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의 외창 남포, 제주도를 포함 53주 6진을 총괄했다

남포마을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300여가구
내륙깊은 곳의 큰 포구, 수백년 동안‘관문’기능

강진읍 목리 앞바다는 탐진강이 강진만 구강포로 들어가는 가장 큰 길목이다.
강진읍 남포마을은 결국 모든 배들이 끊겼다. 요즘에는 1~2톤 사이의 작은 고깃배들이 바다를 오갈 뿐이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포마을의 가구는 300여 가구에 달했으나 지금은 90여 가구에 불과하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90여 가구란 숫자는 요즘도 적은 규모는 아니다. 남포는 그렇게 큰 포구였다.

남포는 내륙 깊숙이 들어있는 만큼 폭풍우로부터 매우 안전한 곳이다. 이곳에서 내리면 강진읍 보은산 서쪽 끝자락인 시끄테를 통해 영암, 목포, 광주 등지로 곧바로 나갈 수 있다. 남포에서 동북쪽으로 약 2.5㎞정도 떨어진 탐진강 하구에 백금포란 포구가 있으나 이곳은 일제강점기부터 개발된 곳이다. 백금포에서 작천면 까치내재를 넘어가는 도로는 일제강점기 때 개통됐다. 일제는 작천의 쌀을 원활하게 빼내기 위해 지금의 군동 영포~까치내재~작천에 이르는 전용도로를 개설했다고 한다.

남포에는 조선시대 병영의 외창(外倉)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 갑인년(1794)의 기록에 “병영의 외창(外倉)이 강진(康津)의 남당포(南塘浦)에 있는데 그 창고의 3천여 석이 넘는 각종 곡식을 주민들에게 환곡으로 나누어주었다”고 하고 있다. 1석은 80㎏ 벼 한가마다. 80㎏ 벼 3천가마를 환곡으로 돌릴 정도면 기본적으로 그 몇 배의 군량미를 비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창고는 각 지역에서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막대한 양의 군량미를 저장했을 것이다. 특히 남당포에 병영 외창이 있었다는 것은 남당포에 규모 있는 배들이 자유롭게 입출항할 정도의 선창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주도를 포함해 53주 6진을 총괄했다는 병영의 외창이 남포에 있었다는 것은 16세기 후반에도 남포가 군사적, 해양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전략지역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호남연해형편도(嶺湖南沿海形便圖,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따르면 강진현에 소속된 포구가 15곳이었고 남당포에는 100여 척의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는데, 이는 조약도(300척, 지금의 완도군 약산면), 궁항도(300척)에 이어 세 번째 크기의 포구였다.
 
마량의 마도진 선창에는 10척, 고금도 선창 10척, 신지도 선창에는 9척의 선박이 정박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내륙 깊숙이 있는 남당포의 정박가능 선박수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남당포는 강진에서 제주도로 왕래하는 길목으로서, 병영의 군량미를 비축하는 기지로서, 각종 상선이 대규모로 정박할 수 있는 항구로서의 핵심적인 기능을 가져왔던 것이다.

