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건너 온 바다 끝에 오마지간 마량이 있다

마량 숙마마을에 가면 지금도 제주 화산석이
고려 문종 27년(1073)에 제주마 공물 바친기록
조선왕조실록에 1871년 중반까지 공마 거론기록
‘배가 육지에 닿아서 말이 내리면...’ 다산선생도 기록

제주도 한라산 기슭에서 방목되고 있는 제주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마량면 숙마마을에 가면 정원을 아담하게 두르고 있는 조그만 돌덩이들이 주인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한다. 정원에만 눈길을 주다보면 지나치기 쉽지만 돌덩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종자가 영 다른 돌덩이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런저런 모양을 한 특유의 강진돌 틈새에 구멍이 뻥뻥 뚫린 시커먼 돌이 박혀 있다. 제주 화산석인 현무암이다.

강진 마량에서 발견되는 제주 화산석. 시커멓고 구멍이 숭글숭글 뚫려있는 이 현무암들은 강진과 제주의 교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물과 같은 것이다. 숙마마을 앞은 요즘 넓은 들판으로 바뀌었지만 일제강점기 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때까지는 배가 마을 앞까지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

제주의 말이 언제부터 마량을 통해 육지로 건너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미 고려 문종 27년(1073)에 제주마를 공물로 바친 기록이 있으며 조선 태조 7년 1398년에 ‘제주(濟州)에 명하여 세공마(歲貢馬) 1백 필과 소 1백 두(頭)를 바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공출마는 강진의 마량과 해남을 동시에 도착지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11년(1429) 제주사람 고득종(高得宗) 등이 상언한 내용에는 공출마를 체계적으로 사육하기 위해서 한라산에 목장을 축조해야 한다는 것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주에서 도망하여 온 사람을 끝까지 가려내기 위하여 하륙(下陸)하는 초입인 해진(海珍) 경내(境內)인 입암(笠巖)·어란(於蘭) 두 곳에 관(館)을 설치하고…”

일단 해진(지금의 해남)을 하륙의 초입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1400년도에 해남지역이 제주도 말이 도착하는 입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진에서 마량(馬梁)이란 지명이 역사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도 세종 6년 때인 1429년이다. 지명의 의미만을 두고 볼 때 비슷한 시기에 마량에 이미 제주마가 도착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보다 앞선 태종 7년(1407)에는 제주에서 조정에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린다. “매년 육지로 나가는 마필(馬匹)은 여러 날 동안 배에 실려서 풍도(風濤)에 시달렸는데, 육지에 내리는 날에 물을 마시는 것이 절도를 잃어서, 이로 말미암아 병이 나서 가을이 되면 많이 죽으니, 비옵건대, 바다 어구에 성(城)을 수축하고 풀을 쌓아 두었다가, 육지에 내리는 날에 성(城) 안으로 몰아넣어 다만 풀다발[草束]만을 주고, 이튿날에 이르러서 이를 흩어놓아 물을 마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제주에서 육지로 건너간 말이 쉬면서 현지에 적응할 수 있는 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량과 대구 사이에 있는 마유성터. 제주에서 수송되어 온 말들이 육지 적응훈련을 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1400년 이전에 말들이 바다를 건너왔지만 풍토병에 시달리고 물마시는데 절도를 잃어서 죽게 되는 말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50여 년 후에는 강진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보인다. 단종 1년(1453) 조선왕조실록에는 의정부에서 “전라도 강진현(康津縣) 계참곶이[界站串]는 둘레가 90리(里)이고, 토산이 비후(肥厚)하고 물과 풀이 모두 족(足)하여 말 1천 필을 놓아 기를 수 있으니 목장을 설치해야 한다”고 청한 내용이 나온다.

