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가 지켜주고, 가우도가 가려주고… 강진만은 천혜의 요새였다

강진만 관문 완도의 장도는 장보고의 군사기지
그곳에서 가까운 대구는 고려청자 만들었던 곳

강진만 한가운데 있는 비래도의 모습이다. 갖가지 전설이 내려온다.
강진만 기행을 계속해 보자. 대구 저두마을은 건너편 가우도를 잇는 출렁다리가 세워졌다. 풍수지리가들은 이런 말도 한다. 강진은 전체적으로 소의 형국을 하고 있다. 강진읍의 뒷산이 우두봉이다. 소가 앉아 있는 형국이다. 일을 해야 강진이 발전할 텐데 말이다. 소는 목에 멍에를 걸어야 일어나 일을 한다.

가우도에 다리가 놓이면 소의 등에 멍에를 이어준 형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강진이란 소가 벌떡 일어나 밭을 열심히 갈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강진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는 풍수이야기다. 풍수이야기를 생각하며 가우도를 지나간다. 서쪽으로 덕룡산의 하얀 바위가 줄을 지어 따라오고 있다. 이제 바다는 더 넓어진다. 바닷물의 색깔도 푸른빛을 더해간다. 수심도 깊어진다.

멀리 보이는 섬이 바로 비래도(飛來島)이다. 비래도는 대구 계치산 아래 계치마을에서 알산으로 불리는 다섯 개의 작은 산봉우리가 이어지다가 마지막 한 개가 떨어져 있는 섬이다. 신전면 벌정리 소속으로 면적이 1천3백56㎡인 무인도이다. 강진에서 마량을 가다보면 대구 저두리 인근에서부터 운전자들의 눈에 띄는 이 섬은 나무가 없는 민둥섬이어서 원래 식물이 자라지 못한 곳이라 생각된다.

비래도를 지나 조금 내려가면 이제 본격적인 바다가 펼쳐진다. 좌측으로 마량 앞바다가 펼쳐지고 우측으로 넓은 신전 앞바다가 열려있다. 사초리 앞바다에 마치 솥뚜껑 같은 복섬이 뽕긋이 솟아 있다.

사초리 앞 복도는 미산 앞바다와 장보고 청해진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완도 장도의 중간쯤이다. 다시 배가 온 뱃길을 고개 돌려 바라다 보았다. 넓은 강진만은 오묘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다. 멀리서 보면 가우도가 수문장처럼 서있고 뒤쪽에는 칠량 구로와 도암 해창이 제 2관문이나 마찬가지다. 강진만은 2중으로 보호막이 설치돼 있는 셈이다.

가우도 오른쪽 허리쯤에 대구 미산 앞바다가 보인다. 청자가 실려 나가던 곳이다. 장보고가 강진만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장도에 청해진의 본거지를 설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 여러 학설은 장도의 위치가 동쪽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적들을 방어하기에 최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으로 무역선을 출발시키기에 좋은 장소라는 말도 있다. 그것과 함께 청자가 생산되는 강진만을 지켜야 하는 절박감도 장도를 본거지로 삼게 한 큰 이유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완도군 보길도에서 바라본 추자도쪽 모습이다. 멀리 보이는게 추자도다.
뱃길은 이제 완도해역으로 접어들면서 분기점을 만난다. 남쪽으로 가면 완도 사수도를 거쳐 완도읍으로 들어간다. 제주도로 가는 길이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완도 고마도 서쪽 해안을 거쳐 해남 북일면 해역으로 접어든다.
 
이 뱃길은 해남 북평면 해역을 지나 남창을 통과해 해남 땅끝으로 가는 길이다. 땅끝으로 가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소안도, 보길도로 가는 것이고 서쪽으로 그대로 올라가면 서해안을 거쳐 개경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렇듯 이 일대는 동서남북의 해로가 엇갈리는 교차로이다. 북쪽으로는 강진만, 동쪽으로는 마량, 남쪽으로는 제주도, 서쪽으로는 해남 땅끝을 거쳐 개경으로 가는 뱃길이다. 이같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바닷물의 흐름이 가장 활발해서인지 주변에 해산물이 풍부하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바다와 가까운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에는 엄청난 크기의 묘가 있다. 언뜻 보면 작은 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체 길이가 76m에 이른다. 높이도 10m 정도에 달한다. 이 정도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고분 중 최고 크기라고 한다.

묘의 모양이 악기 종류인 장고(長鼓)를 닮았다고 해서 장고봉 고분(長鼓峰 古墳)이란 이름을 붙였다. 장고봉고분은 전남도기념물 85호로 지정돼 관리받고 있다.

