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사당리 발굴보고서 50여년만에 발간

국립중앙박물관, 1964년~77년까지 발굴작업

국립중앙박물관발굴팀이 1964년 대구 사당리 발굴조사에서 발견해 낸 청자음각용문매병. 용의 문양이 청자의 윗부분을 감싸고 있는 명작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과장과 정양모 학예관보는 1964년 초 고려청자 기와를 찾아 무작정 강진으로 내려온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단서는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강진의 대구에서 청자기와편 하나를 수집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구에 도착했을 때 눈에 보이는 고려청자 가마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도굴꾼들에 의해 한바탕 쓸고 지나간 후 파괴돼 흔적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순우 과장과 정양모 학예관보는 나침반과 지도만 들고 과거 도요지로 추정되는 언덕을 수없이 오른다. 그러던 5월 늦은 어느 봄날이었다. 그날도 대구 사당리 일대를 돌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청자파편이 가득담긴 헌 소쿠리를 들고왔다. 소쿠리속을 들여다 본 최과장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청자기와 암막새 파편하나가 파편무더기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토록 찾고 찾았던 청자기와 파편을 촌부의 헌소쿠리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최과장과 정학예관보는 “색이 좋고 그림이 그려 있는 사기조각들이 집마당을 파보면 많이 나온다”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사당리 117번지 문제의 초가집으로 달려갔다. 117번지 초가집은 일제강점기때 파악한 100여개소의 요지속에 포함되지 않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의 탐문조사 동안 사각지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청자기와, 청자타일등
청자편 10만여점 발굴
섬세한 도공의 숨결 지금도 생생

당시 소쿠리를 들고 나타난 촌부는 이용희 전 청자사업소 연구실장의 모친 김월엽씨였고, 소쿠리에 청자편을 담아놓은 사람은 막 군대에서 제대한 이용희 실장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그해부터 곧바로 대대적인 발굴에 들어갔다. 그후로 1977년까지 총 9차례에 걸쳐 사당리 일대 지금의 청자박물관 주변의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곳에서 발굴한 청자편이 10만여점이 넘는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사당리 발굴조사에 대한 보고서를 내지 못하다가 거의 50여년만인 최근에 ‘강진 사당리 도요지 발굴조사 보고서’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발행했다. 사당리 일대의 고려청자편들이 다시 햇볕을 보게 되기까지 80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보고서로 다시 나오기까지 50여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발굴은 1964년 이후 거의 매년 진행됐다.

64년 1차 조사때는 ‘청자압출양각당초문암막새’를 비롯한 청자기와 편들이 출토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1965~66년의 2차와 3차 조사때에는 이용희씨 집 주변 퇴적층 조사를 실시했는데 요즘 목욕탕등을 장식하는 타일로 사용하는 성격의 청자도판이 출토되어 역시 학계의 큰 관심을 받았다. 10만여점이 넘는 유물을 분류하고 관리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국립중앙박물관측은 정양모 전 관장등의 주관으로 1994년부터 96년까지 출토품에 대한 기초 정리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작업은 나무 상자와 포대에 보관중인 출토품을 세척해서 정리용 상자에 옮겨담고, 조사당시 작성한 발굴일지와 연도별 조사 시굴갱의 명찰등을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출토품 중 일부를 선별해서 조사연도별, 출토장소별로 분류하고 유물카드를 작성해 전체 유물에 대한 현황파악과 사진촬영등을 진행한 대 역사였다.

551페이지로 된 보고서는 당시 발굴된 청자편들을 정밀 촬영해서 발굴장소와 편의 성격등으로 분류해 많은 사람들이 사당리에서 발굴된 청자편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했다. 사당리에서 발굴된 청자편들은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중이라고 한다.

이번에 발굴보고서 발행을 계기로 청자편을 임대해 강진의 박물관에 전시하는 방안을 찾는등 강진청자를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나와야 할 것으로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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