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헌 시인의 역사기행]<1> 나주 반남정에서 강진의 사의재까지 걷다

영암에서 강진으로 넘어 오는 누릿재. 다산은 이 길을 따라 강진으로 유배를 왔다. 나주 반남정에서 형님과 이별한 후 언제 돌아갈지 모를 이 길을 넘어 올때 다산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해가 설핏 지고 있다. 만덕산이라고 했던가. 반달고개 너머 서녘하늘이 붉게 타고 있다. 이젠 먼 길 동행한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다시 혼자가 됐다. 동문 밖을 서성인지 벌써 반 시진(時辰) 째다. 길섶에 주저앉아 어둔 하늘을 쳐다본다. 여기가 어딘가. 왜 내가 이곳 강진까지 와 있는가. 날은 이미 저물었다. 동문 안으로 들어선다. 소소리바람이 거리를 휩쓸며 달려가고 있다. 골목길 너머로 사라진다. 주변이 온통 적막이다. 인적도 끊어졌다. 어쩌다 스쳐 지나가는 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목이 마르다. 다리도 아프다. 무엇보다 가슴이 아프다. 오늘 하루 얼마를 걸었던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나주 율정 마을을 나섰으니 꼬박 일곱 시진(時辰)은 걸은 것 같다. 띠풀로 이은 주막집 푸르스름한 등잔불 밑에서 약전 형님과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탓인지 눈꺼풀도 무겁다. 
 
 

나주 반남정 주막거리, 새벽녘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형님은 길을 떠나고 없다. 땅이라도 꺼지는가. 심한 어지럼증으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새벽별 아직 총총한데 길을 나섰단 말인가. 살아생전에 다시 만난다는 기약 하나 없는 절박한 순간에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다니. 형은 차마 나와 마주보며 이별하기가 싫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형이 더 야속하고 원망스럽다.
 
평소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형이 아닌가. 함께 보낸 주막을 쉽게 뜰 수 없어 그 자리 맴돌기를 이각(二刻). 날이 밝아온다. 나도 길을 재촉해야 한다. 주막을 나오니 삼거리 길이다. 형은 왼편 갈림길을 따라 갔을 것이다. 영산포구를 향해 힘든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걸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오른쪽으로 휘어진 황톳빛 남도길을 따라가야 한다. 풀섶에 찬이슬이 맺혀 있다. 간간이 여치며 땅개비가 후다닥 줄행랑을 친다. 내 몰골 보지 않아도 뻔하다. 땟국물이 좔좔 흐르는 꾀죄죄한 행색에 눈망울은 십리나 들어가 있을 것이다.

길은 언덕을 넘고 산길로 이어진다. 노랗게 물이 든 솔잎이 수북하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가을바람이 휘돌아 나온다. 우수수 낙엽이 지고 있다. 솔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숙취로 지근거렸던 두통이 사라지자 가족들이 아른거린다.  

형님은 어디쯤 가고 계실까. 바닷길인데 별고는 없으실까. 망망대해를 일엽편주로 건너고 있을 형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오는지 가는지 흔적조차 가늠하기 힘든 난바다에서 뱃길을 잃고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너무도 갑작스레 풍비박산 난 가족사를 생각하니 또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오솔길을 벗어났다. 나지막한 평야지대가 나타난다. 나주목 어디쯤일 것이다.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발등을 내려다보니 짚세기 사이로 발가락이 삐죽 나와 있다. 내 발가락 내가 봐도 처량하다. 짚신도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하물며 나라는 어떤가. 온갖 생각들이 스쳐간다.
 
급작스런 정조대왕 승하 이후 영남의 장기현으로 내쳤다가 한양으로 압송했고 이제는 물설고 낯선 땅 강진이라니. 그러나 참아야 한다. 이겨내야 한다. 많은 가족친지들 참수당하고 관노로 끌려갔지만 아직 두물머리 강변에는 내 가족이 있고 이 땅에는 순박한 백성들이 있지 아니한가. 

