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읍 청조루에 올라 강진만을 구경하고 남포에서 제주행 배에 올랐다

시대에 따라 변해 온 강진~제주간 뱃길
고대항로는 추자도를 거치는 경우 많아

강진만을 벗어나면 완도를 거쳐 제주로 가는 바닷길이 시원하게 열려 있다.
강진~제주간 뱃길을 따라가 보자. 항로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역사적으로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항로는 수정돼 왔다.  한반도에서 제주로, 제주에서 한반도로 향할 때 초기 고대항로는 주로 추자도를 거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육지부의 최남단인 강진이나 해남에서 1단계는 조류를 이용해서 소안도나 보길도에 이르고, 2단계 역시 조류를 이용해 추자도에 도착하는 뱃길이다. 이후에는 추자도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약 27해리를 조류와 바람을 동시에 이용해 중간지점에 있는 화도(큰 관탈섬)와 작은 관탈섬을 지나 일시에 제주도에 도달하는 항로이다. 징검다리를 최대한 이용한 항로다.

제주와 강진 사이에는 소안도나 보길도와 같은 섬들이 있어서 목측항해가 가능했고, 특히 6시간 주기의 조류 특성을 당시 뱃사람들 역시 알고 있기 때문에 육지에서 추자도까지의 항해는 무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원종 14년(1273) 삼별초가 제주도 애월읍 고성리의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있을 때 이를 섬멸하러 가던 김방경과 몽골의 흔도가 추자도에서 후풍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별초 후 1세기 동안 원나라의 제주통치가 있고 나서 고려의 최영장군이 목호(牧胡)를 치러 갈 때 추자도 사람들에게 그물 깁는 법을 가르쳐줬다는 전설이 있다.

16세기를 전후해 해로는 추자도를 거치지 않고 소안도나 보길도에서 제주로 직항하는 시대가 열린다. 중간 기착지인 추자도를 경유하지 않아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항해술이 발달했다는 증거로 풀이된다. 1960년대 들어서는 완도 청산도에서 제주로 가는 직항로도 열린다. 오늘날에도 강진이나 완도에서 제주도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해로로 사용되는 곳이다.
 
1679년 제주로 들어간 이증(李增)은 남사일록(南토ᇰ日錄)에 남당포를 통해 제주로 들어간 뱃길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마 강진~제주 뱃길을 표기한 기록 중에 가장 구체적인 기록이 아닌가 싶다. 또 옛 뱃길의 기록 중에 한가롭고 평화로운 내용은 별로 남은 게 없다. 옛 항해기록에는 거칠게 고생한 경험이 많은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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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떠나 10리에 가우도(駕玗島) 지나 5리 가서 비래도(飛老島)를 지나고 또 10리를 가서 복도(伏島)를 지나고 또 10리를 가서 사후도(伺侯島)를 지나고 5리를 가서 완도의 가리포(加里浦)진을 지나 40리를 가서 밤에 백도(白島) 동쪽 기슭에 정박하였다.  

오늘은 80리에서 100여 리를 간 셈이다. 이날 밤 달이 밝아 산 아래 외딴 촌에 연기가 피어나고 개짖는 소리가 나는데 경치가 너무 좋았다. 이 지경은 흰모래와 푸른 소나무로 가득하다.

12월 7일 오후에 눈이 내리고 큰 바람 일고 아침에 동쪽으로는 청산도, 서쪽으로는 소안도, 진도, 추자도가 까마득히 보인다. 두 개의 돛을 달고 있다. 낮에 사서도를 지났는데 여기가 바로 제주의 큰 바다이다.

여기서부터 바다는 더욱 넓고 물결도 더욱 높아, 솟았다 가라앉았다 하는 풍파 속에 기둥의 새끼줄을 잡은 사람들이 모두 울타리를 두드려 짐승을 모는 듯한 외치는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이곳이 소위 물마루(水宗)일 듯 했다. 바다를 넘으면서 뱃사람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는데, 뱃사람 전부가 배를 출발해서부터 곳곳에서 기도를 하는데 하루에도 서너 차례 이상 하였다.

