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강진공업전문대학 인가… 97년 성화대로 개교까지 파란만장한 세월

전남 서남부지역 최초 공업전문대학 추진
주인 세차례 바뀌고 개교 지연

성화대학이 한창 잘 나갈 때의 사진들이다. 제일 좌측부터 성화대학 건물이고 두번째는 영암 삼호에 있었던 성화대학 부설 비행교육장이다. 다음 사진은 성화대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장면이고, 마지막 사진은 학교 축제때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이제 추억의 사진들이 되어 버렸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강진 사람들은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강진에 대학교가 설립된다는 것이었다. 대학교 설립은 강진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강진농업고등학교를 4년제 대학으로 바꿔보려는 노력을 다방면으로 했으나 오랫동안 물거품이었다.

대학설립 인가는 1991년에 나왔다. 당시에는 전문대 설치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정부에서는 학생들이 취업의 전문성을 기를 수 있는 전문대학 설립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다. 산업현장에서는 전문대 졸업 수요자가 급증했다.

인가된 대학은 강진공업전문대학이었다. 전남서남부지역에 최초로 설립되는 공업전문대학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전문대학 설립 바람속에 전남서부지역 최초의 공업전문대학이란 부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주민들의 기대도 컸고, 대학이 들어설 성전면 소재지 일대의 땅값이 들떡거렸다. 벽봉학원이란 재단을 설립한 장충진(당시 62세)이사장은 성전면 월평리에 학교를 세워 건축과와 전자과등 6개 학과에 학생 480명을 모집해 94년 3월 개교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전남서남부지역 최초의 공업전문대’ 강진공업전문대는 출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94년 3월 개교를 목표로 성전면 월평리 일대에 부지매입이 추진됐으나 여러 가지 난관에 부닥쳤다.  93년 하반기가 오고 개교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나 총 부지 9만4백㎡가운데 재단소유 6필지 2만7천5백여㎡와 개인소유 10필지 7천8백90여㎡만 매입 또는 토지사용승낙서를 받았을 뿐 나머지 16필지 5만5천여㎡는 아직까지 매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토지 소유자들이 인근 전답과 산의 시세인 평당 5천-1만5천원보다 10배가 높은 50만-1백50만원을 요구하거나 광주지역에 대토를 마련해 달라는 요구조건을 내세웠던 것이다. 벽봉학원은 개교를 코앞에 두고 착공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등 94년 3월 개교는 이미 물건너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94년말 경기도 성남출신인 정승기란 사람이 10억원에 재단을 인수한다. 대학 개교도 못해 보고 재단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정승기 이사장은 학교 공사는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개교를 준비하느라 교직원 채용은 예정대로 진행했다. 신규 대학의 설립은 큰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97년 세림학원 인수 개교후 승승장구
480명이던 전교생 2,700명까지 증가
2000년대 중반들어 학내문제로 삐걱
2012년 결국 폐교, 역사속으로 사라져 

특히 교수직이라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자리가 수십개 창출되면서 여기에 들어가려던 경쟁도 치열했다. 사립대학이다보니 인맥을 동원한 로비가 횡횡했을 것이고, 자비로 학교를 세우는 재단 입장에서도 학교건립을 위한 재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같은 상관관계는 결국 큰 사고를 내고 만다.

1996년 10월 ‘교수채용 미끼 11억 챙겨’란 기사가 전국에 나왔다. 내용인즉, 강진공업전문대 설립을 추진하는 벽봉학원 정승기 이사장이 교수채용을 조건으로 서모씨로부터 6천만원을 받는등 22명으로부터 11억7천여만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정이사장이 법인을 인수한 뒤 부족한 대학설립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사촌동생을 법인사무국장으로 임명해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당시 정이사장과 사촌동생은 구속됐으나 금품을 제공한 사람들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학교가 정식 설립되지 않았고 아직 교수로 채용도 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들은 설립도 되지 않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돈을 줬고, 그 학교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돈만 떼인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대학은 다시 새 주인을 맞는다. 이행기 이사장이 새 주인이 되어 1997년 1월 학교법인 세림학원을 만들고 성화전문대학을 설립인가를 받았다. 학교 이름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학교는 그해 3월에 개교를 했고 1998년 성화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

