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연구하러 강진 온 일본인 연구가들이 찍은 사진 추정
청자학술세미나 논문속에 공개, 당시 정겨운 모습 생생

1930년대 칠량 봉황마을의 모습이다. 아기자기한 초가집들이 정겹다.
청자축제 학술세미나에서 나온 두 장의 사진이 눈에 띤다. 옹기를 만들어 배를 타고 멀리는 부산까지 가서 팔았던 칠량 봉황마을의 아주 오래된 사진이다. 한 장은 고려대학교 김윤정교수(고고미술사학과)가 발표한 논문속에, 또다른 한 장은 고려청자박물관 조은정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논문속에 들어 있다.

김윤정 교수의 눈문속에는 1930년대로 추정되는 칠량 봉황마을의 사진이 게재돼 있다. 일본의 미술사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3 ~ 1961.5)란 사람의 글속에 게재된 사진이라고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4년 조선미술관을 설립했고,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 미술전람회를 열었던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광화문 철거가 논의되었을 때 적극 반대하는 등 한국의 민속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낸 일본인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사진은 ‘The Port of Shichi-ryoji’란 제목을 달고 있다. 아마도 야나기 무네요시가 고려청자의 요지를 연구하기 위해 대구에 들렀다가 이곳 봉황에 들러 옹기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는 초겨울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무의 가지는 앙상한데, 초가지붕에 마람이 얻어져 있는 집들이 보인다. 지붕씌우기가 아직 늦은 집이다. 집의 크기는 아주 작아서 거의 지붕들이 삼각형에 가깝다. 이런 형태의 집들은 봉황마을 골목에 아직도 한두채가 남아 있는데 작은 마루하나와 안방, 부엌이 전부다. 30년대는 온통 그런집들이 봉황마을을 채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과 다른 가장 큰 또다른 특징은 방파제가 없다는 것이다. 집들은 해변에 맞닿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아마도 파도가 크게 일면 집으로 물이 많이 튀었을 것이다.

1925년 어느날 칠량 봉황마을에서 옹기를 굽는 모습이다.
또 한 장의 사진은 일본의 유약 연구자였던 고모리 진의 논문에 나오는 사진으로 고려청자박물관 조은정 학예연구사의 논문속에 실려 있다. 1925년 봉황마을이다. 우선 눈에 띠는게 옹기를 굽는 가마다. 고모리 진은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운영되고 있었던 칠량면의 도기가마에 대해 조사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칠량면 도기 가마는 전체 길이는 60척(18.18m), 가마 폭은 6척(1.8m), 높이는 하부가 6척5촌 (1.97m), 상부가 4척5촌(1.36m), 경사도는 대략 하부는 8.5도, 상부는 9도 내외였다고 한다. 연료는 소나무 가지를 사용하고 1회 약 7,800근(4.68톤)을 소비하며, 소성온도는 각 부분마다 다르지만 대략 1,100℃ 내외라고 기술하고 있다. 굉장히 세부적인 조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눈길을 가마 주변으로 가보자. 가마 앞에는 화덕에 넣을 건조한 옹기가 세워져 있다. 물통일까. 아니면 소메통일까. 오래전 오줌을 받는 소메통이 꼭 저 모양이였다. 우측으로 사람들이 서 있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하나같이 등에 자기 보다 더 어려 보이는 아기를 업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자아이의 등에서는 아기가 입을 벌리고 곤히 잠들어 있다.

조은정 학예연구사는 “일제강점기는 자료수집의 한계와 일제의 잔재라는 심리적 거부감때문에 기존 연구에서는 많이 다뤄지지 않았다”며 “일제는 1920년대 전반까지는 청자를 중국과 일본도자 연구의 부수적인 성격으로 소략하게 다뤄졌지만 1925년 강진 청자조사 이후 고려청자를 문헌과 유물을 고려하여 미술사적 연구 성과를 남겼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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