이 고분은 삼국시대를 전후해 이 일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한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자주 배웠지만 고대 묘의 규모는 왕의 영향력을 의미한다. 아쉽게도 장고봉 고분은 상당 부분 도굴돼 당시 지배층의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지난 2000년 9월 국립광주박물관이 조사한 결과 갑옷과 옥으로 만든 장식품 등이 나왔다고 한다.

이 남쪽 끝 바닷가에 지배세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마도 강진만을 가장 깊숙한 곳에 두고 남해 바다와 서해 바다, 동해 바다를 모두 관할할 수 있는 사통팔달의 이 일대가 지배세력이 둥지를 틀기에는 안성마춤이었을 것이다. 이 일대는 그 조건이 만만치 않다.

지금은 바다가 많이 메워져 버렸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신전면 영수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갔다. 적당한 갯벌과 함께 엄청난 수산자원이 산재해 있었다. 곳곳에서 민물이 유입돼 바닷물과 섞이는 곳이어서 이곳의 수산물은 최고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금도 영수리와 가까운 바다에서 나오는 굴과 파래 등은 최고로 꼽힌다. 마을 뒤쪽에는 도암 만덕산에서부터 내려온 덕룡산 자락이 튼튼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 일대는 겨울에 따뜻하고, 봄이 빨리 오는 지역이다.

별다른 생산수단이 없던 삼국시대에 인간이 자연에 의지해 살아가기에는 최고의 조건을 가진 셈이다. 영수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장고봉 고분과 거의 똑같은 무덤이 지금의 영수마을 입구에도 있었다. 크기도 비슷했다. 봉분의 크기가 하도 커서 꼭대기에는 한 주민이 밭을 만들어 작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봉분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며 놀았다. 그렇게 고분은 주민들의 생활속에 있었다. 그러다가 70년대 경지 정리를 하면서 감쪽같이 봉분이 사라져 버렸다. 불도저가 천년이 넘게 내려온 고분을 밀어버린 것이다.

불도저가 고분을 밀어낼 당시 갑옷과 녹슨 칼 등이 나왔다고 하니 잃어버린 세월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정도에서 강진만 기행은 매듭을 지었다. 앞으로 뱃길 여정은 강진에서 차량을 이용해 완도항까지 가서 그곳에서 청산도에 들르고, 다시 완도의 화흥포항에서 소안도와 보길도를 가게 될 것이다.

보길도는 제주와 호남의 해양교류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과거 항해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목측 항해, 다시 말해 뱃사람들이 목적지를 눈으로 보면서 배를 몰던 방법이 일상적이었다.

보길도는 육지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이 섬 저 섬을 보면서 도착할 수 있는 중간기착지이자, 이곳에 도착하면 추자도가 눈에 잡힐 듯 들어왔고 추자도에서는 다시 제주도가 보이는 곳이어서 제주도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길목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완도에서 보길도로 가는 길은 두 곳이다. 하나는 해남군 땅끝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완도 화흥포항에서 여객선을 타는 것이다. 배는 1시간~1시간 20분이면 소안항과 노화항 등을 거쳐 보길도 청별항에 도착한다.

이 일대는 노화도·보길도·횡간도·당사도 등의 섬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룬다. 크고 작은 섬들이 좁은 간격을 이루며 덕지덕지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이 일대의 바닷물은 급하다. 바닷물은 바위와 부딪치며 힘을 얻는다. 남지나해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해류와 중국 동해에서 내려오는 해수띠가 추자도 주변을 중심으로 소안군도의 섬을 때리고 있다.

소안군도를 비롯한 제주해협 일대는 이처럼 위험한 곳이다. 특히 추자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남서해안 해류는 복잡한 곳이다. 적도해역에서 만들어진 흑조해류(黑潮海流)로부터 황해원류수와 중국대륙 연안이나 우리나라 남해안, 황해 등에서 만들어진 중국대륙연안수, 한국남해연안수, 황해저층냉수 등의 여러 가지 다른 수괴(水槐)가 분포해 있고 이들 수괴들은 분포범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아니라 계절이나 해(年) 또는 지역에 따라 그 분포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 해역의 해황을 획일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과거 순수한 자연환경에 의지해 살아야 했던 우리 조상들이 이 일대 바다에서 얼마나 힘든 삶을 영위했는지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말이다.