재단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무리한 일이 있었다는 말들이 꼬리를 물었다. 특히 정승기 전 이사장은 이행기 신임 이사장이 학교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치권과 검찰, 조직폭력을 동원해 강제로 빼앗아 갔다며 각계 요로에 진정서를 내고, 관련글을 인터넷등에 올렸으나 공론화 되지 못했다.  

한편으로 97년 세림학원이 본격적으로 운영을 시작한 성화대학은 승승장구했다. 성전면 월평리 224번지 6만여평의 면적에 ‘봉사하는 직업인, 전문적인 국제인, 창조하는 지성인’이라는 건학이념을 내세웠다. 첫해 건축과, 전기과, 전산정보처리과, 공업경영과 4개학과 320명을 모집해 본격적으로 대학이 문을 열었다.

이후 성화대학의 모습을 보면 급성장한 과정을 볼 수 있다. 98년도에는 인터넷통신과, 항공운항과등 9개학과가 신설되었고 정원도 크게 늘어나 12개학과 1천200명의 신입생들이 입학했다. 건축디자인과, 카지노경영과, 광고디자인등 8개학과를 신설한 99년도에는 총19개학과 1천680명의 신입생들이 성화대학을 찾았다. 대학본부가 위치한 세림관이 준공된 99년에는 학생들의 체육관인 관동관이 개관하고 목포정보기술교육원, 진도캠퍼스, 중소기업지원센터가 개소식을 가졌다. 지역민들을 위해 사회교육원 정보통신 고위관리자과정을 개설한 2000년에는 중소기업 기술지도 대학으로 지정됐다.

다음해인 2001년에는 체육계열 골프전공, 경기지도전공등이 새로 신설돼 총10개계열 3개학과 33개 전공코스로 1천520명의 신입생이 성화대학을 지원했다. 2002년도에는 3년제 작업치료과, 응급구조과가 새로 신설되고 2년제 유아교육과가 새로 신설된 해에는 80여명의 입학정원을 줄여 질높은 교육환경에 힘썼다.
성화대학은 2000년부터 기술지도대학으로 선정되었고 창업보육센터 지정대학이 되었다. 또한 특성화 교육부평가. 관광산업육성, 신직업교육 문화육성 우수대학으로 각각 선정됐다.

그러나 2000년들어 성화대학은 끝없는 분란에 휩싸였다. 2006년 교육부 감사에서 이 대학 설립자 겸 이사장이 국고보조금과 교비 등 58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밝혀져 임시이사가 파견됐고 2010년과 2011년에도 이사장이 국고보조금 및 교비 횡령, 교수 임용 비리 등으로 구속됐다. 성화대학은 이런저런 우여곡절 속에 폐교 조치를 받으며 2012년 2월 29일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폐교당시 성화대학의 총 학생수는 2천770여명이었다. 교수숫자만 82명에 달했다.

성화대학은 교과부로부터 폐교 조치는 됐지만 학교 상황이 나쁜게 아니었다. 성화대학은 개교후 폐교직전까지 신입생 모집에서 미달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국 146개 전문대학 중에서 50% 안에 드는 대학이었고, 전남에서는 목포과학대 다음으로 잘나가는 학교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단지 경영진의 방만한 경영과 공금유용, 문어발식 사업확장등이 문제였기 때문에 이 부분만 개선되면 얼마든지 좋은 학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폐교조치까지 간 것에 대해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성화대학이 폐교되면서 불똥이 튄 곳이 성전면 소재지 일대 상가들이었다. 학생들만 바라보며 장사를 했던 대부분의 상점들이 함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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