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7월 1일 초대 민선군수 취임… 지자체 경영마인드 도입 본격화

네덜란드 하멜고향과 교류, 제1회 청자문화제 개최
강진청자자료박물관 개관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 민선군수때 시작

1996년 9월 제1회청자문화제가 종합운동장에서 개막됐다. 지금은 청자축제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음사진은 김재홍 초대군수를 비롯한 강진군 관계자들이 96년 10월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시를 방문해 교류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마지막 사진은 97년 9월 개관한 청자자료박물관. <사진= 강진군정 50년사>
90년대 가장 큰 정치적인 변화를 꼽으라면 민선군수를 선출했던 일을 빼 놓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군수는 정부가 임명해서 내려보내는 자리였다. 해방직후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후 1952년 첫 지방선거가 치러졌으며, 이후 1960년 12월까지 세차례에 걸쳐 계속되다가 5.16 이후 중단된 후 1990년에 부활됐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방의원들을 뽑는 것이었다.

1990년 지방자치가 부활된 후에도 여전히 군수는 도지사가 임명해 내려보낸 임명직이었다. 진정한 지방자치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94년 3월 지방자치법이 개정돼 4년 임기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1995년 6월 30일 이내에 실시하기로 정치권이 합의하게 된다. 실제 초대 민선군수의 임기는 1995년 7월 1일부터 1998년 7월 1일이었다. 이후 2대 민선군수까지 90년대말까지 모두 두 번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됐다.

원님을 뽑는 선거가 처음 열리면서 지역사회는 일찌감치 술렁거렸다. 도지사의 임명을 받고 내려와 일정한 임기만 채우면 떠나버리는 군수가 아니라, 4년 임기가 보장되고 인사권과 예산집행권을 한손에 거머쥔 민선군수 선거는 지역사회에서 실세 중의 실세를 뽑는 일이었다.

 1990년초 군의회가 부활된 이후 도지사가 내려보낸 관선군수는 그렇게 큰 힘이 없었다. 군의회 의장이 더 실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관선군수들은 지방의원들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민선군수는 지방의원들과 똑같은 선출직으로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가지고 군정을 펼칠 수 있는 그야말로 지역의 원님이었다.

이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리 없었다. 선거일은 1995년 6월 27일로 잡혔다. 기초의회 의원 및 단체장과 광역의회 의원 및 단체장을 뽑는 최초의 4대 지방선거였다. 일종의 과도기적 성격으로 임기는 3년이었다.

당시에는 지역에 야당의 뿌리가 튼튼하게 착근하고 있는 시기였다. 1988년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평민당 황색바람을 일으키며 당선된 김영진의원은 당선된 후 내리 3선을 기록하며 1995년 지방선거를 맞고 있었다. 초대 지방선거부터 여당 후보는 애초에 얼굴을 내밀 분위기가 아닐 정도였다.

중요한 것은 누가 평민당 후신인 민주당의 공천을 받느냐하는 것이였고, 그 과정에서 지구당위원장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당내 보이지 않는 경선이 무엇보다 중요한 싸움이었다. 이렇게 해서 민주당 공천자로는 66세의 김재홍 전 강진군농촌지도소장이 결정됐다.

군수후보는 김재홍 후보를 비롯해 초대 군의회의장을 지낸던 윤옥윤(49)씨가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최영범(46)씨가 역시 무소속으로 출마해 후보는 모두 3명이 됐다. 40대 후보 2명과 60대 후보 1명의 대결이었다. 선거는 민주당이란 거대조직과 무소속 후보간에 치열하게 전개됐다.

오랫동안 공직에 투신해 정치쪽은 거의 몰랐던 김재홍 후보는 민주당의 조직적인 지원속에 선거를 치렀고, 윤옥윤 후보는 과거 민정당계와 전통 자신의 지지층을 흡수하며 선거전을 치렀다. 최영범 후보는 타고난 달변을 주 무기로 읍면지역을 훑고 다녔다.

결과는 김재홍 후보의 당선이었다. 눈여겨 볼 것은 마지막까지 선전한 윤옥윤 후보의 득표력이었다. 김재홍 후보가 1만4,532표를 얻어 당선됐으며, 그 뒤를 윤옥윤 후보가 1만2,723표를 얻어 불과 2,809표차이로 당락이 결정됐다.