지금은 갈대만 무성한 남포 앞바다에서 발통선을 탈 수 있다. 병영의 외창도, 100여 척의 상선도, 제주로 들어가는 배도 사라진지 오래다. 남포 앞은 이제 바다라고 할 것도 없이 동쪽의 금강천이 밀물과 썰물에 따라 물이 불어났다 빠졌다를 하루에 몇 차례씩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1679년 남당포에서 제주로 들어간 이증(李增)의 항로를 그대로 따라가보기로 했다. 이증이 항해한 가우도~비래도~복도~사후도~가리포~백일도~소안도~제주도 화북 방호소 포구로 이어지는 항로는 강진에서 제주로 들어가는 가장 일반적인 항로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포마을의 서쪽 다리 밑에서 배에 올랐다. 남포마을 앞에는 갈대밭이 무성하다. 갈대밭 주변 강둑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강진읍 남포마을에서 한 주민이 생선을 말리고 있다.
갈대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소금기 있는 땅을 좋아한 탓에, 민물도 싫어하지 않는 탓에, 육지에서 멀리 떠나있기 싫어한 탓에 사람이 사는 땅과 가까운 곳에 몸을 붙이고 그렇게 대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배가 움직였다. 갈대밭 사이로 서기산에서 내려온 강진천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건너편으로 군동 금사봉이 아름답다. 금사봉은 마치 갈대밭에서 솟아 오른 것 같다. 아침나절 금사봉쪽에서 솟아오른 햇볕이 갈대의 솜털을 간지럽히면 갈대들은 일제히 몸을 부대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남포 주민들은 갈대밭이 이렇게 무성한 게 50여 년은 넘었다고 했다. 남포 앞바다에 배가 들어왔던 해방전후 시기에는 갈대가 조금씩 군집을 이뤘으나 바다가 얕아지면서 뱃길이 끊겼다. 그후 배가왔던 길에는 무성한 갈대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갈대밭은 민물 때가 되면 갈대의 허리춤까지 물이 차오른다. 썰물 때가 되면 갈대의 뿌리가 보일 정도로 물이 빠져 나간다. 물이 빠져나가면 보이는 것은 갈대의 뿌리만은 아니다. 갈대의 허리에 남아있는 바닷물의 흔적이 애처러움을 더 한다. 그 사이를 흐르는 작은 줄기의 갯물이 삶의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배를 타고 강진만으로 진입하면서 느낀 점은 옛날 돛배를 타고 제주를 향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쓸쓸하거나 외롭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남해안에는 아기자기한 산과 섬들이 많다. 여기저기에 펼쳐진 풍경이 뱃사람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바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다르게 만드는 법이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자연은 육지의 그것보다 훨씬 경이롭게 보인다. 강진만 주변도 마찬가지다.

갈대밭 너머로 왼쪽으로는 금사봉이, 오른쪽에는 만덕산이 긴다리를 뻗고 누워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금사봉과 만덕산은 사람모양을 하고 있다.

금사봉은 요염한 여성이 긴머리를 뒤로 하고 비스듬이 누워 긴다리를 남쪽으로 뻗고 있고, 만덕산은 우람한 남성이 누워 역시 남쪽으로 긴다리를 펴고 있는 모습이다. 그 중간으로 강진만이 펼쳐져 있다. 갈대가 은빛 물결속에 춤을 추고 있다. 바다의 중심에 내가 있다.

갈대는 한때 땔감으로도 쓰였다. 요즘에는 가스와 연탄이 있기 때문에 목리나 남포사람들도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인삼밭 지붕이나 김 건조대로 사용하기 위해 종종 베어가는 사람도 있으나 그 수가 적지 않다고 한다.

조선시대 바닷길 통해 들어온 막대한 군량미 저장
군동 하신마을 앞 일대도 광활한 바다였다

그렇게 10여 분을 내려가다 보면 툭트인 강진만을 만나게 된다. 물살은 조금 급해진다. 동쪽에서 내려오는 탐진강 물줄기가 섞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강진만은 ‘Y’자 모양을 하며 동쪽에서 내려오는 탐진강과 서쪽에서 내려오는 금강천이 합수한다. 두 물줄기가 섞이는 곳은 지속적으로 퇴적물이 쌓이면서 커다란 무인도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 위에 갈대가 무수히 자라고 있다.

강진만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간척지 둑이 길게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마치 철로같은 일직선이다. 저 둑이 막아지면서 농토가 들어서 사람들은 쌀을 수확했다. 고픈 배를 채웠을 것이다.

간척지 둑을 제거하고 옛 바다를 그려 보았다. 동쪽으로 하신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출렁이고 있다. 서쪽으로는 기룡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일렁이고 있다. 칠량 구로마을 앞 국사봉과 건너편 도암 해창을 중심으로 강진만은 거대한 호수나 마찬가지다.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포근하게 했을까. 갖가지 아름다운 사연도 많다.

