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 배가 갓을 가득싣고 강진만을 들락날락 했다

추자도 멸 강진읍 남포마을로 들어와 전국유통
추자도 사람들 강진 사람과 사돈관계 많이 맺어

추자도 작은 공원에 나침반 모양이 세워져 있다.
칠량~제주간 험난한 뱃길에서도 강하게 살아 남았던 옹기장수는 암이란 질병에 너무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씨의 문제요옹기점은 부인 김호물씨와 함께 아들인 주철옥씨가 대를 이어 문을 열고 있다. 요즘 판매되고 있는 옹기는 아쉽게도 봉황마을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강진에서 생산되는 옹기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울산과 인천에서 옹기를 가져와 팔고 있다.    
 
1개월~2개월 정도 제주에서 옹기를 판 선원들은 배가 어느 정도 바닥을 보이면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쯤되면 사공의 호주머니에는 현금이 가득했다. 제일 먼저 땔감과 식수를 챙겼다. 식량은 충분히 준비해 갔기 때문에 따로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막상 옹기를 다 팔고도 바람이 좋지 않아 몇일씩 더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강진으로 가려면 남풍이 불어줘야 했다. 일기가 좋지 않으면 청산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몇일씩 바람을 기다려야 했다. 옹기를 다 팔았다는 설레임에 섣불리 배를 출발시켰다가는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79년에 3명이 사망했던 이수성씨 사고도 그런 경우였다.

몇일씩 바람을 기다리다보면 그동안 옹기를 팔아 벌어놓은 돈을 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섬에 와서 번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은 없었다. 술생각이 나면 완도에서 사온 술을 배에서 조금씩 나누어 마셨을 뿐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는 모두 빈배였다. 빈배로 돌아오느니 제주도에서 물건을 사와 육지에서 팔 것이 있을 법도 했지만, 당시에는 그럴만한 상품이 없었다. 제주에 해물이 그렇게 많지도 았았고, 미역같은 해산물은 육지에서 먹는 것보다 맛이 떨어졌다. 다른 곡물들도 육지에 비해 대체적으로 질이 떨어졌다. 의식주 문화는 당시만 해도 육지에 비해 제주가 한참 뒤져 있었다.

남풍이 불면 이른 아침에 고향을 향해 출발했다. 중량이 가벼워진 배는 날아갈 듯 바다를 헤쳐 나갔다. 날씨가 좋은 날은 제주를 빠져 나와 조금만 올라오면 월출산 천황봉이 보였다. 사공이나 조동무나 월출산이 반갑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청산도가 가까워지면 강진에 다 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오는 길은 청산도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완도항으로 향했다. 완도항은 선원들이 제주도에서 오는 길에 마음 편하게 들려 쉬는 곳이었다. 집을 떠나 두어달 동안 바다에서 외로움과 싸워야 했고, 제주도에 도착해서는 물건을 팔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완도항에 들어가 잠시 쉬는 시간이 선원들에게 가장 편한 시간이었다. 완도항에 도착해 배를 정박시킨 선원들은 부두로 올라가 선술집을 찾았다. 이것저것 반갑지 않은 게 없었다. 사공과 조동무들은 완도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장사가 잘 되면 잘 된대로, 못되면 못 된대로 마음을 풀며 완도에서 한잔씩 했어요. 뱃사람들은 다 그랬습니다”
김우식옹은 한두달 집을 떠나 바다에서 살아보면 마음이 그렇게 허전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식들 키우는 일념으로 모든 것을 이겨냈다고 했다.

봉황마을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계산을 치루는 것이었다. 제주에서 옹기 팔아 번 돈을 선주와 사공, 조동무들이 나누는 절차였다. 옹기배는 선주가 직접 사공으로 배에 올라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선주는 배를 빌려주고 사공과 조쟁이가 장사길에 올랐다.

계산은 이렇게 이뤄졌다. 100만원 어치의 옹기를 배에 싣고 가면 제주에서는 200만원을 벌 수 있었다. 이윤이 배가 되는 장사였다. 칠량옹기를 싣고 제주에서 팔면 이처럼 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가난했던 시절에 목숨을 건 항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200만원을 벌어오면 100만원은 선주몫이 되고 나머지 100만원중에 50만원은 사공몫, 나머지 50만원은 절반씩 두 사람의 조쟁이들이 나눠가졌다.