단언할 수 없으나 마량면과 대구면의 경계지점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담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기록이다. 이런저런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조선초기부터 제주에서 강진의 마량이나 해남의 어란진 등으로 실려오는 공마가 있었으며, 초기에는 송출작업이 질서없이 진행되다가 1400년대를 전후해서 한라산에 목장도 축조되고, 육지에는 말이 쉬어갈 목장도 만드는 등 체계적인 공출마 수송시스템이 정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마지간(五馬之間)이라 불리는 마량의 원마(元馬), 숙마(宿馬), 원마(垣馬), 백마(白馬), 음마(飮馬) 등의 마을과 지명도 이때를 전후해서 생겨났다고 보면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마량에서 대구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거대한 돌담을 만난 적이 있다.

길이는 대구 남호마을 해변에서 인근 구곡마을을 거쳐 봉대산을 지나 장흥대덕, 회진으로 이어지는 장장 30리가 넘는 돌성이었다. 이 범위는 마량을 완전히 포위하는 형국이다. 돌성은 대부분 파괴되고 아주 띄엄띄엄 흔적이 남아 있지만 무언가를 막기 위한 기능이 있었다는 것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말이 넘어가는 것을 막는 돌성일까. 제주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말들은 마량에 도착할 즈음이면 초주검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한양으로 수송되기 전 일정기간 육지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다. 마량에서 말을 가두고 풀을 먹일 공간이 필요했는데 30리가 넘는 울타리를 치고 말들이 마음껏 풀을 뜯게 했던 곳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돌성은 거의 보존되지 않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사람들은 도로 개보수용으로 성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 수수께끼도 많다. 마량지역에 말을 풀고 가두려면 성의 남쪽 부분이 깎아지듯 해야하는데 곳에 따라 계단을 만들어 마량쪽에서 쉽게 넘어갈 수 있게 했다. 이름도 많다. 마유성이란 설도 있고, 계치성이란 말도 있다. 이 돌성에 대한 보존책과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말은 요즘에 역할이 거의 사라졌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유일한 육로 이동수단이었다. 요즘에는 도로가 얼마나 잘 갖추워져 있느냐가 국가의 중요한 경쟁력 중의 하나이지만 조선시대때 까지만 해도 전국에 갖춰져 있는 마방이 도로망 구실을 했다.

2005년 6월 초 제주도축산진흥원이 제주에 말이 도착한 지 730주년을 기념해 강진에 기증한 조랑말 두필은 요즘 옛 강진농업고등학교인 전남생명과학고등학교 목장에서 잘 크고 있다. 탐돌이와 탐순이란 이름을 가진 이 조랑말은 당초 마량 숙마마을에서 사육됐으나 2008년 3월 이사를 했다. 민간인이 키우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탐돌이와 탐순이가 처음 살았던 숙마마을은 예전 제주도의 말들이 한양으로 가기 전에 잠을 잤다는 곳이다. 숙마마을 주민들은 말의 숫자가 많아져 마을주민들이 잘 키우면 새로운 소득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럼 제주의 공출마는 언제까지 바다를 건너왔을까. 조선정사에는 1871년 중반까지 공마를 거론한 기록이 마지막으로 보인다. 이를 근거로 하면 제주에서 말이 남해바다를 건너 강진이나 해남에 도착했던 역사는 조선이 건국해서 조선이 무너질 직전까지 계속됐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제주의 말은 그후 육지에 나오지 않았을까. 국가에 헌납한다는 공출마의 이름으로 건너온 것은 사라졌겠지만 개인간의 거래는 근세까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초반까지 호남 서남부지역의 큰 어물센터였던 강진읍 남포마을은 제주에서 사온 조랑말이 상인들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김풍수(2008년 현재 67세)씨의 증언에 따르면 어물상인들은 달구지를 타고 전남 일원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기 때문에 말이 중요한 이동수단이었다.