보길도는 추자도와 가장 가까운 유인도이다. 직선거리로 18㎞다. 그 사이에 바다가 있다. 2007년 10월 30일 오전 보길면 보옥마을. 이 마을은 보길도의 최남단 지역이다. 흐린 날씨였지만 남쪽으로 수평선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맑은 날은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곳이다. 추자도는 바다 중간에 그림처럼 떠 있었다.

추자도와 가장 가까운 보옥마을은 추자도와 교류도 가장 많은 곳이었다. 목재만이 땔감이던 시절, 추자도 사람들은 땔감을 찾아 보길도로 넘어왔다. 산이 많은 보길도는 나무 천지였다. 이렇게 볼 때 추자도 사람들은 땔감은 주로 가까운 섬에서 구하고, 식량이나 기타 김발에 사용할 대나무 등은 강진읍 남포로 나와 구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강진의 남포주민들과 추자도 사람들은 활발한 교류를 했다. 남포마을에는 추자도에서 시집 온 사람들이 여럿이고, 추자도에 가면 강진 남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과거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섬과 육지의 교류는 오히려 지금보다 많았던 것이다.

추자도는 ‘추자멸젓’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보옥리에서는 마른 멸치를 만들고 있었다. 자잘한 멸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냈다. 그것을 대바구니에 말리면 마른 멸치가 됐다.

재미있는 것은 보옥리와 추자도 사이 바다가 18㎞ 정도에 불과하지만 추자도에서 잡히는 멸과 보길도 인근에서 잡히는 멸의 맛이 다르다는 것이다.

보옥마을은비교적 큰 어촌마을이다.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이 곳의 개발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마을 앞 보죽산 주변에서는 커다란 방파제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곳이 완공되면 제주로 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방파제 너머로 멀리 바다 위에 커다란 상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곳은 부산과 인천, 일본과 중국 등을 이어주는 가장 가까운 항로이다.

보길도는 인근 소안도와 함께 제주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과거 바람에 의지해 풍선을 타고 제주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바람이 불면 보길도나 소안도에 잠시 쉬면서 좋은 바람을 기다렸다. 옛말로 후풍처(候風處)란 곳이다. 지금은 청별항이 보길도의 주 항이 됐지만 예전에는 청별항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황혼포구가 거대한 포구였다.

지금 활성화돼 있는 완도~제주 직항은 1970년대 후반에 생겨난 것이다. 그 이전에 풍선을 타고 다닌 사람들은 강진의 남포나, 해남 화산면의 관동리 관두포, 해남 북평면의 이진(이곳은 조선시대 때 영암 땅이었다) 등에서 출발해 중간에 보길도나 소안도 등을 거쳐갔다. 이를 테면 중간 기착지다. 물론 날씨가 좋으면 당일에 제주에 도착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보길도나 소안도에서 하루 이틀 묵어갈 때가 많았다.

보길도를 유명하게 한 고산 윤선도 유적도 고산이 인조 15년(1637년) 2월 제주도로 들어가다 이곳의 경치에 푹 빠져 자리를 잡은 곳이고, 보길도 백도리에 남아 있는 우암 송시열 글씨 또한 제주 유배지로 떠나던 우암선생이 이곳의 절경에 반해 그의 한스러운 마음을 시로 남겨놓은 곳이다.

보길도 청별항에서 동쪽으로 길게 드리워진 섬길을 따라가면 길의 끝머리에 거대한 바위가 있다.
송시열 선생은 절규한다.
 

83세 늙은 이몸이,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한마디 말이 어째 큰 죄가 되어, 3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남쪽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초구에 옛 효종의 은혜 서려 있어 ,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
 

늙은 나이에 유배길에 오른 것도 원통할 터인데, 파도마져 험난한 남쪽 바다를 앞에 두고 팔순이 넘은 노인은 얼마나 많은 회한이 교차했을지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1689년 유배길에 강진에서 배를 타려고 했으나 바람이 불어 몇 일을 쉬어가야 했다. 송시열 선생은 이때 백련사에 잠시 머물면서 대중들에게 강론을 한다. 그것을 기념해 세운게 지금 강진읍 교촌리에 있는 남강서원이다.

아마도 송시열 선생은 강진에서 순풍을 기다려 배에 올랐으나 다시 풍랑을 만나 보길도로 피신했나 보다. ‘남녘 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라는 싯귀에 그의 답답한 마음이 베어 있다. 송시열은 그해 제주도에 들어갔으나 국문을 받으러 오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다시 한양으로 가는 길에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요즘 보길도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도 좋지만 보길도 곳곳에 남아 있는 유배와 표류 유적이 커다란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돌고 도는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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