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상가선(商價船)은 진도로 건너갈제 금구의 금(金)을 일어…’

호남가 가사중 상선을 노래한 곳은 강진이 유일
1697년 강진~서울~강진 간 곡물, 여객운송 기록

완도 신지도에서 바라본 제주 뱃길.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게 한라산이다.
1600년대 후반부터 지방 수령이 조정에 올린 표류관련 장계, 비변사등록 등 8가지 자료를 분석해 전국 포구간 상품유통 상황을 파악한 자료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결과를 볼 수 있다. 이 자료에는 강진을 포함해 나주, 순천, 영산포, 영암, 장흥, 해남, 영광 등 호남지역 주요 포구와 부산, 거제, 하동, 울진을 비롯한 경상도지역 포구와 충청도, 평양, 함흥 등 이북 지역 포구들의 상품유통 실태가 몇 가지씩 설명돼 있다.

우리나라 서남해안 지역 중에서 서울까지 유통을 한 곳으로는 강진과 영광 장흥 등 세 지역이 나온다. 강진은 이미 1697년 강진~서울~강진 간에 곡물수송과 여객운송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1782년에 공물인 귤을 강진에서 뱃길을 통해 서울까지 운송했다.

관심을 끄는 것은 서울과 상업거래를 했다고 기록돼 있는 3곳 중에 강진과 서울이 거래한 품목이다. 영광과 장흥은 주로 공납품이나 세곡, 다시 말해 국가에 바치는 물품을 서울로 운송했던 곳으로 나온다.

그러나 강진의 경우 1697년에 서울 간에 곡물과 여객수송을 했다고 되어 있다. 여객수송과 세곡수송은 성격이 다른 것이다. 강진과 서울 간에 이미 1600년대 후반부터 뱃길을 이용해 민간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855년에 강진~평양~서울~강진으로 이어지는 상업과 여객운송 목적의 뱃길이 있었다는 것이다. 1806년 강진의 선상인 김태철은 미역 67첩을 선박에 싣고 서울과 인천, 평양 등지에 판매하고 있었다. 이를 볼 때 강진의 포구유통권은 부근 도서지역만이 아니라, 영남 남해안은 물론 동해안의 평해와 서해안의 강경, 평양까지 포괄할 정도로 광범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이 표류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서 당시에 있었던 구체적인 상품유통 정보로는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강진에서 서울과 평양으로 사람과 상품을 수송하는 해로가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문인 이서구(李書九 1754~1825년)가 지은 호남가라는 노래가 있다. 자신이 정조 17년(1793년)과 순조 20년(1820년) 두 차례 전라감사를 지내면서 호남지방 54개 고을의 이름을 빌어 ‘함평천지 늙은놈이…’로 시작되는 호남가를 지었다.

호남가는 각 지역의 특징 한 구절씩이 들어 있다. 강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강진(康津)의 상가선(商賈船)은 진도(珍島)로 건너갈제 금구(金溝)의 금(金)을 일어 쌓인 게 김제(金堤)로다’
- 활기넘친 나룻터(康津/강진)에 떠나가는 장삿배(商賈船/상가선)는 보배섬(珍島/진도)을 찾아가니 골짜기마다 금밭(金溝/금구)이요. 캐어내니 금무더기(金堤/김제)로다 -

54개 호남지방 고을 중에 상선(商船)을 노래한 곳은 강진이 유일하다. 이처럼 강진은 호남지역에서 바다를 통해 상거래가 활성화된 대표적인 곳이었다.

강진읍 금강천에서 강진만으로 시냇물이 유입되고 있다. 갈대밭이 아름답다.
강진의 옛 이름이 탐진(耽津)이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강진군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보면 강진은 신라 35대왕인 경덕왕(742~764)부터 탐진이란 지명을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태종 17년(1417년)에 강진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탐진이란 이름이 사용된 세월이 자그마치 510여 년이었다.