말을 살 때는 여러 사람이 돈을 내서 돛배를 대절한 다음 5~6마리씩을 제주에서 구입해 왔다. 말의 가격은 굉장이 비싸서 보통 한 마리에 논 3~4마지기 값을 지불해야 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말이 끄는 달구지가 일상적인 것이어서 강진읍에는 말발굽을 만드는 대장간이 다섯 군데가 넘었다. 

목장관 제주의 아름다운 한라산 중턱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 마목장이 있다. 주차장과 맞닿아 있는 목책너머에 조랑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제주도 말의 유래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그러나 제주의 구석기 유적에서 50만 년 전 사람과 말의 뼈가 발견됐고 탐라국 개국신화에 벽랑국에서 온 3명의 공주와 망아지, 송아지, 오곡의 씨앗이 목함에 들어있다는 설화 등을 감안할 때 이미 청동기시대에 말이 제주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도가 마산지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원종 14년(1273) 원나라가 제주에 탐라목장을 설치했고, 충렬왕 2년(1276년)에 몽고 말 160필이 들어오면서부터다. 조선시대 이후 일본 강점기에도 제주마는 군마로 활용할 말의 품종개량 등으로 한 때 사육두수가 2만여 필이 되었으나 한국전쟁의 영향, 농기계의 보급 확대로 말의 이용가치가 크게 줄면서 그 수가 급감하게 됐다. 축산진흥원 마목장은 제주도가 제주말의 혈통을 보존하고 육성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마목장의 면적이 91㏊에 이르고 여기에서 방목되고 있는 말의 숫자는 170여 마리다.

제주도의 자료에 따르면 제주도의 말 사육수는 2005년 12월 현재 587가구에서 1만1천689마리에 이른다. 이는 전국의 말 사육두수의 70%에 해당되는 수치다. 이중에서 경주마가 3천200여 마리이고 순수혈통마로 등록된 규모가 590, 제주산마가 1만800여 마리 등이다. 

이중에서 순수혈통말로 등록된 말은 590여 마리이다. 제주말은 1986년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돼 2004년 12월 현재 70마리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여기에 관광승마장 23개소가 1천400여 마리의 말을 기르며 성업중이고, 한국마사회 제주경마장 조랑말 600여 필과 개량마 400여 두가 사육되는 등 전체적으로 1만4천여 마리의 말을 키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가위 말의 섬이다.

또 지난 1990년 북제주군 애월읍 유수암리에 21만평 규모로 세워진 제주경마공원은 제주도의 효자 수입원이다. 지난 2005년 말 입장객 수가 38만 명에 달하고, 직간접 고용이 1천명에 이른다. 주목을 끄는 것은 2005년말 지방세(도세) 납부액이 608억원으로 제주도 지방세 수입액의 24.8%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엄청난 규모다. 2005년말 제조경마공원의 수익은 1천917억원에 달했다.지금은 이렇듯 제주말이 제주도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지만 200여 년 전까지는 무대가 전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말의 생산은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나라의 부는 말의 수로써 결정된다’고 말할 정도로 말은 중요한 존재였다.

그토록 중요한 말들이 제주도에서 험난한 바닷길을 지나 한양까지 가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다. 제주도는 조선 선조 27년(1594년)에 제주출신 고득종의 건의로 목마장을 10소장으로 나누고 목장관리 총책임자를 제주목사, 제주판관과 정의현감은 감독관직을 겸임토록 하는 등 제주의 목마장 관리가 체계화되었다. 이후 제주말은 1700~1800년대까지 목야지를 13개 목구로 구분해 방목하며 매년 400~600필을 한양으로 송출했다.

정조 18년(1794년) 공마보초등록(貢馬報草謄錄)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공마선은 10척이 운용됐으며 배의 크기는 4~6 파(把. 1파는 어른이 두 팔을 편 길이)정도이고, 한 배에는 28~33 마필이 올라탔다. 이 배를 육지까지 몰고 갈 사람(格軍)도 당연히 필요했다. 배의 노를 젓는 격군만 소선은 34명, 중선은 37명, 대선은 43명이 올라탔고, 여기에 영선천호(領船千戶), 압령천호(押領千戶), 선장(船長), 사관(射官) 등이 각각 한 명씩 승선했다.