지금은 간척지가 되어버린 군동면 하신마을 앞들에는 조그맣게 솟아오른 산봉우리가 보인다. 말이 산봉우리지 언덕이나 마찬가지다. 이곳이 합섬이라는 섬이다.

군동 하신마을 앞 일대도 광활한 바다였다. 그냥 바다가 아니었다. 멀리 장흥 가지산에서 발원한 탐진강이 유유히 바다로 들어오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무진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신마을 앞에 드넓은 염전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염전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 푸른 보리가 이삭을 패고 산들거리고 있다. 지금은 운전자들이 무심히 지나는 그곳에 또 다른 역사가 있었다. 사비강. 죽고 없는 어머니를 사모하는 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신마을 앞 들녘의 합섬 주변의 바다를 사비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사연이 참 애달프다. 장흥 마씨의 24세손 형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큰 아들인 원형이 집 앞쪽의 큰 강물에 아우들과 어리(독살이나 어살, 석전 등과 같이 돌이나 대나무를 빙둘러쳐서 물고기를 잡는 장치)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아 어버이에게 바쳐서 고향사람들이 그곳을 사비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 막내인 원성은 어머니가 아파서 약을 구하려고 했으나 물이 불어나 바다를 건너지 못하자 뗏목을 만들어 강진읍쪽으로 건너가서 약을 구해왔다고 한다. 물고기를 잡던 곳은 지금의 합섬 서쪽 일대였을 것으로 현지 주민들은 보고 있다.

하신마을 앞 일대는 바다이면서 큰 강으로 통했다. 지금은 탐진강 하류가 건너편 목리쪽으로 형성돼 있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이쪽 하신마을쪽도 탐진강 하류에 속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후세의 주민들이 이곳을 자연스럽게 사비강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

합섬으로 들어가 보면 그럴싸한 광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북서쪽으로 강진읍이 훤하게 보인다. 북동쪽으로는 예전에 염전이었던 평야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이 작은 섬은 온통 바위덩어리라고 하지만, 야트막한 정상에는 나무도 자라고 있고, 주변에는 노란 유채꽃도 피어 있다. 오래전에 바닷물이 철석거리던 섬 주변에는 아직도 바위가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섬의 주변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마씨형제들이 부모님에게 드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어리를 설치했던 곳이다.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겨울철새가 먹이를 찾고 있었다. 강진만은 겨울철새의 천국이다.

경상남도에 사무실을 둔 한국생태연구소가 지난 2003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4차례에 걸쳐 강진만과 장흥, 보성, 고흥, 경남 남해군, 사천시 해역의 겨울 철새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겨울 한철 동안 강진만에는 총 61종 7천6백10개체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순천만을 제외하고 최고 수치로 나타났다. 겨울 철새의 규모 중에서 강진만은 천연기념물 201호인 고니의 숫자가 압도적이었다. 6개 지역에서 발견된 총 1천654마리의 고니 중 90% 넘은 1천4백80마리가 강진만에서 발견됐다.

한참을 내려가자 해창 앞바다이다. 동쪽의 행정구역은 군동에서 칠량으로 접어들고 서쪽은 강진읍에서 도암면으로 이어진다.

해창(海倉)은 조선시대 세곡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세곡선이 출발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너편 칠량 구로마을 뒷산은 국사봉(國祀峯)이다. 한양으로 세곡선이 출발할 때 국사봉에서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일대는 바닷물이 많이 얕아져 만조 시기가 되어도 큰 배가 다니지 못하고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 이 일대에는 허연 둔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퇴적물이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목포해양항만청이 해역복원사업을 해서 바닥을 많이 긁어냈지만 조족지혈이다.

배가 해창 앞바다를 지나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서쪽으로 만덕간척지의 둑이 보였다. 뒤쪽으로 만덕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간척지 둑이 없었더라면 바닷물이 귤동 앞까지 출렁였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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