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포는 육지와 바다를 연결해주는 최적의 포구였다

제주도와 목포 오가는 배 매일 들락거려
상선과 상인들 몰려 경제활동 중심지 역할

제주도와 모포를 오가는 배가 매일 들락거리며 상업이 발달했던 군동면 호계리 백금포의 모습. 탐진강 하류에 해당된다.
1930년대는 일제치하로 강진땅은 일본으로 보내어지는 곡물의 집결지로서 그 피폐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굶주리는 것이 다반사였고, 일본인들의 앞에서 굽신거리며 못난 삶들을 하루하루 이어 나갔다. 비록 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림의 떡이었고, 그나마 형편이 나은 집에서도 서석이나 두류들이 전부였다.

백금포는 그런 역사 흐름의 중심지였다. 자본축적이 진행되고 해상항로를 통한 상업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면서 내륙 깊숙한 곳에 형성돼 있는 백금포는 육지의 산물을 밖으로 실어나르기에는 최적의 포구였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던 영포(백금포)의 기능이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김충식씨의 창고업과 해운업, 일본인들의 창고업, 이에따른 군소전주들의 상업거래가 대부분 백금포에서 시작됐다. 김충식씨는 1940년대 초반부터 발동선을 구입해 서창, 해창, 장흥 수문포, 고흥 녹동, 고흥 나로도간의 연안항로를 개설해 운영하면서 해운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고, 차종채씨는 해운, 비료, 주조, 관염 등에 뛰어들었다.

일본인들도 항로 만들기에 적극적이었다. 일본인들은 1920년대 중반 편창식산(片倉殖産)주식회사 강진출장소란 회사를 설립해 임업을 하면서 연안항로를 개설했다. 배의 이름이 사장의 이름을 딴 편창환(丸)이었다.

당시에는 목포~여수~부산방면에 조선기선의 발동선이 완도를 거쳐 매일 왕래하고 있었다. 편창환은 강진만 깊숙이에 있던 강진읍과 완도를 연결해 목포~부산간 항로를 이어주는 일종의 연락선이었다. 강진읍 목리 일대 주민들과 대구, 칠량 등의 주민들에 따르면 편창환은 매일 한차례씩 강진읍 목리와 완도항을 왕복했다. 편창환의 노선은 완도항을 출발해 신지~고금~약산~마량면 마량~대구면 미산~칠량면 봉황~도암 해창~강진읍 목리였다. 완도로 돌아가는 배는 똑같은 코스를 밟으며 갔다.

배의 크기는 20여 톤 정도로 발통기를 단 목선이었으며 50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당시 강진읍 목리 다리부두~완도항까지의 항해시간은 여기저기를 거쳐가느라 4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완도사람들이 서울에 가려면 이 배를 타고 강진읍 목리로 와서 영산포로 간 다음 그곳에서 기차를 탔다. 당시에는 강진~완도 간에는 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이 항로가 강진과 완도를 이어주는 유일한 노선이었다.

주민들은 편창환의 선장은 한국인이었으며, 해방직후까지 배가 운행되다 어느날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1940년대 말을 전후해서 백금포에는 50톤 안팎의 대형 풍선 30여 척이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제주로 왕래하는 배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목포배였다. 제주배는 생선류와 젓갈류를 많이 싣고 와서 쌀과 바꿔갔다.

이때문에 백금포에는 정미소뿐 아니라 생선을 받아서 넘기는 곳, 젓갈을 쌀과 바꿔주고 다시 상인에게 넘기는 다양한 사람과 기능들이 버글거리고 있었다.

강진읍은 동쪽의 백금포에서 상선을 통해 돈이 왕래하고, 서쪽에서는 남포에서 고깃배들이 돈을 펌프질하고 있었던 형국이다. 일제강점기 때 강진에서 돈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는 것은 이런 경제구조에서 연유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이라는게 극소수에게 집중된 것이어서 서민들은 늘 힘든 생활을 했던 것이다.

1940년대 말 백금포에는 강진사람 소유의 큰 풍선이 다섯 척 정도 있었다. 당시 백금포의 실질적 점주였던 차종채씨가 50톤급 풍선 두 척을 가지고 있었고 강진읍 목리의 유재희씨가 한 척, 역시 목리의 김관평씨가 한 척이 있었고 대구면 계치마을의 조귀속이란 사람의 배가 또 한 척 있었다.

