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개관, 499석 군단위 최대규모 극장

80년대 후반 폐쇄, 1992년 볼링장으로 변신

윗 사진은 강진극장이 처음 개장된 후의 모습이다. 아래사진은 1963년 대통령 선거때 민정당 윤보선 후보(모자 든 사람)가 강진극장에서 유세를 하고 극장통을 행진하던 모습이다. 당시 극장통 주변의 상가와 사람들의 모습이 활기차 보이기만 하다.<강진일보 자료사진>
많은 강진 사람들의 추억속에 생생한 강진극장은 80년대 후반에 문을 닫았다. 정확한 날짜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건물만 있다가 1992년에 볼링장으로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진극장은 1962년 7월 31일에 문을 열었다. 강진극장 건립은 처음에 강진읍사무소가 주도해서 시작된 일이였다고 한다. 강진경찰서 아래에 강진공회당이란 공공건물이 있었는데 당시까지는 모든 영화상영이나 옥내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그러다가 점점 인구가 늘어나고 건물이 노후 되면서 강진읍사무소가 극장건립을 추진했던 것이다.

강진읍사무소가 발주를 해서 광주의 남도건설이 건물공사를 맡았다. 그런데 이 회사가 중간에 부도가 나면서 공사가 한참 중단됐다. 당시 남도건설로부터 하청을 받았던 지역의 소업체가 큰 피해를 봤다. 부친이 하청을 맡았다가 큰 피해를 본 출향인 황기순(81. 서울 은평구)씨는 “그때 밀린 인건비를 주느라 집안의 재산을 모두 날릴 정도로 피해가 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인근지역 극장이 잘되는 것을 본 강진의 유지들이 그럼 우리가 해보자고 나섰다고 한다.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극장계’라는 것을 만들어 극장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일종의 주식회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극장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약국을 경영하던 서정환씨, 천일의원 김성수 원장, 잡화상을 했던 명원채씨, 김유홍씨, 손시철, 김학수씨등이었다.

서정환씨는 ‘서정환약방’을 운영하며 적지 않은 현금과 부동산을 가진 사람이였고, 천일의원 김성수 원장 또한 강진에서 돈을 긁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병원이 성업중이었다.

명원채 사장은 화장품 장사를 대규모로 했다. 손시철씨는 지금의 산림조합 주유소자리에서 은하소주를 운영했던 사람이다.

훗날 은하소주자리는 원진주유소가 들어선다. 이번에 김유홍 선생이 별세함에 따라 당시 극장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고인이된 셈이 됐다.  

당시만해도 강진극장 터는 강진에서 제일 비싼 땅이었다. 특히 비싼 땅에 500석이 가까운 2층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일이여서 강진의 부자들이 돈을 갹출했던 것이다. 대표는 서정환씨가 맡았다.

규모는 인근지역과 비교해서 가장 컸다. 정확한 좌석의 규모는 499석. 500석에서 한석이 부족한게 흥미롭다.

아마도 건축법상의 어떤 규정 때문에 그렇지 않았는가 추정해 보는데, 아무튼 그 정도의 규모는 여수의 시민극장(961석), 중앙극장(522석), 목포의 평화극장(667석), 호남극장(679석), 순천의 맘모스극장(749석), 시민극장(538석)에 이어 군단위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인근 해남의 중앙극장(435석), 장흥극장(386)도 강진을 따라오지 못했고, 영광극장이 498석으로 강진극장 다음을 기록한 정도였다. 초창기에는 벤치형태의 긴 나무의자가 놓였고, 몇 년후 접이식 개별의자로 바뀌었다. 강진극장 의 건립은 강진의 문화를 바꿔놓은 일대 큰 사건이었다.

강진의 인구는 6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늘어나 68년에 12만명으로 최대수치를 기록하는데, 강진극장은 늘어나는 인구수 만큼 대호황을 누렸다.

강진극장은 일종의 문화센터였다. 영화상영은 물론 3.1절 기념식이나 8.15광복절 기념식등이 극장에서 열렸고, 선거철이 되면 유명 중앙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도 바로 강진극장이었다. 주말 오후에 학교에서 단체영화를 봤던 기억은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이다.

40대 후반 이상 강진사람들에게 강진극장은 추억 한두개쯤 없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추억을 만들어 준 추억공장이었다. 이렇게 10여년동안 그냥 건물만 있다가 1992년에 볼링장으로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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