당시 전남지역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이처럼 민주당 공천자와 무소속 후보간에 적은 표차이로 당락이 결정된 경우가 많아 인근 해남의 경우 민주당 김창일 후보가 무소속 민화식 후보를 역시 3천여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고, 영암은 민주당 박일재 후보가 무소속 김철호 후보를 862표차이로 승리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민주당의 지지세가 강세인 가운데 처음으로 열린 군수선거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공천과정의 잡음으로 민심이 상당히 요동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들이다. 당시 동시지방선거에서 도의원은 가지역에서 차봉근 후보가, 나지역에서 윤영배 후보가 각각 당선됐다. 모두 민주당 공천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군의원은 강진읍 최창규(58), 군동면 김양숙(48), 칠량면 김원중(55), 대구면 황호만(53), 도암면 김재진(57), 신전면 이정후(47), 성전면 강영석(46), 작천면 김창언(56), 병영면 김갑현(55), 옴천면 주장식(48), 마량면 박순식(44)등이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김재홍 초대민선군수는 칠량 출신으로 국립대구농과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지도직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하여 전남 농촌진흥원 농촌사회과장·지도과장, 광주시·담양·나주·광산·승주군 농촌지도소장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후 89년 말에 정년퇴직을 했다. 정년퇴직 6년만에 화려하게 공직에 복귀한 것이었다.

민선1기는 나름대로 화려하게 시작됐다. 군수의 판단이 중요한 정책결정 요인이 되고, 각 지역 군수들이 경쟁적으로 지역발전 복안을 내놓으면서 강진뿐 아니라 각 지역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방자치의 긍정적인 신호들이었다.

강진도 민선1기 출범이후 많은 변화들이 나타났다. 제1회 청자문화제가 열린 것이 김재홍 군수 취임 1년 후인 96년 9월이었고, 군동등에 첨단유리온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도 민선1기 출범 직후부터였다. 고려청자박물관의 전신인 강진청자자료박물관이 개관한 것도 민선1기 출범 2년 후인 97년 9월 이었다.

하멜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역사를 근거로 네덜란드 호르쿰시와 처음으로 교류를 시작한 것은 이보다 조금 앞선 96년 10월이었다. 의미있는 국제교류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96년 10월 3일부터 4일 동안 김재홍 군수를 비롯한 군관계자들과 강영석 당시 군의장등이 네덜란드 호르쿰시를 방문해 교류협력방안을 처음으로 논의했다. 강진을 와달라고 공식적으로 초청의사도 전달했다.

이에대한 답방형식으로 호르쿰시관계자들이 97년 5월 22일 강진군을 방문했다. 하멜이 강진에서 억류생활을 하다가 여수로 옮겨진 후 탈출한게 1666년이니까 그의 후손들이 300여년만에 강진을 찾은 역사적인 방문이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손님들은 방한기간중인 하멜이 억류돼 있던 강진 병영성과 청자도요지, 백련사 등을 둘러 보게하고 자매결연 의향서를 상호 교환했다. 또 강진군의 하멜기념관 건립 및 병영성내 하멜 체류지 복원 등의 사업 추진을 돕기 위해 호르큼시에서 네덜란드의 민속자료와 하멜 관련자료를 제공하기로 하는 등 두 지역간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특히  네덜란드 화훼기술의 전수와 강진 청자의 네덜란드 수출방안 협의 등 실질적인 경제협력 방안도 모색하기로 하는등 여러 가지 내실있는 협의들이 오갔다. 이렇듯 민선군수가 취임하면서 강진에서는 나름대로 큰 변화가 있었고, 오늘날까지 그 사업들이 계속되는 주춧돌을 놓는 일들을 여러가지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여타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초창기 민선군수들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많았다. 공무원들의 승진과정에서 금품이 오간 일이라든가, 공사발주 과정에서 공식적인 리베이트가 오간 소문등은 강진에서도 끊이지 않고 떠돌았다. 그래서 취임초기 지역발전이라는 큰 다짐을 가지고 출발했던 민선군수들이 임기 후반기에는 늘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기고 쓸쓸히 퇴장하곤 했다.

김재홍 초대민선군수는 말년에 여러 가지 구설수에 올랐다가 쓸쓸한 퇴임을 했다. 민선2기 선거에서 후보등록 막판에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고 뛰어들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광주로 이사했다. 그는 2008년 12월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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