제주가 탐라로 불리웠던 이유는 각종 문헌 속에 수없이 소개돼 있다. 제주사람들이 육지에 올 때 탐진을 통해 건너왔는데 임금이 그들을 반기고 그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탐라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 고후(高厚) 등 형제 3인이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대거 신라의 성시였다. … 읍호를 탐라(耽羅)라 하니 이것은 올 때 처음 탐진에 배를 대었기 때문이다.’
동문선의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제주의 시조성인 고을나의 15세손인 고후(高厚)가 그의 아우인 고청(高淸)과 바다를 건너서 처음으로 탐진(耽津)에 닿아서 드디어 신라에 이르렀다. 임금은 그들을 반가이 대접하고 고후에게 성주(星主)라는 작위를 주고, 또한 고청은 임금의 다리 밑으로 기어나오게 하고 그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여 왕자로 삼고, 고을의 칭호를 ‘탐라’라 하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구심포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현 서쪽의 물과 합쳐 구십포가 된다. 탐라의 성자가 신라에 조회할 때에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하였다’

여러 가지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반도와 제주의 공식적인 교류는 신라시대부터였고, 그 관문은 탐진, 즉 강진이었으며 신라시대때에 제주사람이 처음으로 도착했다는 이곳 지금의 강진읍 남포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강진과 제주의 첫 교류가 신라시대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기록일 뿐이다. 실제 강진과 제주의 교류는 훨씬 이전부터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례를 살펴보자.

2008년 2월 초, 한국토지공사가 대규모 택지개발을 추진중인 제주시 삼양동, 도련동, 화북동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지금까지 제주지역에서 발견된 옹관묘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옹관묘는 주로 삼국시대에 발전된 무덤양식으로 이 시기에 영산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됐다고 전해온다.

그럼 이 무덤양식은 어떻게 제주지역으로 전파됐을까. 이에 대한 대답이 오늘날 제주와 호남의 해양교류 역사를 말해주는 잣대같은 것이다. 제주시의 삼양동과 도련동, 화북동 등은 제주도의 최북단지역이다. 화복동은 과거 강진과 해남으로 연결하는 항로의 출발점이다. 고대 항로를 통해 화북동의 옹관묘 문화가 들어갔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좀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제주에서는 지난 1973년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동굴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타제석기가 발견돼 약 4만 년 이전인 중기구석기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사람들이 빌레못의 용암동굴에 살면서 한라산의 숲속에서 나는 식물줄기를 섭취하고 짐승을 잡아 단백질을 보충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이때는 제주도가 육지와 연결돼 있을 때였다. 그뒤 빙하기가 퇴조하기 시작하는 2만 년 전후가 되면 해수면의 상승으로 제주도는 점차 섬으로 변하면서 육지와 격리되었다.

이후 제주도는 섬의 자체적인 생활 양상과 육지와 우연적이고 산발적인 교류가 뒤섞이면서 다양한 문화가 형성돼 왔을 것이다.

섬과 육지의 교류가 되기 위해서는 섬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거나 육지의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학자들은 선사시대에는 원시배인 떼배가 그 역할을 상당 부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떼배는 선사시대부터 한반도 섬이나 육지의 근해에서 사용되었고, 파도에 밀려 우연적인 표류와 표착이 이어지면서 육지와 제주의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선박 상태와 항해술로는 먼 바다를 향해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항해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가까운 바다에 생업을 목적으로 항해를 나갔다가 바람에 떠밀려 아주 먼 곳까지 표류해서 문화가 전파된 것이다. 

제주가 옹관묘를 생산할 수 없는 조건인데도 용담동 옹관묘가 발견된 것은 영암의 옹관묘 집단들의 장묘문화가 뱃길을 통하여 건너온 것으로 보고 있고, 제주 용담동, 삼양동에 집중적으로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도 강진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고인돌 집단들이 제주도로 이주해 와서 뱃길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이후 육지에서 제주쪽으로 공식 항해가 이뤄진 기록은 기원전 3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에 ‘28년에 진시황이 군현을 순찰했는데 그때 서불(徐市) 등이 상서하기를 바다 속에 삼신산(三神山)이 있어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라고 부르며 선인이 거주하고 있는 바 불로불사약을 구하고자 하오니 청컨대 동남동녀를 보내 주소서 하여 서불이 동남동녀 천명을 거느리고 선인을 구하러 떠났다’고 했다.      

