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뜰 때 강진 고을 수령등 여러 사람들이 거문고와 노래로 작별했다

제주로 들어가는 일행 많을 때는 50여명
접대할 때 막대한 비용 현지인들 부담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 화북포구에 있는 비석거리. 이곳이 강진으로 오는 관문이었다.
조선시대때에는 강진과 해남, 영암이 1년씩 돌아가며 제주도로 들어가는 관리나 사신의 접대를 맡았는데 이를 도회지라 했다. 그런데 그 도회지 운영에 많은 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회지로 지정된 곳은 적지 않은 재정적 부담이 있었다. 관리들이 제주도를 오갈 때 한두 명을 이끌고 다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1577년 과거에 급제한 임제는 강진읍 남당포를 통해 제주도 목사를 하는 아버지 임진에게 인사를 가면서 6척의 배를 가지고 갔으며, 이보다 앞서 1488년 제주에서 근무하던 중 고향 나주에서 부친상을 당해 급히 해남으로 돌어오다 풍랑을 만나 13일간 표류해 중국 절강성 해안에 도착했던 최부 일행은 자그마치 43명이나 됐다.

남사록을 남긴 김상헌이 1600년 해남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갈 때는 좌선 한 척, 전라수사가 내준 호송선 네 척, 제주 새 판관 환후선 두 척, 전라병사가 제주원군을 보내는 병선 두 척이 동행했고 바다에서 먹을 양식은 영암, 해남, 강진 3개 지역에서 규정대로 백미 삼십 석을 준비해 보냈다. 김상헌의 일행은 총 38명에 달했다.

1679년(숙종 5년 기미) 9월 16일 제주 안핵 겸 순무어사로 임명되어 제주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러 가면서 제주도에 들어가던 이증(李增, 1628~1686)도 마찬가지였다.

이증은 10월 27일 한양을 떠나 11월 25일 강진에 도착해 강진의 금릉객사에 묵었는데 눈비가 자주 내려 열흘 가까이 제주 뱃길이 막혔다. 12월 6일 순풍이 불어 배가 남당포에서 출항했다. 군관 2명, 별파진 1명, 화공·서리 2명, 남자노비 1명, 강진공방 1명, 포수 1명, 문서직 1명, 격군 8명 등 53명을 태우고 들어갔다.
 
동행자들은 이증이 한양에서 데려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격군을 비롯한 상당수가 강진에서 자체 공급된 사람들이었다. 배가 뜰 때 강진 고을 수령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거문고와 노래로 작별을 했다고 하니 그 광경이 무척 경축스러웠겠지만 이들이 바람을 기다리는 11일 동안 강진지역 민관이 겪었을 폐는 엄청났을 것이다.

이밖에도 제주에서 공출마를 실어 나르던 공마선에도 격군을 포함해 30~40명이 탑승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는 비용은 도회지의 부담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9년(1795년)에는 비변사가 강진과 해남에서 도회접대를 위해 섬 백성들에게 잡비를 거두어 들이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보다 1년 전에는 호남위유사 서영보는 관리들이 지정된 도회를 어기고 특정 장소로만 몰려 폐단이 많다고 상소를 올리고 있다.

이처럼 호남 서남해안은 제주와 뱃길이 닿는다는 이유로, 섬지역이 많다는 이유로 적잖은 고충을 겪었다.
한편 강진과 해남은 제주와 왕래하는 공식적인 출입처가 되면서 더욱 관계가 깊어갔다. 조선후기 강진과 제주의 긴밀했던 관계를 알려주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1800년대 말 동학혁명으로 강진이 초토화된 후 중앙정부 내에서는 강진군을 영암군에 부속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군 군동면 화방마을 출신 오한규는 상급 관청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강진의 중요성을 알린다.

강진현은 바다와 가까운 중요한 땅으로서 강진현에서 직선 거리로 1000리나 떨어져 있는 제주는 옛날의 탐라국입니다. 그 때 신라에 입공한 성자가 본 현 앞 나루터에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본 현을 탐진이라 하였습니다.

선조 때 하교하기를 제주도가 전라도의 지휘를 받게 해서 혹시라도 급박하거나 이상한 변고가 있으면 맨 먼저 강진현에 알리고 강진현은 임금께 아뢰라는 사실을 현판에 새겨서 군수의 집무실인 동헌의 높은 곳에 내어 걸도록 하였으니 강진을 소중히 여기고 엄중히 여기게 함은 다른 고을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제주에서 본토로 입공함에 선로의 요충지로 보아도 그 중요한 바가 더욱 커서 독립된 읍이 될 만하며 땅 또한 타군에 부속하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또 조선 순조 때인 1811년 어느 날, 제주목사 임기를 마치고 제주~강진 뱃길을 이용해 강진땅에 도착하여 한양으로 돌아가던 조정천 목사는 강진에서 주민들이 흉년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조목사는 한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병영으로 돌렸다. 병영에는 호남 육군을 총 관할하는 병마절도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조목사는 직속 상관이었던 도병마사에게 지금은 전시가 아니니 군량미를 풀어 흉년으로 고생하는 주민들을 배불리 먹이면 좋을 듯하다고 건의했다.

조목사의 말을 들은 병마절도사는 즉시 군량미를 풀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강진주민들은 조목사의 선행을 감사히 여겨 강진읍내에 공덕비를 세웠다.

