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바다~ 날마다 오가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네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는 것 뿐
운송수단 변했어도 바다에 몸을 싣고 움직이는 것

하늘에서 바라 본 제주해역의 관탈섬. 제주에서 육지로 나갈 때 처음으로 만나는 무인도다.
뱃길은 변함이 없다. 땅위의 도로는 굽은 모양이 펴지기도 하고, 좁은 형세가 넓어지기도 한다. 먼지만 날리는 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바다에는 예나 지금이나 바닷물이 있을 뿐이다. 크게 변하지 않은 해류가 있고, 날마다 오가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쳐들어오는 태풍이 있고, 미칠듯이 울어대는 집채만한 파도가 있다. 가슴까지 열어주는 탁 트인 경관도 있다. 수백 년 전에도 그랬고, 수천 년 전에도 그랬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바다 위를 다니는 배의 모양이고, 배의 성능이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제는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저 바닷길. 저 길을 오래전 우리 조상들은 바람에 의지해 생사를 넘나들며 생계를 꾸렸다. 언제 파도가 일지 몰랐다. 그게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다가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도 있었고, 바람을 만나 일본이나 중국으로 떠내려가는 일도 많았다.
 
망망대해에서 파도에 휩싸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은 저 바다 위에 여객선이 다니고 대형 컨테이너 선들이 순항한다. 섬 주변에는 양식어장용 부표물이 빽빽이 늘어서 있다. 바다 위 높은 하늘에는 비행기가 자유롭게 날고 있다. 바다의 얼굴은 이렇게 많이도 변했다. 바다를 넘나드는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60·70년대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제주해협을 건너 제주도로 이주해 들어갔다.

맑은날 제주에서 광주행 비행기를 타면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이륙 직후에 멀리 왼쪽으로 추자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제주공항을 이륙한지 5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비행기는 이미 7천m 상공을 날고 있다. 추자도는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섬이다.

저 아래 바다는 ‘노도(怒濤)의 바다’라 일컫는 곳이다. 제주 동쪽바다에서 황해로 북상하는 해류와 제주도의 서부해역을 돌아 동쪽으로 들어가는 해류가 충돌하고 있다. 육지사람들이나 제주사람들에게 저 곳은 화내고 폭력을 휘두르는 공포의 바다였다.

추자도 주변에서 까딱 잘못하면 파도에 휩싸여 수장되거나 멀리 일본의 나가사키나 중국 상해, 베트남 등지로 표류해 갔다. 살아남는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없이 바다 위에서 죽어갔다. 그러나 하늘에서 바라본 ‘노도의 바다’는 너무나 아름답다. 행여 저 바다에서 사람들이 고난을 겪었을까 싶다. 추자도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하늘에서 바라본 추자도와 주변 섬들의 모습이 아기자기하다.
상·하추자, 추포,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곳이다. 추자도 뒤쪽으로 해남과 완도의 서쪽섬들이 점점이 박혀 있고, 진도와 해남 사이의 명량해협이 마치 실핏줄처럼 놓여 있다. 비행기는 잠시 후 추자도 상공으로 접근한다. 창문 아래로 추자도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추자도는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중심으로 섬들이 다이아몬드처럼 뿌려져 있다. 바닷물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추자도를 중심으로 바닷길이 갈린다. 왼쪽으로 가면 진도와 해남 중간의 명량해협으로 이어진다.

바다 위에 섬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서쪽으로 지는 해가 섬 위에 금빛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보길도를 좌측으로 지나 해남 송지면 앞바다와 어란진, 화산면 관두포, 입암포 등을 거쳐 황산면 앞바다를 지난다. 그곳을 지나 진도 벽파진항에 이르고, 울돌목의 진도대교를 지나면 곧바로 목포 앞바다로 이어진다.

비행기에서는 멀리 진도대교가 가물가물하게 보인다. 추자도 앞바다에서 오른쪽으로 뱃길을 잡으면 완도~강진으로 이어진다. 완도를 중심으로 수많은 섬들이 흩뿌려져 있다. 큰 섬만 꼽더라도 제주와 가장 가까운 곳에 보길도가 있고, 조금 오른쪽으로 노화도와 소안도가 보인다. 소안도 건너편은 청산도다. 작은 섬들이 큰 섬 사이에 징검다리마냥 박혀 있다. 완도를 중심으로 동쪽에 신지도와 청산도가 놓여 있다.

