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릭 하멜의 후손 히딩크…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기적을 만들다

4강 신화의 주인공이‘하멜의 나라사람’
강진사람들 키큰 네덜란드 감독에 남다른 애정
2003년에는 족적과 수족 받아 청자만들어 전시
월드컵 끝난 후 10년만인 2013년에야 강진방문

강진군은 히딩크 감독을 강진에 초청하기 위해 월드컵이 열린 2002년 7월부터 노력했으나 계속 좌절됐다. 히딩크 감독은 2013년 5월에야 강진을 찾았다. 히딩크 감독이 생명과학고 축구팀 선수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2002년은 월드컵의 해였다. 당시 어느지역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강진사람들도 우리 대표팀이 4강에 오르는 것을 보며 뜨겁게 달아 올랐다. 강진읍 영랑로에 대형스크린이 마련돼 주민들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몰려 나왔다. 종합운동장 잔디밭에도 대형스크린을 통해 월드컵 경기를 중계했다. 집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남녀노소 할것없이 붉은 티셔트를 입고 TV앞에서 환호했다.

강진 사람들이 월드컵에 남다른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국민영웅 히딩크 감독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강진은 핸드릭 하멜이 1656년부터 억류생활을 했던 것이었다. 1998년에는 강진군과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본격적인 교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월드컵 열기와 네덜란드인 히딩크의 활약은 강진 사람들에게 남다른 감회가 아닐 수 없었다.

호르큼시는 2002년 7월 3일 강진에 “한일월드컵 축구의 좋은 결과로 2003년 호르큼시에서 개최되는 하멜 한국표류 350주년 기념행사에 좋은 홍보가 되었다”는 축하전문을 보내왔다. 강진군은 히딩크감독이 한국에 귀화할 경우 본적을 강진 병영으로 할 것까지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에 히딩크 감독이 한국으로 귀화할 것이라는 신문 기사가 많이 나올 때였다.

2003년 7월 강진군 관계자들이 서울에 올라가 히딩크 감독을 만나 수적과 족적을 찍어서 청자로 만든 것이다. 현재 병영의 하멜기념관에 전시중이다.
같은달 20일에는 하인드브리스 주한 네덜란드대사는 강진을 예고없이 방문했었다. 하인드브리스 대사는 월드컵이후 네덜란드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라고 소개했다. 월드컵의 주인공이었던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며 네덜란드 사람들도 강진과 하멜의 인연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던 것이다.

그 와중에 강진이 가장 먼저 추진한게 바로 4강신화를 이룩한 히딩크 감독을 강진으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강진군은 한국의 4강 진출이 확정된 7월 8일 네달란드 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네덜란드인 하멜의 숨결이 숨쉬는 강진에 히딩크가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 지정문화제인 청자문화제에 히딩크가 참석해 자리를 빛내달라”고 공식요청했다.

그러나 다른 소식을 받지 못했다. 히딩크는 결승진출이 좌절된 후 곧바로 네덜란드행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에는 축구대표팀의 4강 진출후 각 지역에서 워낙 많은 히딩크 기념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사관측이나 히딩크 본인이나 특별히 강진만 찾는다는게 사실상 어려운 일이였을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귀국한 것은 1년 후였다. 2003년 7월이었다. 당시 윤동환 군수는 방한중인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만나기 위해 서울 햐얏트호텔로 찾아가 청자문화제 초청장을 전달했다. 짧은 시간이었다. 군은 청자문화제에 히딩크를 초청해 ‘하멜과 히딩크의 역사적인 만남의 장’으로 연결시킨다는 계획이였다. 그러나 그 역시 영웅 히딩크의 스케줄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윤군수가 히딩크 감독을 만나고 내려온지 10여일이 지난 후였다. 갑자기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22일 오전경 히딩크 감독의 면담이 오후 2시에 가능하니 급히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군은 황급히 청자 도판(陶版)을 준비해 윤동환군수와 상형전문가 배양수(58·청자사업소)씨등이 광주에서 어렵사리 오전 11시 30분 비행기를 탔다.

그동안 군은 청자문화제 개막식에 히딩크를 초청하기 위해 대사관측을 통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직원들이 해외연수차 네덜란드에 들렀을 때는 가족을 통해 청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히딩크는 강진에 큰 호감을 가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측 매니지먼트사가 모든 일정을 조정, 강진방문은 불가능할 것으로 얘기됐다. 군은 그럼 족적이라도 남겨달라고 협의를 했고 이날 갑자기 통보를 받은 것이다.

2002년 월드컵 한국전이 열리는 날이면 전국의 거리가 빨간티셔츠로 뒤덮혔다.
서울하얏트 호텔에 도착한 윤군수 일행이 히딩크의 방에서 도판을 준비하고 있을 때 히딩크가 체육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피스컵 결승을 위해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나가는 길이었다. 히딩크가 처음으로 족적을 뜨는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중앙방송사 카메라 기자들이 몰려왔으나 일체 취재가 금지됐다. 동행한 군청 김종식씨 만이 촬영이 허용됐다.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는 “취재를 허용해 방송에 나가면 밀려오는 면담요청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히딩크는 구두를 벗는 과정에서 무척 부끄러워 했다. 주변사람들에게 “양말은 잠 잘 때만 벗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히딩크가 양말을 벗고 도판에 양발을 올렸다. 이때 가장 긴장했던 사람은 청자사업소 배양수씨였다고 한다. 1986년 청자사업소에 들어와 20여년을 일만 해왔지만 족적의 모양이 잘 떠지게 하기 위해 히딩크 발을 여기저기 주무르며 강약을 조절할 때는 땀을 닦아야 했다.
 
