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동 화방마을에 살며 강진농업고등학교 다니다 징집돼 월북

90년대 남북 시인들 교류하며 자취 밝혀져… 원래는 장성 출생

1990년 남북교류 차원에서 남쪽의 시인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이를 한겨레신문이 동행취재한 적이 있었다. 한겨레신문은 1990년 9월 4일자에 북한에서 만난 시인들의 이야기를 두차례에 걸쳐 실었다. 그중에 북한의 유명 시인 오영재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때 이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란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남쪽 가족들과 군동 화방마을에서 사는 그의 남쪽 친구들이었다. 오영재 시인은 6.25때 월북 된 후 그 생사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고향은 장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강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지금도 많은 자료에 그의 고향이 강진으로 되어 있다. 그는 1946년 군동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4학년에 전학을 왔다. 그의 나이 11살때의 일이었다.

그가 산 마을은 군동 화방이었다. 그는 이후 지금의 전남생명과학고인 강진국립농업중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3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7월 16세의 나이에 의용군에 입대해 월북했다. 그의 삶의 큰 전환점이 강진에서 이뤄진 것이었고 한편으로 시적으로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초반과 중반시절을 강진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친구들도 군동에 많이 있었다.

평화롭던 마을은 6·25가 발발한지 한달만인 7월 25일 인민군이 강진을 점령하면서 분위기가 삭막해 졌다. 교장댁에 형제가 다섯명이나 됐던 오영재의 집에 징집명령이 떨어졌다. 오영재는 형들을 대신해 의용군에 자원 입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형 오승재씨는 훗날 이학박사로 한남대교수를 역임했고, 동생 형재씨는 서울시립대 교수, 근재씨는 홍익대 교수를 지냈다.

오영재 시인이 북한에서 낳은 가족들의 모습이다. 오시인은 북한에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남한의 어머니를 평생 잊지 못했다. <사진=강진일보 자료사진>
당시 의용군 수용소는 장흥의 관산초등학교에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불편한 몸으로 한 살 난 여동생을 업고 70리 초행길을 8월의 폭염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왔다. 그때 어머니가 그랬다고 한다. “너 잘 있는 것 봤으니 됐다” 오영재는 훗날 “그때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어둑어둑 해지는 길을 되돌아가시던 모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인민군부대에서 일주일 군사훈련을 받은 뒤 다음날로 곧장 낙동강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녘으로 후퇴해서 줄곧 북한에서 살았다.

2000년 8월 15일의 일이다. 그해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후 1985년 이후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서울에서 열렸다.

울부짖음과 통곡 속에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장에 이마에 서너 줄 굵은 주름이 패어 있고 얼굴이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린 남자가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가 상봉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낭독했다.

‘늙지 마시라/더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통일되어/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이 가슴이 아픈데/세월아. 섰거라./통일되어/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너 기어이 가야 한다면/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나에게 다오./내 어머니 몫까지/한해에 두살씩 먹으리/검은빛 한오리 없이/내 백발 서둘러 온대도/어린날의 그때 처럼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그 다음에/그 다음엔/내 죽어도 유한이 없으리니
어머니 찾아가는 통일의 그 길에선/가시밭에 피 흘려도 아프지 않으리./어머니여/더 늙질 마시라./세월아. 가지 말라./통일되어/우리 서로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그는 북한의 최고영예인 계관시인 호칭을 받은 오영재였다. 북한 시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1989년 ‘김일성상’을 수상했고, 95년 ‘노력 영웅’ 칭호를 받은 데 이어 북한 최고 훈장인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북한의 유명시인이라면 꼿꼿이 서서 ‘어버이 수령동지’나 외칠 것으로만 알았던 남한 사람들에게 ‘늙지 마시라./더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하고 애절하게 풀어놓은 그의 시는 ‘아 우리도 같은 민족이구나’하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이후 2005년 남북 민족작가대회에 북한대표로 참석하는등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시절 활발한 남북교류에 참석했으며, 2011년 10월23일 갑상선암으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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