1800년도 들어서는 민간교류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는 유명한 영주십경(瀛洲十景)이라는 한시가 있다. 제주의 유명한 향토 한학자인 이한우(1818~1881)가 지은 한시로 지금도 제주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 통하고 있다. 영주십경은 제주도의 주요 관광코스다.

강진과 제주 민간인들 교류도 활발
율하 이용식 선생등 많은 제주여행기 남겨

2007년 12월 마량항에서 제주돌하르방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당시 영주십경을 흠모한 한학자들은 이한우 선생의 시에 차운 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제주 향토사학자 오문복씨가 지난 2004년 발행한 ‘영주십경’이란 책에 실린 영주십경의 작품만도 열두 사람 12수에 이른다. 그 안에 강진사람 율하(栗下) 이용식(1833~1895)과 연파(蓮坡) 김창현(1827~1875)의 영주십경시가 포함돼 있다.

이용식은 제주에 많은 시를 남겼으나 소실되고 20여 수가 남아 있다고 한다. 영주십경의 원조격인 매계 이한우와 교유가 두터워 증답시(贈答詩)가 여러 편 남아 있으며 시 속에는 두 사람의 두터운 우정이 배어 있다. 율하는 당시 강진과 제주가 문학적 유대를 나누는데 선봉이었다고 제주사람들은 평가하고 있다.

율하는 그동안 제주에서 강진사람으로만 알려졌으나 지난 2004년 말 제주 향토사학자 오문복씨가 강진을 방문해 이용식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그의 고향이 군동면 화방마을이란 사실이 확인됐다. 또 강진에 살고 있는 광주(廣州) 이씨 후손들도 만났다. 광주이씨 문중은 율하선생이 지은 영주 10경 중 한 곳을 선정해 제주에 시비를 세우는 것도 검토중이다.

이용식씨의 한시 ‘영주십경’에는 영주십경을 돌아보고 적은 일종의 후렴시가 있다.
‘영주의 열 곳 빼어난 경치 한번에 깨쳐 알았네. 보는 것마다 괴이하고 또 기이하기도. 다만 고향 가서 자랑할 날을 기다려지는데 시로 표현함에 와전되어 빼어졌는지 두렵다오.’
율하선생이 당시 제주에서 본 풍경을 고향 군동에 돌아와 몹시도 자랑을 많이 했을 것이라는 아름다운 상상을 갖게 한다.

오문복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제주도 삼방굴사 절벽에는 금릉(강진의 옛 이름)인 박성행 선생의 시가 새겨져 강진사람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용식, 김창현, 박성행 등 세 사람의 사례는 1800년대에 강진과 제주 간에 인적, 문학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율하선생을 제주와 강진이 문학적 유대관계를 나누는데 선봉장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당시 강진과 제주 사이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강진만에는 포구가 수두룩했다. 우선 강진만에서 가장 깊숙이 있는 강진읍 남포마을로 가 보자. 강진읍에서 평동리를 지나 들판 가운데로 나 있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마을대신 국도 23호선이 지나는 높은 둑이 보인다.

마을은 도로의 둑에 가려져 있다. 굴다리를 지나면 마을이 있다. 옛 지명이 남당포였던 남포마을. 집들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제주에서 강진만을 지나 들어오는 돛단배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러나 2006년 가을 남포마을 마을 앞은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바다는 없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에 도암의 경계지점인 해창과 강진읍 남포마을 사이에 둑을 쌓고 바다를 메워버렸다.

70년대 초반 뱃길이 끊기면서 남포마을에서는 바닷고기를 구경할 수 없게 됐다. 요즘에 말리는 고기는 여수에서 육로로 들어온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둑을 막아 남포마을 앞 간척지를 만들었으나 남포마을로 들어오는 뱃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북쪽에서 내려와 남포마을 서쪽을 통해 강진만으로 들어가는 금강 물줄기가 강진읍 목리쪽에서 막아 오는 둑과 해창쪽 둑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금강 물줄기는 강진만으로 유입됐고, 반대로 만조 때에는 강진만 바닷물이 금강천을 따라 남포마을 서쪽까지 밀고 올라왔다.

이 곳으로 어선이 1970년대 초반까지 들어왔다. 일제강점기 둑막이 사업으로 남포 포구의 규모는 줄었지만 금강입구를 통해 남포마을 서쪽으로 들어오는 배가 많아 남포의 기능은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포마을에는 유명한 도방이 4~5명 정도 있었다.

90년대 초반 작고한 이태규씨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주민들의 입에 거론되는 사람들은 김상백, 김길성, 박병렬, 이덕순, 한부금, 이강식씨 등이 있다. 이 중에 이태규씨는 추자도 사람들에게 지금도 전설적인 도방으로 통한다. 유명한 도방이란 다른 게 아니다. 물건 잘 받아주고, 돈 제때 챙겨주면 유명한 도방이다.

배들이 남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물건을 넘길 도방을 찾는 일이었다. 남포의 도방들은 돈을 제때 잘 처주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배들이 끊임없이 들어왔고, 남포에는 바닷고기가 늘 넘쳐났다.

이렇게 남포마을로 들어온 해산물은 남포사람들을 통해 전남지역 곳곳으로 팔려나갔다. 우선 강진관내 각 5일시장의 모든 어물전은 남포상인들이 장악을 했고, 인근 장흥, 영암, 해남, 영산포까지 남포 상인들이 왕래를 했다. 그러나 70년들어 바다의 수심이 더 이상 배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높아졌다. 얕아진 바다에는 갈대가 무성해졌다. 게웅을 제외하고 수심이 사라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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