동북쪽으로 고금도와 신지도 등이 바다 위를 수놓고 있다. 멀리 동쪽으로 고흥반도와 여수항이 아스라이 보인다. 강진과 제주를 오가는 뱃길과 해남과 제주를 잇는 뱃길은 제주도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이다. 제주도에서 동북쪽으로 직선을 그으면 청산도 앞바다를 거쳐 신지도에서 완도읍쪽으로 조금 휘어져 곧장 올라가고, 이어 장도가 있는 강진만 입구를 지나 그대로 강진만으로 들어간다. 비행기가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올라가면서 오른쪽으로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진만은 영락없는 여자의 자궁이다. 남해에서 섬과 섬 사이를 지나오던 바닷물이 육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그 끝에 강진읍이 있다. 지금은 간척지가 강진만의 많은 바다를 메워버렸다. 간척지가 없던 때를 상상해 본다. 요즘에는 구글어스(Google Earth)란 지도검색 프로그램을 통해 과거에 바다였던 육지를 쉽게 측정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전에는 해남 북평면 남창 앞바다에서 신전면 장수리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신전 사초리와 송천리에 푸른 물결이 출렁인다. 조금 올라오면 신전면 논정리 앞바다가 광활했고, 조금만 더 밀고 들어오면 도암 만덕리 귤동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일렁거렸다.

또 그 위쪽 강진읍 기룡마을앞 들이 바다였던 것으로 생각하면 저절로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다. 서남쪽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강진읍 영파리 팔영마을 오른쪽에는 도선등이란 곳이 있다. 한문으로 도선(渡船) 등이다. 이는 팔영마을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배들이 왕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영마을 주변에는 지금도 땅을 파면 갯벌이 나온다고 한다. 간척사업은 일제강점기 들어 본격화 돼 1980년대 후반까지 계속됐다. 건너편 동쪽도 마찬가지다. 마량 하분마을 앞도 바다였고, 숙마마을 넓은 들도 바닷물이 들락날락하던 곳이었다. 윗동네인 대구와 칠량도 사라진 바다가 많다. 칠량 영계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구로앞 들도 마찬가지다.

군동 하신마을 앞 광활한 땅도 모두 바다였다. 칠량은 저 안쪽 명주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대구는 용운리 저수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 일대를 훈정강이라 불렀다. 마량은 원포 앞에 남원포란 큰 포구가 있었다.

신전은 주작산, 지금의 관광농원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도암은 도암면 소재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옛날 바다를 생각하며 상상력을 확대해 가면 강진만은 커다란 항아리를 떠올리게 한다. 완도 본섬과 신지면, 고금면이 병뚜껑처럼 항아리 주둥이를 막고 있고, 그 안쪽에 둥그렇고 거대한 만이 형성돼 있다.

군사적으로 천혜의 요새이면서 어민들이 안심하고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 큰 파도가 많지 않아 멀리 떠나는 배들이 항구로 삼기에 좋았을 곳이다.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는 강진만은 육지에서 생산된 물건이 나가고, 각 섬지역에서 내륙으로 물건이 들어가기에 최상의 지역이었다.
 
시대를 조금 더 올라가면 우리는 더 큰 바다와 만난다. 617년 신라 진평왕 39년에 건립된 무위사는 905년의 절 명칭이 무위갑사(無爲岬寺)였다. 갑사는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을 뜻한다. 1417년 병영지역에 전라병영이 설치된 것은 이곳의 산세가 천혜의 요새라는 점과 함께 바닷물이 지금의 병영면 소재지 앞까지 들어와 해로가 용이했다는 장점이 있었다. 1598년에는 이순신장군이 작천에 있는 황대중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이곳까지 배를 타고 올라온 것으로 전해온다.

강진만은 크지 않은 만(灣)이지만 포(浦)자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만의 남쪽에서부터 열거해 보면 마량면의 원포(垣浦), 대구의 구강포(九江浦), 칠량의 장포(長浦 : 장계리 앞 포구), 군동의 군령포(君令浦 : 지금의 호계리 영포)와 백금포(白金浦), 강진읍의 남포(南浦), 도암의 율포(栗浦 : 만덕리와 송학리 주변에 있던 포구) 등이 있다.

