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저녁이면 야광 나이트클럽이 사람들로 발딛을 틈이 없었제”

80년대 유흥문화 주름 잡았던 강진 엠파이어, 야광, 미드웨이, 월드 성업
이웃 장흥, 완도, 해남서도 원정 와... 한국유리 직원, 방위병들‘들썩들썩’

강진읍 동성리 일대는 학생들 자취방 빼곡
지금은 엠파이어클럽 한 곳 명맥 유지


윗쪽 사진은 야광나이트클럽이 있었던 강진읍 농협군지부앞 2층건물의 모습이다. 2층에 야광이 있었는데 90년도까지 운영됐다. 아래 사진은 강진읍 동성리 자비원골목 입구에 있는 주택이다. 오래전 자취방이 있었던 전형적인 건물이다.
80년대 강진의 문화를 거론할 때 유흥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유리 강진광업소가 80년대 들어 직원이 120명까지 늘어나고, 해태유업 강진공장이 역시 가동되면서 강진은 매월 정기적으로 현금이 유입되는 지역으로 변했다. 가을철 벼수매나 여름철 보리수매때나 현금이 돌던것과 완전히 상황이 바뀐 것이다.

한국유리에 근무했던 한 주민은 “강진읍의 술집이나 식당에서 한국유리 직원이라고 하면 외상을 주지 않은 곳이 없었다”며 “매월 11일 월급날이 되면 하루도 밀리지 않고 외상을 잘 갚았기 때문에 외상을 하면 오히려 좋아 했다”고 웃었다.

또 다른 한 주민은 “당시에는 외상을 먹는게 일상적인 일이였고, 또 월급날 외상값을 갚을 때 서비스 술이 나왔기 때문에 이래저래 강진읍은 매일같이 잔치날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호주머니에 돈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강진읍에 유흥업소가 경쟁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1979년에 강진읍 동성리 태화당 한약방 2층에서 엠파이어란 나이트클럽이 들어선 이후 82년에 지금의 강진신협옆 2층 건물에 야광이란 현대식 나이트클럽이 들어섰다. 첨단 무대에 좋은 조명과 짱짱한 음향을 갖춘 곳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약 1000여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미드웨이란 나이트클럽이 지금의 오창근내과 자리에 독립 건물로 들어섰다. 미드웨이의 출현은 당시로서 획기적인 것이여서 매일 벌어지는 쇼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줄을 서곤 했다. 이어서 월드란 나이트클럽이 들어서는등 80년대 후반까지 강진읍에서만 4~5개의 나이트클럽이 성업했다.

강진의 나이트클럽이 급속히 많아지고 시설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해남과 장흥에서 원정을 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완도의 고금도에서 날마다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아서 마량 부두에 매일 봉고차를 대기시켜 놓고 배를 타고 건너오는 손님들을 강진읍으로 실어 나를 정도였다.

강진의 나이트클럽들이 가장 흥행을 누린 때는 연말과 명절때였다. 지금은 문화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연말이면 회사나 동네 모임에서 나이트클럽을 가는게 필수 코스였다. 한국유리나 해태유업 직원들 외에도 강진군청 공무원들도 큰 손님이었고, 면단위 마을에서도 택시를 타고 나이트클럽을 찾는게 당시 큰 문화였다.

나이트클럽이 가장 붐비는 때는 역시 명절때였다. 대도시에서 직장에 다니다 설이나 추석에 고향에 내려 온 청소년들이 친구들을 만나면 나이트클럽으로 모여 들었다. 80년대 중반에 강진읍내 나이트 클럽에서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있던 한 주민은 “명절 전날 밤이 되면 고향에 내려온 직장인들이 몽땅 나이트클럽으로 모여들어 말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며 “옷이나 머리 모양새가 달랐기 때문에 대도시에 내려온 사람들인지 금방 분간이 갔다”고 말했다.      

지금은 강진읍에서 나이트클럽으로는 엠파이어 한 곳이 명맥을 유지 하고 있다. 버스터미널 건너편 2층 건물이다. 필자는 며칠전 후배와 함께 그곳에 간적이 있는데, 연초여서 그런지 넓은 홀에 손님이 한명도 없었다. 그래도 박상옥 사장님의 악기 연주 실력이 뛰어나서 20여년전에 불렀던 ‘남행열차’를 재미있게 불렀다. 여전히 멋과 흥이 있는 곳이였고, 아울러 하나 더 보태자면 추억이 살아있는 곳이였다. 
   