배씨는 이어 수적을 뜰때도 남들은 악수하기(?)도 어려운 히딩크의 양손을 수분 동안 잡을 수 있었다. 배씨는 “히딩크의 발이 크지는 않았지만 두툼한 형태였고 손 역시 아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히딩크는 청자문화제가 적힌 대형 프랑카드에 사인을 했고, 마지막으로 1분 정도의 영상메세지를 제작했다. 청자문화제를 축하하고 내년에는 꼭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강진에 배분된 시간은 정확히 30분. 메니지먼트사는 시간이 되자 1분도 초과하지 않고 히딩크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족적과 수적을 챙긴 윤군수 일행은 도판에 판자를 끼워 모양이 변형되는 것을 막는 장치를 한 다음 건조를 막기 위해 두꺼운 비닐보자기에 싸서 애지중지 강진으로 운송해왔다.

히딩크의 족적과 수적은 5개여월 동안의 제작과정을 거쳐 청자로 완성했다. 가로 33.5㎝, 세로 54.5㎝의 직사각형 청자에는 위쪽에 히딩크의 두발이, 아래쪽에 양손이 각각 새겨져 있고 제일 아래쪽에는 히딩크의 자필 사인이 새겨져 있다. 평면으로 제작된 ‘히딩크 손발 청자’는 일반 청자를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일반적인 청자제작과정인 건조과정과 초벌구이, 유약처리, 본벌구이등과 함께 특히 평평한 바닥모양 때문에 초벌 및 본벌구이 과정에서 3번의 실패를 거듭했다. 바닥면적이 넓은 청자제작은 실패율이 높기 때문에 청자제작자들 사이에 최고난도 기술로 통하고 있다.

열광하는 히딩크 감독의 모습이다.
히딩크가 강진에 온 것은 2013년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난후 10년만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강진에 와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병영면의 하멜기념관이었다. 강진원 군수의 안내로 기념관을 둘러본 히딩크 감독은 강진군과 자매결연 도시인 호르큼시에서 보내 온 17세기 네덜란드 도자기와 지도, 네덜란드와 한국의 나막신 비교 전시 등을 관람했다.

특히 지난 2003년 피스컵 한국 일정 중에 ̒강진청자축제 성공기원 영상메시지̓를 촬영한 뒤 자신의 손과 발 프린팅을 구워서 만든 청자도판을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만난 하멜기념관은 특별했다. 또 기념관이 유명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방문의 의미를 부여했다.
 
히딩크 감독은 강진생명과학고등학교 축구부원들의 영접을 받고 축구공 사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등 축구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학생들에겐 “한국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이룩한 것처럼 여러분도 열정과 긍지를 가지고 축구를 열심히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격려했다. 아울러 “한국 국가대표팀과 함께 할 때의 열정과 의지가 항상 기억에 남아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 대표팀과 다시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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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 평생 독신으로 산 이유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히딩크는 항상 애인을 대동했다. 그러나 하멜은 한국을 떠난 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헨드릭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세 번 결혼했었다. 네덜란드는 매춘을 합법적 인정할 만큼 성이 개방돼 있는 나라다. 히딩크 감독도 한국에 있으면서 자신의 애인인 엘리자베스를 항상 동행해 이런저런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핸드릭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 왜 그랬을까. 1653년 1월 10일 ‘스파베르(Sparwer·바다 보라매)’란 상선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부근에서 출항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네시아 대만을 지나 종착지인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르는 기나긴 동양 항해 길에 올랐다. 이 배에는 헨드릭 하멜을 포함해 64명의 선원들과 상인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배가 대만과 나가사키 중간에서 모진 태풍을 만날 때까지는 곧 이루어질 무역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행복감에 겨워 있었다. 그러나 이 배는 곧 태풍을 만나 파선되었고 파도에 떠밀려 제주도 남쪽의 ‘가파도’에 도착했다. 1653년 8월 15일의 일이다.

그이후 하멜과 그의 일행들은 서울과 강진의 병영등에서 13년의 억류생활을 하다 1666년 9월 5일 탈출, 14일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하멜은 한국을 탈출한 후 바로 고향으로 가지는 않았다. 1667년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일본쪽의 허가를 받아 다른 일행은 배를 이용해서 1668년 7월 20일 조국에 도착했으나 하멜은 인도에 남아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네덜란드에 대한 향수가 덜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멜은 표류기를 완성한 후 1670년에야 조국으로 건너갔다.

귀국한 하멜의 생활은 한국에서 머물기 전 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았다. 1734년께 호르큼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에 따르면 하멜이 1670년 호르큼에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멜은 그후 1692년 2월 12일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여전히 미혼이었다.

하멜은 탈출후 왜 고향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또 왜 죽을때까지 미혼을 고집했을까. 혹자들은 하멜의 이같은 행적은 병영에 가족을 두고 탈출, 이들을 잊지 못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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