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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사당리 발굴의 추억]1964년 5월, 천년 청자편들 기적같이 나타나다사당리 주민들이 마당에서 논밭에서 늘 보았던 것
주희춘 기자  |  ju@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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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7.29  1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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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시작되면서‘900년 만에 베일 벗은 고려청자’
1964년 9월 22일부터 77년 11월 23일까지
총 9차례에 걸쳐 154일 대대적 발굴조사


   
64년 이용희 실장집 내부 발굴에 이어 65년 발굴이 시작된 집주변 기술갱의 모습이다. 주변에 작물이 심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경작이 한창인 논경지였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수백년 또는 수천년 동안 땅속이나 바닷속에 숨어 있었던 유물과 유적들은 이처럼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며 우리 눈앞에 그 찬연한 모습을 드러낸다. 강진청자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강진청자 역시 거의 800여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60년대 들어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고려청자재현사업과 함께 강진에서 다시 청자가 생산됐고, 이런 계기는 강진에서 청자축제가 열리는 단초가 됐다. 그 결과 강진에서는 매년 전국최고 축제중의 하나인 청자축제가 열리고 있고, 대구 일대에는 모두 31개의 민간요들이 들어서 청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1964년 5월 늦은 어느 봄날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와 정양모가 대구 사당리 일대를 돌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청자파편이 가득담긴 헌 소쿠리를 들고왔다, 소쿠리속을 들여다 본 최과장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청자기와 암막새 파편하나가 파편 무더기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최과장은 흥분을 감추고 조사단의 정양모 학예관보를 조용히 불렀다. 두 사람은 은밀한 눈짓으로 ‘득망의 대발견’을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소쿠리를 들고 나타난 촌부는 이용희 전 청자사업소 연구실장의 모친 김월엽씨였고, 소쿠리에 청자편을 담아놓은 사람은 막 군대에서 제대한 이용희 실장이었다. 이 실장은 당시 군대에 있었는데 휴가를 나오면 마당에 여기저기서 굴러다니던 청자편을 소쿠리에 모아놓고 있었다.

최과장과 정학예관보는 “색이 좋고 그림이 그려 있는 사기조각들이 집마당을 파보면 많이 나온다”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사당리 117번지 문제의 초가집으로 달려갔다. 117번지 초가집은 일제강점기때 파악한 100여기의 요지속에 포함되지 않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의 탐문조사 동안 사각지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부엌바닥과 안마당, 담등에 청자파편이 많이 박혀 있었다.

1964년 7월 대구 사당리 이용희씨의 앞마당을 파들어 갈수록 암키와, 암·수 막새기와 등 각종 청자기와가 쏟아졌다. 이 정도면 이곳이 개성 만월대 부근에 있었다는 양이정을 덮은 청자기와를 만든 터였고, 청자기와가 지붕의 어느쪽에 위치할 것까지 계산해 구워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1차 조사는 1964년 9월 22일부터 10월 3일까지 진행됐다. 그동안 청자기와가 발견된 것은 일체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발굴이 끝나기 전에 기자들이 몰려오면 발굴도 제대로 못하고 도굴꾼들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사당리 청자기와 발굴이 상당히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고학계가 두고두고 후회한다는 공주 무녕왕릉 발굴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1971년 7월8일 배수구를 정비하던 인부가 우연히 삽질을 하다가 내부 벽실에 묻혀있던 ‘벽돌’을 발견한다. 이 소식이 서울로 보고돼 부랴부랴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동네 사람들이 눈치채고 몰려들었고 이 소식이 기자들에게까지 들어갔다.

발견 다음날 군중들이 마치 서커스구경꾼처럼 발굴현장을 빙 둘러쌌다. 기자들은 발굴팀을 밀치고 무덤 속 유물들을 짓밟으며 연신 사진플래시를 터뜨렸다. 심지어 경찰조차 무덤을 먼저 보겠다고 고개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무덤 내부의 원형이 상당히 파괴됐다.

이 때문에 훗날 이렇다할 연구논문도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무녕왕릉 발굴은 전 세계 고고학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날림발굴이라는 비아냥을 지금도 듣고 있다. 이에반해 7년 앞서 진행됐던 사당리 발굴은 1964년 5월 사전조사 후 4개월 정도 나름대로 준비기간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또 발굴을 시작하면서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음으로서 외부세력의 개입을 잘 차단했다.

   
좌측사진은 1973년 국립중앙박물관이 41호 도요지에 해당되는 사당리 127번지에서 가마를 발굴하면서 양수기를 이용해 물을 품어내고 있다. 우측사진은 1964년 1차 발굴당시 이용희 선생의 집 마당 모습이다.
발굴대장이었던 최순우 국립박물관 과장은 10월 3일 1차 발굴이 완료된 후 대구면 우체국으로 갔다. 김재원 당시 국립박물관장에게 전화로 발굴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비가 내렸다고 한다. 최과장은 우비를 쓰고 우체국으로 가 전화로 발굴성과를 보고한 후 각 언론사에 연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즉각적으로 기자들이 내려왔다. 10월 5일부터 각 일간지에 대서특필한 제목들이 쏟아졌다. ‘햇빛 보게 된 불멸의 문화재’ ‘청자의 갖가지 수수께끼와 속 모습을 해결’ ‘밝혀진 청자의 진실’ ‘청기와 900년만에 베일 벗어’...