80년대 후반까지 강진의 유흥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 중에 방위병들을 빼 놓을 수 없다. 방위병 제도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존재했지만 ‘막강한’ 병력을 자랑할때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였다. 70년대에는 각 읍면에 50여명에 달하는 소대병력이 배치돼 있었으며, 80년대로 들어서며 규모가 다소 줄어들기는 했으나 면단위 부대에 30~40여명이 근무를 했다.

특히 대대본부가 있는 강진읍 기룡마을 3대대에는 기동대라고 해서 160여명 규모의 중대병력이 현역 기동부대와 다름없는 훈련을 받으며 출퇴근 근무를 했다. 이 때문에 매일 군내버스가 배치돼 강진읍에서 군부대까지 방위병들을 실어나르곤 했다. 버스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강진읍에서 군부대까지 출퇴근을 했다. 길을 아는 방위병들은 자전거를 타고 남포둑을 타고 오다가 중간에서 농로를 타고 군부대로 가는 코스를 이용하곤 했다. 

이 병력들이 오후 6시에 퇴근을 하면 자율시간이 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읍내 유흥가는 물론 면단위 술집들이 술렁거렸다. 방위병 한명을 제대시킬려면 논을 한마지기 팔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당시 농촌에서 부모들의 부담이 굉장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전설이다.  

같은 기간을 근무하는 방위병이였지만 날마다 억센 훈련을 하는 ‘대대방위’와 날마다 지서 무기고를 지키는 ‘면중대방위’는 상당한 차별을 받아야 했다. 면중대방위들은 정기적으로 대대에 들어가 기본훈련을 받곤 했는데 위병소를 통과하는게 보통 곤욕이 아니였다. 대대방위들이 면중대방위들의 군기를 잡기 위해 멀리 초입에서부터 이런저런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면중대방위들 사이에는 대대에 들어가는 전날 밤에는 잠을 설친다는 말이 병가지상사로 있을 정도였다.

특히 면중대 신병들이 오면 반드시 대대에 들러 신고식 비슷한 것을 해야 했는데 이때가 되면 대대근무 방위병들이 면중대 신병들의 군기를 잡는다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 저런 시간속에 국방부 시간은 가는 것이였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시의 일들이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대대에서 근무했던 방위병들은 지금도 “우리는 면대 방위들과 근본이 달랐다”고 주장하곤 하지만 면대에서 비교적 편하게 근무했던 방위병들은 “그대와 우리가 뭐가 다르냐. 같은 방위였제”하면서 웃곤 하는 것이다.

80년대 강진의 주거문화라고 하면 셋방 문화와 자취방 문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진에서도 결혼후 본가에서 살지 않으면 셋방살이부터 시작하는게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셋방에서 시작해 조금 큰 방으로 옮기고, 다시 작은 독채로 이사해서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하는게 일반적인 생활문화였다.  

강진읍 터미널 주변에는 셋방을 사는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지금은 연세의원이 있는 자리에 차외과라는 병원이 있었는데 그 아래쪽으로 가건물 형태로 지은 다섯채 정도의 쪽방이 있었다. 80년대 후반 그 방들을 모두 젊은 부부들의 살림집이였다.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강진읍의 한 주민은 “해태유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는데 월급이 많지 않아서 어려운 생활을 했던 기억이 난다”며 “당시에는 강진읍에 탁구장이 많았는데 돈을 아끼려고 탁구장을 자주 갔었다”고 웃었다.

80년대 하면 역시 학생들의 자취문화를 잊을 수 없다. 강진농업고등학교와 강진성요셉여고에는 여전히 유학생들이 많았다.

강진농고만 해도 80년대 중반까지 완도와 해남, 장흥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보통 한반에 20여명이 됐다. 또 면단위 교통이 좋지 않은 마을에서 온 학생들도 많았는데 이 학생들이 대부분 자취를 했던 것이다. 자취 구역은 강진읍의 경우 동성리를 기점으로 지금의 대흥관 주변에서부터 시작해 사의재 주변, 자비원 골목 일대가 온통 자취방이였다. 자취방에는 항상 자취생 친구들이 들락날락하기 마련이여서 이 일대는  매일같이 학생들로 넘쳐나는 골목이었다.

또 다른 자취촌을 이야기하자면 역시 평동리 일대가 있다. 성요셉여고를 끼고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자취촌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동성리와 평동리일대에는 요즘도 골목을 걷다 보면 스레트지붕에 촘촘히 창문이 박혀 있는 작은 건물들을 구경할 수가 있다. 그 건물들은 열에 아홉은 한때 학생들의 자취방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요즘에는 강진의 고등학생들 중에 자취를 하는 학생은 한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숙사가 있고, 좋은 교통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80년대는 가고, 강진사람들도 90년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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