서복(徐福)선단은 기원전 219년(진시황 28년), 기원전 218년(진시황 29년), 기원전 209년(진시황 38년) 등 3차례에 걸쳐 발해와 조선반도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자신이 왔다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제주도 서귀포시 정방폭포 암벽과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등에 ‘서시과차(西市過此)’라는 네 글자를 남겼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정방폭포 옆에는 서복선단이 남겼다는 알듯 모를 듯한 상형문자가 2천년 세월을 버티고 남아 있다.  

제주의 대외교류 기록은 3세기부터 나타난다. 3세기경에 중국 서진(西晋)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의 말미에 기록된 ‘주호(州胡)’에 관한 기사 중에 ‘배를 타고 중한에 왕래하며 교역을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제주와 한반도 간의 교역이 서기 300~400년부터 이루어졌음을 설명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 통한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文周王 2년(476)에 탐라에서 백제에 조공을 바쳤으며 이것은 백제멸망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일신라로 들어오면서 강진과 제주의 관계는 장보고란 역사적 인물을 빼놓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장보고는 흥덕왕 3년(828)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신라와 중국, 일본으로 이어지던 삼각무역을 13년 동안 독점했던 인물이다. 그가 활동한 바다는 서쪽으로 중국 양주(揚州)로부터 동쪽으로 일본 구주(九州) 일원까지 다양하다. 제주는 그 길목에 있다. 강진만의 입구인 장도에 진의 본부를 설치한 장보고가 삼각무역을 독점하면서 제주의 비중을 가벼이 봤을리 없다.

이와 관련해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의 법화사가 장보고가 창건한 절이라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완도 청해진의 법화사와 중국 산동성의 법화원 등이 유사성을 갖는다. 법화사지는 신라 장보고에 의해 개창됐고 고려 원종 10년(1269년), 충렬왕 5년(1279년)까지 11년에 걸쳐 중창됐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은 없다. 하지만 1982년부터 1997년까지 진행된 법화사지 발굴조사에서 10세기를 전후해 강진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가 발굴됐고, 역시 법화사와 함께 제주의 대표적 사찰로 꼽히는 수정사(水精寺)터에서도 초기 청자 형태인 해무리굽 청자편이 발견되는 것 등으로 봐서 장보고시대와 제주의 연관성은 필연적으로 것으로 보인다.   

또 일찍이 고인돌문화가 들어갔고, 옹관묘문화도 유입된 것으로 확인되는 마당에 장보고 선단의 항해술과 조선술이 제주에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려시대 기록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배를 잘 만들고 뛰어난 항해술을 가졌다는 기록들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고려사 현종 2년(1012년) 기록에는 제주에서 대선 2척을 조정에 진상했다고 나오고, 성종실록 8년(1477) 기록에는 ‘제주의 배는 왜선보다 견고하고 속력이 빠르다’고 소개하고 있다. 

청해진 시절 당시 제주와 강진의 구체적인 교류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이 시기에 제주와 육지 사이에 가장 활발한 문물교류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제주는 수도인 개성과 교류를 트기 시작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제주도는 덕종 3년(1034) 11월 팔관회 때 탐라에서 토산물을 진상한 기록이 있고, 이후 계속해서 팔관회에 참석해 문물을 교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중앙정부가 제주에 대해 성주(星主)와 왕자같은 전통적 지배체제를 인정하되 이들 지배체제를 정부가 장악하는 간접지배의 방식으로 통치되고 있었다.

이후 숙종 10년(1105) 제주가 탐라군으로서 고려 군현체계에 본격 편입되고, 12세기 후반 의종대에는 현으로 개편되면서 낮은 직책이지만 현령관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어 고종 10년(1223)을 전후해 탐라는 군에서 목으로 승격되면서 제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12세기를 전후한 고려시대는 강진과 개경 간에 청자뱃길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제주와 강진, 강진과 개경, 제주와 개경을 연결하는 다양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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