눈 아래 게딱지처럼 달라붙은 들판이 텅 비어 있다. 추수 끝낸 논배미를 찬바람이 훑고 있다. 이삭이라도 줍는 것일까. 걸망을 걸친 아낙과 아이가 논바닥을 분주히 오고 간다. 올해도 흉작이라는데 주어 담을 낱알이 있기는 하는 건가. 어떻게 또 한해를 버틸까. 백성들은 하루 한 끼 때우기도 힘들다는데 조정에서는 허구한 날 싸움질로 날을 지새우고 있으니 이 나라가 걱정이다.  

반남정 주막을 나선지 한 시진(時辰) 반이 지났다. 아침에 요기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일까. 허기가 몰려온다. 갈증이 더 심해졌다. 짚신을 곧추 신고 길을 재촉한다. 밑창이 다 닳아 냉기가 발바닥을 핥고 있다. 천지가 적적하다. 억새가 솜털처럼 흔들리는 언덕을 지나 논틀밭틀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다시 자드락길로 접어든다. 찬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나뒹군다. 

이제 영암 땅으로 들어선다. 우뚝 솟은 월출산 북쪽 벽이 보인다. 울퉁불퉁 드러난 산맥의 근육이 나를 이끌고 있다. 힘을 내야지. 풀치재 지나 누릿재를 넘어야 한다, 세상에 이런 슬픔이 어디에 있는가. 유배지를 향해 처절하게 내달리는 기막힌 슬픔 말이다. 그래도 가야한다. 저물기 전에는 적소(謫所)에 도착해야 한다. 발밑이 감각을 잃은 지 오래다. 허리춤의 짚세기도 몇 개 남지 않았다. 참으로 참담하다.

어찌하여 이 길을 홀로 걷고 있나. 유배지 가는 길에 뿌린 내 눈물의 양을 하늘은 알고나 있는 걸까. 동짓달 삭풍이 정처 없이 떠도는 허공을 향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산새가 놀라 소스라친다. 우렁우렁한 울음소리에 낙엽이 또 지고 있다. 

어느새 누릿재 초입에 들어선다. 남도의 선비들이 과거보러 한양 갈 때 넘는 재라던가. 그런 선비와 마주칠까 두렵다. 아니 그를 만나 주막에서 대폿잔이라도 나누고 싶다. 외롭다. 쓸쓸하다. 배도 고프다. 점심때가 한참이나 지났다. 여기 어디쯤 주막이 있을 것도 같은데..,,

등짐을 짊어진 사내가 오고 있다. 사십은 넘겼을까. 바짝 마른 얼굴이 새까맣다. 추수 끝낸 잡곡을 돈사려고 영암장에라도 가는 걸까. 힐끔 한 번 쳐다보더니 피하듯 길을 비켜선다. 강진이나 해남사람들. 남해안의 해산물을 나주 등지의 농산물과 바꾸기 위해서도 무수히 이 재를 넘었을 것이다. 재가 가파르다. 기울어진 나의 오늘처럼 위태롭다. 고개를 돌려 내리막길의 사내를 바라본다. 이 땅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겹쳐 보인다.   

저만치서 주막이 다가왔다. 산죽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들었다. 때를 훌쩍 넘겨서일까. 안으로 들어서니 썰렁하다. 구석진 자리에서 부부로 보이는 사람 둘이 막 일어서고 있다. 탁자에 자그만 툭시발 두 개가 놓여 있는걸 보니 막걸리 한두 잔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나 보다. 쭈빗쭈빗 주모가 다가온다. 위아래를 훑어본다. 뭘 먹을 건지 묻는 표정이다.

우선 막걸리 한 순배를 들이켰다. 연거푸 한잔을 더 마신다. 순간 취기가 오른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흑산 바다 한가운데서 낙엽처럼 흔들리고 있을 형님의 안부가 궁금하다. 두물머리 가족들은 모두 무탈한지. 술을 너무 급하게 마셨나. 취기가 오르자 다잡았던 마음이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다. 국밥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한 식경(食頃)만에 일어섰다. 먹을 수가 없었다. 주모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 입을 닫는다. 

