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의 세월… 해방 70년 우리는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6.25 전쟁 비극
60년대들어 극심한 자연재해도 극복

탐진강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그 주변에서 옹기종기 모여사는 강진사람들의 모습 또한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탐진강은 이렇게 흐를 것이며, 그 주변에서 옹기종기 모여사는 강진사람들의 모습도 여전할 것이다. 광복 70주년을 보냈다. 앞으로 70년 강진은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할 것이다.
해방 후 우리는 70년을 살았다. 까마득한 그 세월, 우리는 희노애락을 겪으며 반백년하고 20년을 보냈다. 해방후 5년만에 6.25 전쟁을 겪었고, 그 많은 세월 수많은 자연재해가 엄습했지만 우리는 끄떡없이 버티었다. 버텼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새마을운동을 쉬지 않고 진행했고, 식량 증산을 위해 퇴비를 만들고 용수로를 정비했다. 공장에서는 산업의 역군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마을마다 집집 마다 자식들의 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소득수준이 개선되면서 생활수준이 급격히 올라갔다. 강진의 농촌 가정에도 자동차 없는 집이 없을 정도다. 전기는 80년대 중반에 거의 100% 가까이 보급됐다.

논밭은 경지정리가 잘돼 농사짓기에 아주 좋게 정비돼 있고, 농수로 역시 잘 만들어져 큰 가뭄 걱정 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 집집마다 초고속 인터넷이 들어와 있고, 상수도 보급률도 아주 높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은 이제 통계조차 내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보급돼 있다는 뜻이다. 상수도 보급률은 지난 2002년 12월 장흥댐이 개통되면서 급격히 향상됐다. 현재 강진지역은 장흥댐에서 오는 물이 도암과 신전을 거쳐 완도까지 가고 있다.

면단위에도 병의원들이 들어서 몸이 아픈 사람들은 편리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돼 있다. 현재 강진지역 병의원은 의원이 19개, 한의원이 6개, 병원이 3개, 치과의원이 6개등 총 34개에 달한다.

각 지역과 연결되는 도로망은 급속도로 확충됐다. 2004년 영암에서 강진으로 오는 4차선 도로가 연결되면서 강진 사람들은 광주까지 4차선 도로만 타고 가는 시대가 열렸다. 풀치터널이 뚫린 것은 2003년 4월이었다. 그 전에 강진 사람들은 광주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꼬불꼬불한 풀치를 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장흥과 보성으로 가는 4차선 도로도 곧바로 뚫렸다.

두시간이 넘게 소요되던 강진에서 순천을 가는 시간이 한시간내로 좁혀졌다. 대부분의 강진주민들은 오래전 장흥에서 보성을 넘어갈 때 꼬불꼬불한 2차선을 타고 넘어가던 추억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강진과 전남 동부권의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강진 사람들이 여수나 순천을 나들이하는게 낯설지 않은 일이 됐다.

목포로 가는 4차선도 2005년 개통됐다. 성전 밤재를 넘어 목포로 가는 시간이 1시간대로 좁혀졌다. 이어서 2015년 목포~광양간 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 강진은 목포와 순천권으로 가는 양날개를 달았다. 강진IC에서 목포까지 가는 시간이 30분내로 단축됐다.

물론 이같은 현상들이 좋은 결과만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60.70년대 급격한 공업화가 이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떠났다. 덕분에 1967년 15만명대였던 강진의 인구는 오늘날 3만9천명대로 떨어졌다.

도로의 발달은 유통문화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목포와 광주에 형성돼 있는 거대한 상권이 빠른 교통망을 이용해 농촌지역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1시간에서 1시간 30분권에 있는 소비자들이 쇼핑장소로 도시지역을 선호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포와 광주에 가서 쇼핑하는 일이 일반화 됐다.