강진과 추자도의 교류 역사는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앞서 서술했듯이 다산선생이 1800년대 초에 쓴 ‘탐진어가’란 한시에는 추자도 배가 갓을 가득싣고 강진만 입구를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추자도와 강진의 교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동 호계리에는 일제강점기 쌀 도정공장이 지금도 남아있다.
추자도지편찬위원회가 지난 1999년 발행한 ‘추자도’란 책자에 따르면 추자도는 오래전부터 제주와 육지, 육지와 제주를 오가는 배들의 대표적인 후풍처였다. 앞서 기술했듯이 제주도는 서기 662년 신라의 문무왕 때 신라에 복속되었다.

제주의 시조성인 고을나의 15세손인 고후(高厚)가 그의 아우인 고청(高淸)과 바다를 건너서 처음으로 지금의 강진땅인 탐진(耽津)에 닿음으로써 신라왕으로부터 탐라란 칭호를 받았다. 이때 이미 조공이 있었던 점을 미뤄볼 때 제주에서 육지를 왕래하던 선박들이 해상의 중간지점인 추자도를 후풍지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강진과 추자도의 교류 역사는 제주도와 신라의 교류사와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일이다. 

옛날 강진에서 추자도로 가는 뱃길은 완도를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돌아가는 노선이었다. 강진만을 빠져나온 배가 남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완도의 장죽도와 고마도 사이를 지나 완도군 군외면 원동리와 달도 사이를 지났다. 원동과 달도는 지난 1969년 1월 다리가 연결돼 완도는 육지가 됐다.

원동을 지난 멸젖배는 사구미해수욕장 앞쪽의 백일도와 동화도 사이를 지나 보길도와 가까운 넙도에 이르고 여기에서 곧장 추자도로 빠져 나갔다. 이 뱃길을 이용해 아침에 돛배를 타고 가면 보통 ‘저녁 나절’에 도착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7~8시간의 거리였다.

요즘에는 완도항에서 출발해 완도의 동쪽을 돌아가는 노선이다. 이 배는 3시간을 달려 추자도에서 사람들을 내려준 후 다시 두시간을 가서 제주도에 도착한다. 뱃길은 완도항을 출발해 신지도 앞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조금 내려가다 모도와 청산도 사이를 지나 서남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청산도 앞에서는 수십 척의 멸치잡이 어선들이 이러지러 방향을 잡으며 멸치잡이에 여념이 없었다.

정기 여객선이 쏟아내는 물보라는 모도를 지나 불근도 앞을 통과하며 서남쪽으로 긴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곧장 남쪽으로 가면 제주로 직행을 하는 것이고, 서남쪽으로 가면 추자도 뱃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정기여객선은 서북쪽으로 소안도와 보길도를 뒤로 하고 서남쪽으로 계속 직진해 갔다. 멀리 남쪽으로 상선들이 동서를 가로질러 끊임없이 항해하고 있었다. 여객선의 선장에 따르면 완도~추자도~제주간 뱃길이 연안항로라고 했다.

연안항로란 육지와 가까운 곳에 인접해 개설된 항로를 뜻한다. 이 뱃길은 긴급 상황이 되면 30분내에 안전한 곳으로 피항할 수 있는 거리에 섬들을 두고 있다. 완도~추자도~제주도 구간 정도의 뱃길은 태풍주의보만 없으면 600톤급의 여객선이 안심하고 다녀도 될 항로였다.  추자도 주변에서는 겨울철이 되면 돌풍현상이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바다 한가운데서 돌풍은 순식간에 기압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바람이 초속 15~20m로 불고 파도가 심하게 친다는 것. 그 정도의 바람에 온바다호 정도의 배는 끄떡없지만 예전 옹기를 싣고다니던 15톤 정도의 배는 물론, 30톤 정도의 상선까지도 돛이 찢어질만큼 큰 바람이라고 여객선의 선장은 설명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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