정미소에 인근 장흥과 해남, 영암 쌀 모여
주로 제주도 서귀포항으로 곡식 거래 진행

백금포 전경
백금포에는 정미소가 있었기 때문에 인근 장흥과 해남, 영암 등지의 쌀이 대부분 이곳으로 실려왔다. 선주(船主)가 있고, 하주(荷主)가 있었다. 선주는 배의 주인이고 하주로부터 물건을 위탁받아 원하는 장소로 실어다주는 사람이었다.

하주들은 사방에서 왔다. 부산사람도 있었고, 여수사람도 있었고, 제주사람도 있었다. 강진풍선에 선적되는 품목도 다양했다. 우선 쌀이 가장 많았다. 30~40톤 정도의 풍선에 80㎏ 짜리 쌀이 1천가마~1천500가마까지 실렸다.

배에는 3~4명 정도가 탔다. 제주에 도착하는 시간은 바람에 달려 있어서 바람이 좋으면 아침에 백금포를 출발하면 해질녘에 서귀포에 도착할 수 있었고, 출발해서 날씨가 나빠지면 완도 청산도나 모도로 들어가 바람이 좋아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강진에서 가면 제주항이 가장 가까웠으나 1940년 중반기를 전후해 제주도에서 쌀이 잘 유통되는 곳은 서귀포였다. 아마 당시만 해도 제주도 전역에서 주곡은 보리쌀이어서 쌀 소비량은 한정돼 있었다. 서귀포에는 육지의 하주(荷主)와 거래하는 중간상인들이 많았다. 배가 닿으면 하주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상인들이 부두에 나와 물건을 인수해 갔다.

제주는 한번 다녀오면 한 일주일 정도가 걸렸고, 날이 좋지 않으면 15일 정도는 소요됐다. 겨울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한 달 이상 걸린 적도 많았다.

옹기배는 10~15톤에 불과하고 쌀과 보리를 싣고 다니는 상선은 50톤이 넘는 큰 배였지만 바람으로 움직이는 원리는 똑같은 것이어서 바람이 나쁘면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게 상례였다. 큰 배라고 해서 더 안전한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이 돛이 높고 커서 바람을 그만큼 많이 받게 돼 있기 때문에 강풍이 불면 배에서 받는 부담이 옹기배의 몇 배에 달했다.

백금포에서 출발해 인천으로 가는 상선은 목포가 주요 정박지였다. 백금포에서 인천까지 가는 항로는 이랬다. 백금포에서 출발해 완도 남창으로 들어간다. 남창과 달도 사이의 좁은 길목을 지나면 배는 해남 땅끝을 향하게 된다.

이곳에서 백일도 앞을 지나면 흰머리끝이 나오고 해남군 송지면 땅끝마을을 잡고 우측으로 뱃머리를 돌리면 배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부터 배가 북으로, 북으로 달리면 그만이었다.

조금 올라가면 어란진이 나오고, 조금 지나면 해남 화산면을 지나 진도 벽파진항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물때를 기다렸다. 울돌목은 물살이 센 곳이기 때문에 물이 나올 때 배를 띄우면 배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물이 들어갈 때 배를 띄우면 손살같이 배가 북쪽으로 올라갔다. 울돌목을 지나면 풍선은 목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목포가는 배는 주로 쌀을 싣고 갔고, 백금포로 돌아올 때는 주로 비료, 설탕, 소금 등을 많이 싣고 왔고, 화물이 많지 않으면 화목을 실어날랐다. 백금포에는 비료를 저장하는 창고가 따로 있었다. 비료판매를 얻은 수익이 차종채씨 사업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배는 인천광역시까지 올라갔다. 뱃길이 목포를 지나 군산 앞바다와 충청도를 거쳐 인천으로 이어졌다. 풍선으로 인천까지 다가보면 몇날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바람이 좋으면 사흘이면 인천항에 닿았다.

그러나 발동선은 백금포에서 인천까지 20여 시간이 걸렸다. 당시 발동선의 등장은 풍선이 주류이던 해운산업의 혁명적인 사건이었지만 장단점이 뚜렷했다. 발동선은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바다를 항해한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그러나 일단 연료비가 들어갔고, 배를 수리해야할 일도 많아 유지비가 많이 들어갔다. 배 바닥이 둥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수심이 얕은 항에 정박할 수 없는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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