동쪽에는 동여서도가 있고, 서쪽에는 대소화탈도(大小火脫島)가 있다. 검은 구름이 서쪽바다에 일어나더니 눈을 날리는 바람이 어지러워지자 뱃속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멀미를 하며 정신없이 쓰러졌다. 그런데도 뱃사람들은 “오늘은 바다를 건너기가 비교적 쉬운 것이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제주 큰 바다를 건너기가 어렵다는 것은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화북 방호소 포구에 정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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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증의 항로는 가우도~비래도~복도~사후도~가리포~백일도~사서도~제주도 화북 방호소 포구이다. 좁은 강진만을 지나며 보았던 무인도를 빠지지 않고 거론한 게 인상적이다.

이증의 항로는 남당포에서 제주로, 제주에서 남당포로 오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호집(白湖集)의 저자 임제가 갔던 남당포~제주의 뱃길은 이보다 더 험난한 길이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란 시조로 유명한 임제는 1577년 과거에 급제하고 제주목사로 있던 부친 임진을 만나러 가기 위해 고향 나주에서 길을 떠난다.

그는 백호집에 나주에서부터 강진에 도착하는 과정, 강진에서 제주에 도착하는 과정을 적고 있다. 임제는 1577년 5월 3일 무안에서 잠을 자고, 이틀후인 5월 5일 영암군 영암읍 구림마을에서 1박을 한다. 이어 백호는 5일 아침 구림마을을 나서 강진의 율리란 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백호는 다행히 제주로 가는 배에 빨리 오른다. 율리에서 하루를 묵은 후 다음날 강진읍의 청조루에 올라 구경을 하고, 오후에 남당포에서 제주행 배에 올랐다. 해가 질 무렵 완도를 거쳐 이진(利津)으로 갔으며 이날(7일) 저녁 백도에 들어가 닻을 내렸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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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아 백도를 출발했는데 배가 백리 정도를 갔을 때 배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갔다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해가 떠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마치 그네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옆에서 강진사람인 뱃사공이 예전에 일본으로 표류해서 7년 동안 산 적이 있는데 고향이 무척 그리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주에서 서풍이 불면 4일 정도면 일본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배는 점점 흔들려 하늘에 떴다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날밤 저녁 간신히 조천관에 도착했는데, 함께 출발했던 여섯 척의 배 중에 한 척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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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집을 볼 때 임제의 항로는 강진 남당포~이진~백도~조천관이었다. 여섯 척의 배 중 하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어디에서 침몰했든가 표류해서 생명을 잃었을 가능성이 큰 경우다. 그런 경우 역사에는 누가 언제 어떻게 실종됐는지 아무런 기록도 없다. 그렇게 목숨을 잃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조선시대때 강진과 해남, 영암이 1년씩
제주도로 들어가는 관리나 사신을 접대

청산도 항은 깊은 내만을 형성하고 있어 배들이 바람을 피하기 좋은 곳이다.
조선 21대 영조 46년(1770년) 제주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남당포로 건너오다가 일본으로 표류한 장한철의 ‘표해록’에는 조선 중기 남당포의 역할이 묘사돼 있다. 장한철은 12월 25일 28명의 일행과 함께 제주에서 남당포를 향해 출발했으나 신지도 앞바다~흑산도~일본 유구열도의 “호산도(虎山島)”라는 무인도를 거쳐 완도 청산도에 표류하기까지 장장 12일 동안 망망대해를 헤맸다. 파도에 밀려 청산도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장영철을 포함해 단 8명. 나머지 21명은 표류 중 사망하거나 섬에 표착하면서 수장된 대참사였다.

청산도에서 몸을 추스린 장한철 일행은 주민들에게 남당포로 가는 방법을 묻는다. 아마도 장한철 일행의 목적지가 남당포였을 것이고, 둘째는 제주도로 가는 배를 남당포에서 정확하게 탈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한철 일행은 1월 14일 고금도와 마량, 칠량을 거쳐 다음날 남당포에 도착했다. 장한철이 남당포의 객점에서 쉬고 있을 때 옆방에서 “바람만 좋으면 소안도(所安島)에 배를 댈 것 없이 곧장 제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게 된다. 제주사람들이었다.