마술같은 사당리 발굴은 계속됐다. 1966년 11월에 계속된 2차발굴에서 귀면(鬼面: 귀신의 얼굴을 그린 장식 기와. 잡귀나 재앙을 막기 위하여 사래 끝에 붙인다)으로 보이는 2개의 파편과 용마루 끝에 붙이는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사당리 기적은 1968년에도 계속됐다. 그 해 진행된 4차 발굴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청자타일이 대량으로 쏟아졌다. 청자타일은 청자기와 만큼이나 대단한 유물이었다. 타일은 지금도 그렇듯이 건물의 외벽을 꾸미거나 목욕탕 같은 실내장식을 위해 사용하는 고급스런 장식재이다.

고려시대에 이미 청자로 된 타일이 사용됐던 것이다. 당시 발견은 청자기와 발견에 이은 두 번째 대 발견이었다. 발굴단은 청자타일의 이름을 청자전(靑磁塼)이라고 이름 지었다. 청자전은 퇴적층의 첫 층이 끝나는 지하 1m 정도의 깊이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타일의 무늬는 불교 문화를 상징하는 연화가 많이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전성기때 청자타일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타일은 사찰을 비롯한 고려건축물의 바닥을 장식할 때 쓰인 물건으로 확인됐다.

당시 학계에서는 청자타일 발견에 대해 고려시대에 건물의 바닥에 까지 그토록 섬세한 청자를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청자타일에 당초무늬와 모란무늬등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것은 모두 신라시대의 유약을 한층 발전시켜서 이루어진 세련된 작품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청자타일은 그후 고려사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발견됐다. 최씨 무신정권이 세운 강화도 선원사와 고려왕실의 직속 사찰이었던 경기도 파주시 해음원이란 사찰 발굴과정에서 청자타일이 나왔다.

1964년 7월 시작된 대구 사당리 이용희씨집 요지발굴은 66년 11월, 68년등 네차례의 발굴을 마치고 일단 중단된다. 당시 사당리 발굴은 지표면의 유물을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발굴단은 사당리 주변에서 파편들은 무수히 수거했으나 정작 청자를 구워낸 온전한 모양의 가마는 찾아내지 못했다. 대구요지 발굴은 2~3년에 한차례 정도씩 진행됐으나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강진군은 65년 군립도서관에 청자자료전시실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청자는 다음해부터 군정의 주요 시책에서 밀려 발굴작업은 물론 아무런 보존대책도 없이 방치되어 버렸다.

이후 유실된 청자파편들이 엄청나다. 64년 발굴작업 이후 주민들 사이에 사금파리(청자파편)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편을 모아 관광객들에게 파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골동품상들이 트럭으로 사금파리를 구입해간 경우도 있었다.

당시 35세였던 이용희씨가 청자발굴터 주변에 줄을 쳐서 주의를 상기시키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 68년 여름 대구 요지는 하나의 전기를 맞는다.

1968년 여름은 대 한발이 엄습했다. 논에 물은 부족했고, 논바닥은 갈라졌다. 그런데 한번은 이용희씨가 집앞의 논(지금의 청자박물관 자리)에 물을 대는데 아까운 물이 자꾸 한귀퉁이로 자꾸 빠져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을 파보았더니 가마터였다. 가마터의 공간으로 물이 흘러 들어간 것이다. 이씨는 즉시 국립중앙박물관에 이를 신고했다. 그 후로 부터 7년 후인 1973년 11월 정양모 당시 국립발물관미술과장을 단장으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다.

조사단은 이용희씨의 논과 주변밭 4개소를 지하 40㎝ 정도 직사각형으로 파가다가 가마의 벽을 찾아냈다. 고려청자의 산실이 900여년만에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발굴 가마는 길이 630㎝, 폭은 143㎝ ~151㎝로 지하에 잠겨 있었으며, 밑바닥은 약 25~30도정도 경사가 져 불길이 가마의 윗부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첫 가마 발굴을 기점으로 강진군은 사당마을과 미산, 계치, 용문, 용운리, 정수사등의 일대 20만평을 보호구역으로 정하고 이 중 중요한 2만평을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이후 청자요지 보존과 발굴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으면서 청자는 단순한 발굴에서 가마를 복원해 청자를 재현하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나오게 된다. 당시 발굴된 청자편들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지고 갔다. 그후 오랫동안 우리는 그것들을 만나지 못하다가 이번에야 그것들을 다시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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