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흔히 서양에 한국을 알린 최초의 사람 정도로 알려지는 핸드릭 하멜. 그러나 하멜의 표류는 당시의 제주도 인근의 항로와 제주도와 육지의 항로, 일본과 서양의 교역상황 등 당시의 시대상황을 전해주는 종합적인 역사자료나 마찬가지다.

제주특별자치도 남제주군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가에는 이곳을 하멜이 처음 표착한 곳으로 보고 하멜상선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근래에 발굴된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李益泰.1633~1704)의 ‘지영록(知瀛錄)’에는 ‘차귀진(遮歸鎭) 아래쪽 대야수(大也水) 연변’이라고 기록돼 있는 등 정확한 위치가 유동적이다.

차귀도는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소속돼 있는 작은 무인도이다. 그러나 이 또한 불명확한 것이, 하멜표류기에는 어느 해안가에 표착해 관군들에게 붙들려갔다는 기록은 있으나 표착한 곳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 육지로 들어갔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제주의 채바다 바다박물관장은 하멜도착지를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 2리 해안가로 보고 있다. 채관장은 “하멜표류기에 기록된 주변 정황이라든가 이곳에서 군사들에 의해 대정현으로 끌려간 거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신도2리 해안이 가장 유력하다”고 말했다.

하멜의 도착지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결국 제주도 대정현 남쪽 해안의 어느 지점이라는 것은 의견이 일치한다.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가에는 복원한 스페르베르호가 위풍당당하다. 배 뒤쪽으로 해안선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8월 중순, 기진맥진한 하멜 일행은 저 곳 어딘가에 도착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8월 초 하멜 일행이 도착한 곳을 찾아갔다. 하멜이 표착한 시기와 비슷한 시기다. 무척 무더운 날씨였다. 이 곳은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를 조망할 수 있는 제주도의 끝부분이다.

일본에서 올라오는 태풍이 가장 먼저 상륙하는 곳이자,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 그곳이 바로 태평양이다. 하멜의 난파선은 파도에 이리저리 밀려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해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파도와 싸우며 수많은 동료를 잃고 낯선 이국땅에 표착한 하멜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감이 교차했겠지만, 아마 13년 동안 조선에서 억류생활을 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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