이제 부지런히 걸어야한다. 어두워지기 전에 강진현 동문 밖에는 도착해야 한다. 지금은 노론벽파의 세상이다. 나를 적소에 가두고 밀착감시하기 위해 노론 골수 이안묵을 강진현감으로 보낸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들에게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힌다면 나에게 무슨 더한 일이 닥칠지 모른다. 

해발 230미터의 누리령을 넘는다. 심호흡 한번 길게 하고 바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는 강진 땅이다. 저 아래 옹기종기 초가가 보인다. 아마 신월마을일 것이다. 경사가 그리 심하지는 않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기암괴석이 솟아 있다. 바위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달구봉을 바라봤다. 낯설지가 않다.  

“누리령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있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마소/ 봉우리들이 어찌 저리 한양 도봉산 같은고”
시 한수를 지어 읊고 나니 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상념에 젖어 있을 틈이 없다. 비탈길이 끝나자 평지가 이어진다. 부지런히 걸으니 반 시진(時辰)만에 월출산 천황봉 아래 월남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월남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려의 진각국사 혜심을 기리는 비와 삼층석탑만 잠깐 둘러보았다. 월남사 창건 시기는 후백제시대 혹은 그 이전인 백제시대 사찰이라는 이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담에 시간을 내 찬찬히 돌아볼 생각이다.

해가 월출산 서쪽 능선에 걸려 있다. 옥판봉 노을 기둥이 그림 같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다. 백운동 별서정원으로 넘어가는 길 좌측으로 꽤 너른 평수의 완만한 경사가 평지까지 이어져 있다. 말을 키우든 차밭을 일구든 잘만 가꾼다면 무척 쓸모 있게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월출산 자락의 풀빛 녹차밭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강진읍 동성리 사의재에는 주모와 주모딸의 동상이 서 있다. 다산이 강진에 처음 도착하던 날 모든 사람이 그를 기피했으나 주모는 뒷방을 내주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인기척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기 뉘시오? 뉘신데 그렇게 한데서 고꾸라져 있오” 동문안 큰샘 옆 느티나무 밑에 쭈그려 앉아 그만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꿈결처럼 지나온 발길을 더듬고 있었나 보다. “몰골을 보니 상거지가 따로 없네 그려. 어서 들어오시요!” 노파는 나를 이끌고 주막 안으로 들어선다.
 
“나를 거뒀다가 큰 화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참견을 하시는 거요!” “무슨 놈의 화는 화요. 게딱지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시요. 사람이 죽어가는 데 못 본채 하는 그런 인정이 시상에 어딨다요.” 주모가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에 과년한 계집아이가 행주로 탁자를 쓱쓱 닦고 있다. 주모의 딸이라도 되는 걸까. 슬쩍 나를 쳐다보다 눈길이 마주치자 시선을 얼른 거두고 딴전을 부린다. 수줍음이 묻은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다. 내가 엉거주춤 하고 있자 주모는 나를 자리에 앉히고 따끈한 아욱국과 막걸리를 한 됫박 내왔다. 그리고 나는 그 주막 골방에서 강진에서의 유배 첫날밤을 보냈다.     



만약, 그날 그곳에서 다산이 주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주모가 다산을 거둬주지 않았더라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날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다산은 유배 당시 극도의 공황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자포자기 상황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처구니없는 올가미에 걸려 가족들이 참형을 당하고 유배를 떠나고 관노가 된 현실을 지켜보면서 세상에 대한 증오와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사의재 뒤 골방에 은거하면서도 한동안 비탄의 나날을 보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때 주모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언제까지 허송세월을 보낼거냐, 후학이라도 가르쳐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주모의 간절한 충고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주모는 200년 전 그 주막을 나왔다. 사의재 뒷마당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오늘 그 길고 긴 주모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프로필> 전남수필회장 ,   전)목포MBC 보도제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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