70년대 새마을운동 신화 농촌 큰 변화
80년, 90년, 2000년대 희망을 품었던 세월

열심히 일했던 순간순간이 삶의 영광
후손들에 자부심 안겨줄 지역사회 만들자

강진의 학생들이 최근 강진의 4.3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진사람들의 광복 의지는 어느지역 사람들 보다 강했다.
여기에 인터넷을 통해 홈쇼핑이 크게 유행하면서 안방에서 상품을 주문하고 받아보는 시대가 열렸다. 농촌지역 주민들도 도시사람들과 큰 차이없이 소비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지역상권의 큰 위축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인구감소와 유통문화 변화로 농촌 상권은 크게 위축됐다. 강진읍내나 면소재지에 점포를 내고 여기에서 상품을 팔며 이익을 창출하던 사람들이 점포에 와서 상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수익구조가 악화됐다. 읍내에서 문을 닫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문을 닫지 않더라도 예전처럼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는 사라졌다.

농촌의 인구가 줄어들었지만 그나마 그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층이 바로 외국인들이다. 2000년대 들어 다문화 가정이라는게 생겨났다. 외국에서 시집온 여성들이 강진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 강진군에는 261가구의 다문화 가정이 살고 있다. 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아 2세들이 자라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의 충돌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다양한 사회적 노력이 병행되면서 지역문화에 정착해 가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경향이다.

귀농인들이 늘어나는 것도 지역의 큰 문화로 자리잡았다. 전국적으로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농촌으로 이사해서 생활하는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강진의 현재 귀농인 인구는 최근 10년 동안 2,370여명에 달한다. 이들은 각 마을에 거주하면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있다.

때로는 현지 주민들과 적지 않은 마찰을 겪기도 하지만 지역 주민으로서 차근차근 뿌리를 내려가는 모습이다. 이들은 다양한 농업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딸기를 키우는 사람, 버섯을 키우는 사람, 나무를 키우는 사람, 꽃을 키우는 사람등 농촌에서 자리를 잡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해 보려는 이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해방후 가장 급격하게 변한 문화중에 장례문화를 빼 놓을 수 없다. 조상들이 죽으면 집에서 예를 올리고 손님을 맞으며 장례를 치르는 것은 수백년 된 농촌의 전통이었다. 장례 때에는 마을사람들이 힘을 합해 상여를 만들고 장지까지 상여를 메고 가서 묘를 쓰고 제사를 올리는게 그야말로 수백년된 우리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최근 20여년 사이에 이같은 전통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장례식장이라는게 들어서 사람이 병원이나 집에서 죽으면 장례식장의 안치실로 모셔졌다. 분향소는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음식은 전문식당에서 배달돼 오고, 상주들은 장례식장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을 맞는다. 이런 문화는 이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서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정도다. 강진에만 전문 장례식장이 5개가 운영되고 있다.

민선군수를 꾸준히 뽑았고, 지방의회 의원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해 온 것도 최근들어 우리 역사에 남을 소중한 기록들이다. 초대 김재홍 군수에서부터 윤영수 군수, 윤동환 군수, 황주홍 군수를 지나 현재 임기가 진행중인 강진원 군수를 뽑았다. 지역구의 변화가 있었지만 두명의 도의원과 8~10여명의 군의원을 뽑는 의식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지방자치는 초창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계적으로 정착을 해가고 있다. 지방자치는 주민들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고 주민들의 손으로 의회의원들을 뽑는다는 점에서 해방전과 해방후를 구분짓는 우리역사의 커다란 이정표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팔팔한 나이에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유년기나 10대때 해방을 맞았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일제강점기란 세월을 피부로 느끼지 않았던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세월 우리는 참 열심히 세상을 살았다. 큰 꿈을 이루었고, 그 성과물들을 후손들에게 자신있게 물려줄 수 있게 됐다. 우리의 후손들은 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보다 더 나은 문화생활을 향유하며 보다 자신감 있는 생활속에서 조상들의 업적을 기르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향유할 수 있도록 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의무가 있다. 지속 가능한 환경을 물려줘야할 의무가 있고, 강진이란 지역에서도 큰 꿈을 키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 조상들이 해방후 그 어려운 시간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고 큰 일들을 이뤘고, 그 결과물들을 오늘 우리가 풍요롭게 누리듯이, 우리의 후손들도 미래에 큰 꿈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오늘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시간을 지내고 있다. 해방후 70년, 그 세월은 참으로 고난의 시간들이었지만 쉬지않고 일했던 순간순간들이 아름다운 오늘을 낳았고, 희망찬 미래를 열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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