공마선은 조천관과 별도포(현 제주시 화북동 화북포구), 어등포(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도근천, 애월포 등에서 출발했다. 육지까지의 소요시간은 풍랑에 따라 순풍에 해당되는 정남풍에는 12~24시간이면 가능했으나, 일반적으로 2~4일, 이보다 심할 때에는 5~10일을 바다에서 파도에 밀려 이리저리 헤멜 수도 있었다.

육지에 도착한 공마는 각 지역에서 징발된 견마군(牽馬軍)에 의해 나주~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이송됐으며 시간은 1~2개월 정도가 소요됐다. 제주말은 한때 2만 마리까지 길러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덕지 소장이 소개한 각종 자료에 따르면 세종 11년에 제주사람 김만일은 말 500필을 조정에 헌마해 벼슬을 제수 받았다.

그런데 500필이란 규모는 간단한 숫자가 아니다. 당시에 공마로 선택될 수 있는 말은 숫말뿐이었다. 더욱이 공마는 최우량 말만 뽑혔다. 김만일이란 개인이 최소한 2천여 마리 이상을 키우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장덕지 소장은 이런저런 규모를 따져볼 때 제주에서 말이 많이 키워질 때는 최소한 2만 마리대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중에 매년 700마리 정도가 엄선돼 육지행 배에 올라타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공마제도는 1800년대까지 계속됐다.

공마를 선택하는 과정은 복잡했다. 중앙정부가 제주목사에게 공마지침을 내려보내면 목사는 제주지역 3개읍 지역 감목관(제주판관, 정의현감, 대정현감)에게 할당량을 배당했다. 감목관들은 생후 3~4세의 말을 선발해 잘 키운 다음 4~6세가 되면 소속 읍에 징발토록 했다. 이렇게 징발된 말은 제주목사가 최종 확인을 했을 때야 육지행이 가능했다.

지금 국립제주박물관 마당에는 덕판배가 전시돼 있는데 공마선의 모형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배에 20~30마리의 말이 올라탔다. 배 아랫부분에는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제주 화산석을 수북히 실었는데, 육지에 도착한 배는 말과 함께 화산석도 내려놓고 갔다.

요즘 마량 숙마마을 등에서 발견되고 있는 제주 화산석은 이렇게 해서 강진에 내려진 것이다. 말을 실은 공마선이 제주에서 육지로 올 때는 강진 마량에 도착할 때도 있고, 해남으로 들어갈 때도 있었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지은 목민심서에는 말이 육지에 도착해 일어나는 일들이 소개돼 있다.

‘배가 육지에 닿아서 말이 내리면 제주사람들은 돌아가버렸다. 이 때문에 말을 다룰 줄 모르는 육지사람들은 말을 놓치기 일쑤였고, 말들이 부상을 입어 골절을 당할 때도 부지기수였다. 이에 따라 여러 고을에서 돈과 곡식을 거두어 제주사람들에게 주면서 서울까지 말을 몰고 가도록 간청해야 했다.

돈과 곡식이 마음에 충족되지 않으면 말을 흩어지게 하여 벼와 보리를 짓밟게 하면서 며칠을 두고 나가지 않았다. 말이 도착한 지역의 현감까지 나서 관복을 갖춰 말을 맞이할 정도가 되어야 제주사람들은 말을 일부러 흩어지지 않게 했다.

이 대목을 보면 공출마를 육지까지 실어온 제주사람들의 자부심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는 공마수송의 국가적인 운송체계가 부재했고, 상당 부분을 현지 주민들의 임시변통식의 부담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산선생은 1801년~1818년까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때는 제주 공출마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때이기도 했다. 다산선생은 마량에 들어온 공출마를 보면서 목민심서에 이 내용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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