오래전 강진만의 지도를 추정해 보면, 북쪽으로 성전 무위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동북쪽으로는 병영 하고마을 앞뜰, 군동 비파산 아래쪽으로는 시목, 동동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일렁거렸다. 시목마을 앞에는 일제강점기 전까지 군영포라는 큰 포구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강진만의 풍경을 상상해 보면 한반도 지역에 이 정도의 넓고 포근한 만이 또 있었을까 생각될 정도다. 일제강점기 간척사업이 진행되기 전에는 강진의 북쪽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이 바다에 의지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강진은 강진만이란 호수같은 바다를 중간에 두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에 의지해 생활하던 곳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변에서 해상왕 장보고가 터를 잡았고, 동시대부터 고려청자가 구워졌으며, 강진에 남아 있는 수많은 불교유적 등은 이같은 강진만의 조건과 크게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강진(康津)이란 말은 편안한 나루란 뜻을 가지고 있고, 예전 지명인 탐진(耽津)이란 말은 기쁨을 누리는 나루란 뜻을 지녔다. 이곳에서 청자가 발전했고, 상업이 번창했으며, 통일신라시대(828년)때에는 장보고가 대양을 호령하던 본거지가 있었던 곳이다.

무엇보다 강진의 해양지리학적 특징은 강진사람들이 외부와 다양한 교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강진이 제주로 가는 길목이 된 것, 고려때 청자가 발전한 것, 칠량에서 옹기가 발전한 것, 근세들어 쌀 교역이 발전한 것 등은 모두 강진만이 갖는 해양지리학적 특징이 많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진의 이같은 자연적 조건은 바다를 통한 대외교류를 번성하게 했다. 강진의 영웅 다산 정약용선생은 강진에서 유배생활(1801~1818)을 하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목민심서나 흠흠신서가 다가 아니었다. 다산의 강진과 관련된 한시 중에 ‘탐진어가(耽津漁歌)’란 시가 있다. 강진만을 중심으로 살았던 어민들의 생활상을 한시로 엮은 작품이다.

어촌에서 모두가 낙지국을 즐겨먹고
붉은 새우 녹색 맛살은 치지를 않는다
홍합이 연밥같이 작은게 싫어서
돛을 달고 동으로 울릉도로 간다네

어촌의 풍족함을 노래한 시다. 낙지국을 즐겨먹고, 새우 맛살 정도는 고급으로 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더 큰 홍합을 찾기 위해 돛을 달고 울릉도로 갔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돛을 달고 울릉도까지 간다는 것이다. 강진에서 울릉도까지의 직선 뱃길을 구글어스에서 측정해 보니 590여㎞ 거리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 강진사람들은 경상도 남해안을 거쳐 동해안 울릉도까지 배로 왕래하며 상행위를 했던 것이다.

또 탐진어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추자도 배 고달도에 머무는데
탐라(耽羅) 죽모첨이 한 배에 가득이라
비록 많은 돈 되니 좋은 장사라 하겠지만
고래 같은 파도 어디서일지 모르니 마음 어찌 편할까

여기서 고달도는 지금의 완도군 군외면 달도를 말한다. 탐라는 제주이고, 죽모첨은 제주의 말총으로 만든 갓을 말한다. 한시를 해석하면 추자도 배가 제주에서 생산되는 갓을 가득 싣고 고달도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당시에 고달도는 탐진현, 다시 말해 강진의 행정구역이었다.

시 속의 ‘많은 돈이 된다’는 것은 제주에서 나오는 갓을 싣고 육지에 나와 팔면 많은 이윤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강진으로 건너오는 뱃길은 큰 바다를 건너와야 했으므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고래 같은 파도가 어디서 일지’ 늘 몰랐다. 두 지역의 상거래는 이익이 많은 만큼 항상 위험이 상존했다. 요샛말로 리스크가 큰 상거래였다.

다산선생의 탐진어가는 이렇듯 19세기 초에 강진사람들이 울릉도까지 왕래했고, 제주상인들이 수시로 강진을 오가며 상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 이전의 상거래는 어땠을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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