장한철은 함께 있던 동행인에게 말한다. “육지에서 제주로 가는 사람은 반드시 배를 몰아 소안도로 들어가서 거기서 순풍을 기다려 제주로 가는데 저 사람들이 소안도에 들리지 않고 제주도로 곧장 가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고향이 간절히 그리운 것 같다”고 했다. 잠시 후 서로 제주사람들인 것을 알게 된 이들은 장한철 일행에게 장삿일로 육지에 나왔다가 물건을 모두 팔고 제주로 돌아가려고 순풍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장한철 일행과 상인들의 대화는 당시의 남당포 역할을 몇 가지 전해준다. 당시에 제주도에서 배를 직접 가지고 남당포로 나와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남당포에서 출발하는 배는 중간의 소안도에서 후풍(候風)을 했다는 것이다. 장한철은 남당포에서 김창현이란 사람과 함께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가고, 나머지 6명은 다음날 남당포에서 상인들의 배를 얻어타고 제주도로 들어갔다.

이처럼 강진과 해남은 제주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역사적으로 늘 중요한 기능을 해왔다. 특히 조선왕조는 제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원활한 해상교류를 하기 위해 일정한 틀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많고 상업이 발달한 지역을 도회지(都會地)라고 한다. 그러나 도회지란 말은 조선시대에 어느 한 지역에서 특정한 행사를 하도록 지정한 것을 말한다. 어떤 행사를 주최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때 언제부터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강진과 해남, 영암이 1년씩 돌아가면서 제주도로 들어가는 관리나 사신을 접대하는 도회를 맡아 처리했다. 그만큼 제주도로 왕래하는 공인이나 사인들의 규모와 횟수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도회를 맡은 곳은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했고, 이동과정에서 필요한 생필품도 지원했다.

탐라지초본 제주구례조(‘耽羅誌草本’ 濟州舊例條)의 도회관 주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영암과 해남, 강진 세 고을에서는 매년 윤번을 정하여 신구영송의지지, 월령진상의 수운 및 공엽의 왕래를 담당하며, 상인이 제주도에 들어오는 경우에는 도회관의 공문이 있어야만 비로소 바다를 건너는 일이 허락된다’
또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1794) 12월 28일자 기록에는 ‘제주 세 고을의 수령과 사신이 왕래할 때에 강진, 해남, 영암이 도회를 나누어 정해서 각 1년씩 돌아가면서 거행한다’고 했다.

김상헌(1570〜1652)의 ‘남사록’에는 강진·해남 두 현은 모두 바다에 있다. 무릇 제주를 왕래하는 공행(公行)은 반드시 여기에 와서 배를 탄다. 해남은 관두량(館頭梁)이고 강진은 백도도(白道島), 영암의 이진포(현재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가 강진과 서로 붙어있기 때문에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세 곳에 모이고, 매년 강진·해남 양읍(兩邑)에서 모여 관섭(菅攝) 호송하는 일을 윤번을 정한다고 적었다.

도회지에는 반드시 후풍처(候風處)가 있었다.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 돛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기 위해서는 북풍이나 북동풍이 불어야 했기 때문에 후풍처에서 기다리며 적당한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강진은 백도도, 해남은 관두포, 영암은 고달도가 후풍처였다. 세 지역 모두 바닷가에 맞닿아 있다. 바람이 불면 언제든지 배를 타고 곧바로 제주도로 향하기에 좋은 곳이다.

그러나 후풍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한 것 같다. 1600년대 초에 작성된 남사록에는 강진의 경우 백도도가 후풍처라고 했으나 이 시기를 전후해 많은 사람들이 강진읍의 객관에서 묵고 순풍을 기다렸다가 남당포를 통해 제주도로 들어가고 있고, 후술하지만 해남의 경우도 관두량은 물론 남쪽의 어란진이나 북쪽의 입암포 등이 제주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는 곳으로 활용되기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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